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아이와 노인은 닮았다 (2)
은우와 보리는 백수희의 차를 타고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다 왔습니다. 월드 스타님.”
“네네네네네.”
은우와 보리는 차에서 내렸다.
벽화 근처에선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영하는 명석이의 손을 잡은 여자아기가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현정아, 여기 봐. 하나, 둘, 셋.”
여자아기의 뒤에선 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커플 한 쌍. 가족 한 쌍.
양산을 쓴 할머니의 그림 옆에도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이 있었다.
여자는 할머니의 양산 밑에 서서 함께 양산을 쓰는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스마트폰을 쥔 남자가 외쳤다.
“이쁘다. 우리 자기. 아유 이뻐. 하나, 둘, 셋.”
은우는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행복을 느꼈다.
‘그림의 힘이 음악만큼이나 대단하구나. 사람들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걸 보면. 전전생에선 몰랐던 건데 에우테르페의 재능이 대단해.’
그림을 그려주었던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은우를 알아보고 반갑게 뛰어왔다.
“은우야. 네 덕분에 내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됐어. 고마워.”
“헤헤헤헤. 거마어요. 할뮤니.”
“그날 이후로 매일매일 사람들이 집 앞에 사진을 찍으러 와. 다들 날 알아보고 할머니 참 고우시네요. 하고 칭찬을 해 줘. 경로당에선 다들 날 부러워하고. 요즘 매일매일이 행복해.”
“할뮤니갸 행복해서 조아요.”
“참, 우리 경로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은우 너를 만나고 싶어 해. 그림을 부탁하고 싶다고. 이 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말 많거든.”
“조아요. 할뮤니. 제갸 그릴게요.”
그때 길 건너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경선이 할머니, 은우야.”
“숨넘어가겠어. 천천히 와. 화성댁.”
“은우를 만나다니 내가 오늘 운이 좋네. 은우야 오늘 시간 좀 있어? 그림 좀 부탁하고 싶은데.”
화성댁은 가방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은우에게 주었다.
빛이 바랜 사진은 오래된 것인지 네 귀퉁이가 닳아있었다.
“내 남편이야. 월남전에 파병 가서 죽었어.”
“벌써 오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 이제 그만 잊어버려. 화성댁.”
“그게 맘처럼 쉽게 되나요? 사진 속에선 꼭 어제처럼 웃고 있는데.”
“그래, 알아. 내가 그 맘 알아. 직접 눈앞에서 죽는 걸 봐도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본 적이 없으니 믿어지지 않겠지. 그럼그럼.”
은우는 화성댁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쟁이란 건 무서운 거야. 지금도 아프리카는 전쟁 중이겠지. 나도 전쟁으로 엄마와 아빠를 잃었어. 눈앞에서 엄마와 아빠가 죽는 모습을 봤지만 믿어지지 않았어. 하루하루가 너무 두려웠어. 동생이 없었다면 난 아마 더 일찍 죽고 말았을 거야.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어.’
은우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군인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군모에 총을 들고 있는 군인은 카메라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팔이 강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할뮤니, 할뮤니 지븐 어디예요?”
화성댁의 집은 경선이 할머니네의 맞은편 골목에 있었다.
화성댁은 은우를 자신의 집으로 인도했다.
백수희는 길동에게 물어 문구점의 위치를 확인하고 벽화에 필요한 아크릴 물감을 사러 갔다.
은우는 화성댁에게 물었다.
“할뮤니. 할뷰지는 어떤 사람이어떠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 동백이거든. 할아버지가 함께 살 때는 할머니를 위해서 할아버지가 동네 전체에 동백꽃을 심었었어. 그래서 이 동네가 겨울이면 동백꽃으로 가득 찼었단다.”
옆에 서 있던 경선이 할머니가 말했다.
“저 집 영감이 로맨티스트였지. 우리 때는 참 보기 힘든 사람이었어. 화성댁 힘들다고 무거운 물건도 다 들어다 주고 그랬지. 우리 집 영감은 술 마시고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는데 말이야.”
화성댁은 추억에 젖은 듯이 말했다.
“내가 장 보러 갔다가 비가 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할아버지가 시장으로 나를 데리러 왔었단다.”
“정말 머쪄요. 할뮤니.”
“월남에 간다고 할 때 더 말릴 걸 그랬나 봐.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못 볼 줄 알았으면 죽어도 못 보낸다고 했을 텐데.”
경선이 할머니가 화성댁을 위로했다.
“알면 그게 인생인가? 다 모르고 그러고 사는 거지. 너무 자책하지 말아.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은우는 파리넬리이던 때를 떠올렸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고, 나도 노인이 되고 나선 유난히도 마틸다가 그리웠었지. 마틸다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다 보낸 날들도 있었으니까.’
신분 차이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마틸다와의 사랑. 그 사랑은 이룰 수 없기에 더 간절하고 더 애가 탔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인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지. 화성댁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쓸쓸할지 알 것 같아.’
은우는 할머니를 위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알 것만 같았다.
백수희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길동 씨 차에서 빌려오는 건데 말이지.”
백수희가 아크릴 물감을 내려놓았다.
은우는 진지하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의 어떤 곳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구상을 마친 은우가 붓을 들었다.
은우의 붓끝에서 사진 속의 젊은 군인이 살아났다.
화성댁 할머니의 남편은 셔츠에 바지를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골목의 입구에 서서 우산을 들고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 속의 할머니 역시 20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젊어진 화성댁이 남편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은우의 그림을 바라보던 화성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너무도 그리워했던 순간이야.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여보 하늘나라는 어때요?’
화성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은우는 긴 치마에 발목 양말을 신은 화성댁을 그려 넣었다.
화성댁은 긴 머리를 풀어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경선이 할머니가 감탄을 터트렸다.
“내 그림보다 더 진짜 같아. 화성댁 남편이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아. 그리고 화성댁은 어쩜 저렇게 고와. 나도 잊고 있었는데 저 그림 보니 화성댁의 젊은 시절이 떠오르네. 화성댁 참 고왔었는데.”
은우는 벽의 가장자리에 동백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를 수놓았던 동백꽃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었을 거야.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집 전체에 동백꽃을 그려드리고 싶어.’
은우가 백수희에게 말했다.
“눈나. 동백꽃 그릴 수 이떠요?”
“잘 그리진 못하지만 그릴 수는 있지.”
“여피랑 뒤에도 동백꼬츨 그려 주떼요.”
백수희가 벽의 옆면과 뒷면에도 동백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백꽃이 한두 송이씩 늘어날 때마다 화성댁의 표정이 밝아졌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다고 너무 슬퍼 마시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세요.’
은우는 마지막 동백꽃을 완성시키고 나서 재능창을 열었다.
[올림포스의 천마 페가수스의 시인의 상상력 레벨 2.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의 추억에 생명을 불어넣어 드릴게요.’
화성댁 할머니는 그림 속에서 걸어나오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우산을 쓴 채 화성댁에게 말했다.
“비 오는데 안 젖었어?”
“뛰어오면 돼요. 안 젖었어요.”
“뛰어오긴 숨차게. 날 부르지. 가만있으면 내가 데리러 갔을 텐데.”
“두 발 멀쩡한데 뭣 하러 오라 가라 해요. 당신 힘들게.”
“난 나 힘든 거보다 당신 힘든 게 더 싫어.”
화성댁 할머니가 대답 대신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유정열의 크레파스 촬영을 앞두고 은우는 보리와 함께 태블릿으로 크레파스를 다시 보기 하고 있었다.
“멍멍(이 방송 정말 좋다. 지난번 출연한 [당신의 가요]도 좋았지만, 이 방송이 더 노래에 집중하게 해 주는 느낌이야. 조명도 그렇고 무대 장치도 너무 좋아. 사회자의 조곤조곤한 말솜씨도 그렇고.)”
“그치? 따뜨탄 분위기갸 너무 조아. 무대도 그러코. 곡 구성도 그러코.”
은우는 방송을 보면서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타이틀곡인 [난 너무 귀여워]도 좋지만, 크레파스 무대에선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소극장 공연처럼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으로 말이야.
춤도 좋지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보리가 말했다.
“멍멍(나도 저런 곳에 나가보고 싶긴 하다. 근데 저런 곳에 나간 강아지는 없겠지?)”
그때 은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보리와 내가 함께 주고받듯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들어가면 멋질 거야.
피아노에 앉아서 간단한 연주도 하고. 파리넬리이던 시절에 배웠던 피아노 실력이면 저 정도 연주는 문제없이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보리도 방송에 출연할 수 있을까?’
은우가 키즈폰에서 길동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횬아. 크레파스에서 부르기로 한 노래요. [나의 강아지에게] 그 곡으로 해도 대요?”
“글쎄. 대표님은 타이틀곡으로 부르겠다고 이미 PD에게 전달을 마친 거 같던데. 뽀뽀 댄스팀도 준비 중인 거 같고.”
“새로운 모스블 보여주고 시퍼요. 팬드레게요. 크레파스 무대엔 [나의 강아지에게]가 어울릴 거 가타요. 그리고 보리도 함께 나갈 거예요.”
“보리가?”
길동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송엔 강아지도 종종 출연을 하긴 하는데 음악 프로에 강아지가 출연한 적이 있으려나? 이거야말로 PD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근데 강라온 대표님이 곡 바꾸는 것도 좋아하시지 않을 텐데.’
평소 강라온 대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길동은 은우와 대표의 의견 차이를 어떻게 좁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은우의 의견을 전하긴 해야겠지.’
길동은 은우와의 통화를 끊고 강라온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동의 예상과는 다르게 강라온 대표는 침착한 말투로 은우의 생각에 대해 물었다.
“그러니까 은우 말은 크레파스 무대에는 좀 더 가창력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곡이 좋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네. 그리고 작은 무대라서 팬들과 호흡하기에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보리도 함께 출연하고 싶다고 했어요. 보리랑 같이 노래를 부를 거래요. 피아노도 치고요.”
“은우 피아노 잘 쳐?”
“전에 같이 LA에 갔을 때 보니 꽤 잘 치더라구요.”
“그건 아직까지 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은우의 모습이군. 그거 좋네. 그럼 이번 크레파스에선 [나의 강아지에게]를 부르라고 해. 보리 출연은 내가 PD에게 말해서 꼭 할 수 있도록 할게.”
길동은 갑자기 달라진 강라온의 태도에 어리둥절했다.
강라온은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지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너에게]도 그렇고. 내가 잘못 판단해서 몇 번 기회를 살리지 못한 적이 있었으니, 이번엔 은우의 감을 믿어보는 수밖에.
그런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은우는 어린데도 당차고 상황 판단이 뛰어나. 역시 [당신의 가요]에서 나왔던 순발력이 그냥 나온 게 아니야.’
강라온은 은우의 생각에 감탄하면서 크레파스 PD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
은우는 크레파스 대기실에서 보리와 함께 있었다.
“멍멍(긴장된다. 나 아까 볼일 봤는데 자꾸만 또 보고 싶어. 무대 위에서 실례하면 어쩌지?)”
“헤헤헤헤. 이보이. 거쩡하지먀. 천재 수학쟈갸 오줌 걱쩡이라니.”
“멍멍(그건 전생이고 지금은 강아지라고. 그리고 나 전생에 완전 음치였는데.)”
“갠차나. 사람드른 니갸 음치인 걸 몰랴. 보이는 기여어. 나처럼. 우린 기여움 세트야.”
“멍멍(그래, 너만 믿고 올라간다.)”
그때 대기실의 문의 열렸다.
“지금 올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