131화. 아이와 노인은 닮았다 (3)
스텝이 은우를 피아노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은우의 피아노 옆에는 보리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었다.
“큐 싸인 떨어지면 연주를 시작하면 돼요. 보리는 얌전히 있겠지?”
“걱쩡하지 마세요. 보리는 말 잘 드러요.”
은우는 준비를 마친 채 무대 위에서 긴장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보리는 피아노 옆 작은 소파에 앉아서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유정열이 은우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번에 모실 가수는요. 세상의 모든 귀욤 열매를 드시고 온 분입니다. 타이틀 제목이 글쎄 [난 너무 귀여워]예요. 제목 실화임? 오늘 부를 노래는 [나의 강아지에게]라는 곡인데요. 오늘 선곡을 다섯 살짜리 이 가수분이 직접 정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이은우군입니다. [나의 강아지에게]”
조명이 은우와 보리를 비추었다.
은우는 천천히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아기의 손에 맞게 쉬운 편곡을 해 두었지.’
은우는 자신이 파리넬리일 때 갈고 닦은 피아노 솜씨가 모두 발휘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기의 작고 여린 손가락과 짧은 팔은 화려하고 빠른 연주 솜씨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피아노 천재로까지 주목받고 싶진 않으니까.’
은우는 어쩌면 자신이 파리넬리일 때 닦은 피아노 실력을 다 발휘하는 순간 피아노 신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능 검사에서 언어 천재라고 나온 것처럼 말이지.’
아기의 몸에 노인의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피곤한 일만 생길 뿐이다.
은우는 천천히 편곡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보리가 리듬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관객석에서 찬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은우 피아노 치는 거 너무 귀엽다.”
“손가락 너무 작아. 난 저 나이에 학교종이도 못 쳤는데. 은우 천재 아냐?”
“은우가 못 하는 게 어딨어? 은우는 노래 천재, 연기 천재, 춤 천재.”
“보리 좀 봐. 너무 귀여워. 꼬리로 리듬 맞추는 거 봐.”
“보리도 천재 아닐까? 원래 개들이 저렇게 리듬 잘 맞추니?”
“글쎄. 개는 잘 모르겠는데.”
은우는 관객석에서 들리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너무 잘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겠어. 난 스타가 되고 싶은 거지, 천재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니까. 내가 가진 재능과 경험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만 사용할 거야.’
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내 칭규 보이. 새까먄 코가 너무 기여어.
부드러운 꼬리로 냐를 반기면 냐는 세상에서 갸장 행복햔 샤람.
너능 냐의 초콜릿
너능 냐의 마카롱
너능 냐의 공룡변신로봇
세상에서 갸장 조은 너.]
은우는 보리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보리는 생각했다.
‘처음에 강아지로 태어났을 때 난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마음 착한 은우 아빠가 나를 구해주었지. 그렇게 해서 만난 너와 나.
전생에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친구가 없는 게 문제라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어. 내 인생엔 수학만 있으면 됐으니까. 나는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리고 수학을 연구했어.
수학이 인생의 전부였지.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삶엔 관심이 없었어. 친구가 왜 필요한지도 몰랐고. 아마 내가 죽었을 때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 거야.
비록 이번 생에 난 강아지로 태어났지만, 너라는 친구를 얻어서 기뻐. 보리가 돼서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지. 어떻게 서로를 아껴주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아.
참 웃기지? 강아지가 돼서야 인간의 감정을 알게 되다니.’
보리는 소파에서 뛰어내려서 은우의 피아노 의자 위로 올라갔다.
보리가 은우에게 살짝 기댔다.
은우는 노래를 계속했다.
[우린 함께 장냐늘 치고
우린 함께 사교도 치고
우린 함께 혼냐고
그래도 너와 함께 이뜨면
모든 거시 추억.
함께 거러온 시간쳐럼
야프로도 냔 너와 함께
따뜨탄 이 빋쏙을 영언히.]
피아노를 치는 은우의 뒷모습과 은우에게 기댄 보리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카메라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이야.
음악 프로에서 순간이 주는 임팩트가 이렇게 큰 장면을 만나게 되다니.’
관객석의 관객들도 은우와 보리의 뒷모습에 감동했다.
‘너무 뭉클해. 아기와 강아지의 우정.’
‘작년에 세상을 떠난 우리 집 몽실이가 떠오른다. 몽실아. 강아지별에서 잘 지내고 있지?’
‘나도 강아지 키우고 싶다. 저런 우정을 느껴보고 싶어.’
연주가 끝나고 은우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멈추었다.
관객석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앵콜.”
“앵콜.”
“너무 멋졌어.”
“은우랑 보리랑 한 곡 더 해라.”
쏟아지는 함성 위로 사회자 유정열이 무대 위로 나왔다.
은우는 스텝의 도움을 받아 피아노에서 내려왔다.
스텝이 유정열 옆에 아기용 의자를 놓아주었다.
유정열이 스텝에게 말했다.
“저도 아기용 의자 부탁드려요. 제 의자가 높아서 카메라에 예쁘게 안 잡힐 것 같아서요.”
스텝이 유정열에게도 아기용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정열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기용 의자에 앉았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오늘은 은우군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기 위해서 아기용 의자에 앉아서 진행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은우군, 피아노 솜씨 깜짝 놀랐어요. 어디서 배웠어요?”
은우는 생각했다.
‘파리넬리이던 시절에 음악가이던 아버지께 배웠어요. 노래 부르는 게 직업이니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서라도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건 필수였죠. 눈을 뜨면 작곡가인 형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었는걸요.’
은우가 말했다.
“꿈메서 배어떠요.”
“꿈에서 피아노를 치다니. 대단하네요. 난 저 나이 때 무슨 꿈을 꿨더라.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옆에 앉아 있던 보리가 짖었다.
“멍멍(우리 은우 피아노 솜씨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지금 보여준 건 집에서 치는 것의 10분의 일도 안 보여줬다고.)”
유정열이 은우에게 물었다.
“뭐라고 한 거예요. 보리가.”
“보리는 꾸메서 매일 고기 먹는대요. 보리는 가끔 코도 고라요.”
은우가 보리의 코 고는 장면을 흉내 냈다.
작은 코를 훌쩍이듯 실룩이면서 대는 드르렁 소리에 모두들 쓰러졌다.
“드르렁. 드르렁. 요로케요.”
유정열이 은우의 표정을 흉내 내려고 코를 훌쩍였다.
“이상하다. 은우는 저렇게 귀여운데 왜 난 그냥 감기 걸린 사람 같지? 따라 하면 안 되겠다. 좋겠어요. 은우군. 뭘 해도 귀여워서.”
“헤헤. 횬아도 기여어요.”
“고맙네요. 횬아라고 불러줘서.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나이인데. 이 곡 굉장히 감동적인데 은우가 만든 곡이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은우는 생각했다.
‘보리는 저한테 정말 특별한 친구여서요. 저와 함께 자랐고 저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인생 3회차인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여서 제 고민을 전부 다 들어줄 수 있는 친구예요.
아마 보리에게 저는 더 특별할 거예요. 보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요.
그 고마운 마음을 이 노래에 담고 싶었어요.’
보리가 은우의 무릎 위로 올라가 볼을 핥았다.
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헤헤. 가안지러. 보리가 너뮤 조아서 만드러떠요. 보리야 따랑해.”
보리가 은우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은우의 입술을 핥았다.
“보리가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대답하듯이 은우에게 뽀뽀하네요. 부럽다. 나도 강아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보리는 세상에서 하냐예요.”
“멍멍(은우도 세상에서 하나뿐이야.)”
“보리는 너무 행복할 거 같아요. 은우가 이렇게 멋진 노래도 만들어주고. 자, 은우군 우리 한 곡 더 듣고 이만 헤어져야 할 거 같은데. 다음 곡은 뭔가요?”
“[아빠와 함께 춤을]이요. 가샤를 바꺼떠요.”
“기대할게요.”
[아빠와 함께 춤을]을 중견 가수 이진환이 아들인 일곱 살 태윤군과 함께 불렀던 곡으로 그 당시 크게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아빠와 아들이 부르는 몇 안 되는 곡이었다.
아들과 아빠가 노래를 통해 주고받는 가사가 아기자기한 곡이었으나 나온 지 10년이 더 된 곡이어서 이 곡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대 위에는 보리를 위해 산책 줄, 간식, 삑삑이 소리가 나는 곰 인형, 담요가 놓였다.
전주가 흘러나오고 은우가 귀엽게 무릎을 들썩이며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춤을 추었다.
[뚜비뚜바 뚜비뚜바 뚜비뚜바 뚜뚜바]
보리도 리듬에 맞춰 꼬리를 흔들었다.
은우가 노래를 시작했다.
[보리야 우리 갸치 신나게 노라보쟈. 산책 나갈까?]
“멍멍”
보리가 산책 줄을 물고 와 은우 앞에서 꼬리 쳤다.
[보리야 우리 갸치 신나게 노라보쟈. 간식 머글까?]
“멍멍”
보리가 간식을 물고 와 은우에게 주었다.
은우는 다시 간식을 보리에게 주었다.
보리가 간식을 앞발로 잡고 씹었다.
은우는 노래를 계속하면서 강아지춤을 추었다.
강아지가 앞발을 들고 흔드는 동작을 따라 하는 은우.
양손을 앞발처럼 오그리고 귀엽게 춤을 추었다.
[너와 함께 이뜨면 매이리 소풍 가타.
너와 함께 이뜨면 매이리 선뮬 가타.]
보리가 간식을 다 먹고 앞발을 들고 두 다리로 서서 함께 춤을 추었다.
은우의 노래는 계속됐다.
[보리야 우리 갸치 신나게 노라보쟈. 장난감 가지고 놀까?]
“멍멍”
보리가 곰 인형을 물고 왔다.
곰 인형에선 삑삑 소리가 났다.
보리가 신이 나서 무대 위에서 곰 인형을 잡고 흔들었다.
은우도 신이 나서 보리에게 장난을 쳤다.
“앙앙.”
강아지 흉내를 내는 은우.
보리는 은우에게 뺏길까 봐 곰 인형을 더 세게 잡고 흔들었다.
[너와 함께 이뜨면 모든 고시 노리터야.
너와 함께 이뜨면 모든 고시 노리공어니야.
보리야 우리 갸치 이제 그만 자까?]
보리가 담요를 물어왔다.
은우는 무대 위에 앉자 보리가 은우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보리는 은우의 옆에 몸을 돌돌 말고 누웠다.
[너와 함께 이떠서 오늘도 행복해떠. 잘자. 보이야.
내일 만냐]
“멍멍”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카메라 감독은 은우와 보리가 만들어낸 드라마에 감탄했다.
‘가사를 동작으로 표현한 것뿐인데 둘 사이에 눈빛이 너무 절묘했어. 보리도 엄청 똑똑한 개인 게 틀림없어. 가사에 맞춰서 동작을 정확하게 해내다니.
짖는 소리도 조금씩 달랐어. 마지막에 [잘자. 보이야]에 대한 멍멍은 부드럽고 잔잔한 짖음이었고 처음에 [산책 나갈까?]에 대한 멍멍은 활기차고 생동감 있었어.
개들이 짖는 소리가 다 똑같은 게 아니었구나.’
관객석에서도 감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제대로 힐링하고 간다. 내가 본 어떤 예능보다 감동적이었어.’
‘노래를 들으러 온 건데 드라마를 본 것 같은 이 기분 뭐지? 노래도 노래인데 은우와 보리 사이의 감정이 느껴지는 장면으로 인해 얻은 감동도 너무 컸어. 이건 노래만 들으면 안 되고 꼭 무대를 봐야만 해. 내가 오늘 크레파스에 올 수 있었다는 게 너무 행운이야. 이런 공연을 어디에 가서 또 볼 수 있을까?’
‘타이틀곡인 [난 너무 귀여워]만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크레파스에서 들으니 [나의 강아지에게]도 너무 좋은 거 같아. 은우 앨범을 사야겠어. 아무래도.’
‘은우가 부른 곡 모두 너무 좋았어. 은우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도 곡 분위기에 너무 잘 어울렸어. 음색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
‘집에 가서 영상을 다시 반복해서 봐야겠어. 또 보고 싶은 그런 장면이야. 오늘 공연은 내 인생 공연이야.’
***
햇살 노인정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파전을 부치고 있었다.
“요즘 화성댁 얼굴 좋아 보이네.”
화성댁 할머니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은우가 그림을 그려주고 난 뒤로 기분이 좋아졌어. 매일 집 밖을 나올 때마다 그림 속의 남편이 날 위해 힘내라고 웃어주는 것만 같아.”
파전을 부치던 할머니가 말했다.
“난 전부터 화성댁이 부러웠어. 우리 영감은 바람을 얼마나 피웠나. 내가 우리 첫째 아들 임신했을 때도 장터 다방레지랑 바람이 나서는 아주 징글징글했다니까. 난 지금도 우리 영감은 안 보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여. 우리 영감은 도박을 얼마나 했나. 내가 아주 그 빚 갚느라 징글징글했다니까. 난 꼭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서 우리 영감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야. 당해보라지. 암.”
“아이고, 그 영감을 또 만나? 난 아무리 복수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
듣고 있던 화성댁이 물었다.
“그럼 경자 언니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어?”
“있지. 왜 없어. 우리 영감이 안 보고 싶다는 거지. 난 우리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 내가 일곱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잖아. 그 뒤로 큰 딸인 내가 엄마 대신 동생들 먹이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힘들 때마다 엄마 이름을 그렇게 불렀는데 꿈에도 잘 안 나타나시더라고.”
“은우한테 엄마를 그려달라고 해 봐요. 경자 언니.”
“은우가 우리 동네에 또 올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언니. 난 요새 잠이 잘 와.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경로당 할머니들의 눈이 모두 화성댁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