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기 무용단 (1)
강라온이 말을 이었다.
“은우 단독 무대는 어때?”
“어쩔 수 없다면 그렇게 가야겠지만요. 아시잖아요. 그림은 안무팀이 있을 때가 훨씬 낫다는 거? 뭐 지금처럼 은우 따로 안무팀 따로 보여진다면 단독 무대가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아이돌 트레이닝 받는 준비생들 중에서 안무팀을 꾸려볼까?”
“가장 어린 학생이 몇 살인데요?”
“14살.”
“그래도 키 차이가 많이 날 거예요. 은우랑은.”
“14살보다 어린 댄서를 찾을 수 있을까?”
“힘들죠.”
강라온과 이철이 절망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태현이 말했다.
“조카가 키즈 채널을 보던데 거기 춤추는 아기들이 있던데요. 뽀뽀 댄스팀인가?”
“뽀뽀 댄스팀?”
“네. 아기 프로에서 동요 나오면 춤추는 아기들인데 키가 은우보다 조금 컸어요. 7살 아니면 8살 정도로 보이던데. 잠시만요.”
태현이 너투브에서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친구들 모여라. 오늘도 재밌게. 신나는 한글놀이.
가가가가가가가 가로 끝나는 말
바닷가, 시냇가, 예술가, 요가
나나나나나나나 나로 끝나는 말
바나나, 누나, 하나, 그러나”
영상 속에서 아기들은 귀여운 한글춤을 추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기역, 니은을 만드는 핑거댄스와 함께 깡충깡충 뛰는 단순한 안무였다.
강라온이 영상을 보고 말했다.
“키는 잘 맞을 거 같은데. 얘네가 할 수 있을까?”
이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한번 가르쳐 볼게요. 키 차이가 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네요.”
***
경완의 수신기에서 정형욱 PD의 음성이 들렸다.
“두 시간 종료입니다. 이제 촬영을 마치겠습니다. 은우가 서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 주세요.”
경완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이제 미션이 끝났대.”
“미션 완성해떠?”
“응, 미션이 잘 완성됐어. 우리가 해냈어.”
“와, 신난다.”
은우가 박수를 쳤다.
“은우야.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질 시간이야.”
은우가 경완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왜에 퐁퐁아. 내가 나쁜 지 해떠?”
“아니, 그게 아니고 퐁퐁이도 집에 돌아가야 해. 엄마 아빠가 기다려.”
“아아.”
은우는 아쉽지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징쨔?”
은우가 경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야쏙.”
은우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경완은 두꺼운 인형 손을 내밀었다.
“도쟝도 찌거야지.”
은우가 알려준 대로 도장도 찍었다.
‘이런 약속 몇 년 만에 해 보는 건지 모르겠다.’
경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평상시엔 감정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버리고 살았었는데 은우랑 있으니까 감정이 살아나는 기분이야. 잊고 있던 것들도 생각나고.’
경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첫사랑 경희가 떠올랐다.
‘경희랑 소꿉놀이하다가 민들레꽃을 따다가 풀꽃반지를 끼워 주었었는데. 그땐 어린 맘에 경희를 좋아해서 경희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 풀꽃 반지 끼워 주고 약속을 했구나. 도장도 찍고.
경희가 3학년 때 전학 가버려서 그 뒤로 못 봤는데.
잘살고 있니? 친구야. 그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
은우가 공룡 변신 로봇 가방에서 마카롱을 꺼내며 말했다.
“퐁퐁아. 이쨔나. 이거 엄마량 아빠량 머겨. 아라찌? 마디뜰 거야.”
“고마워. 은우야.”
경완은 인형 탈 안에서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지어보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이 인형 탈, 처음에는 너무 우스꽝스럽고 장난 같아서 싫었는데 이제 벗기 싫다.’
은우가 퐁퐁이의 다리를 안으며 말했다.
“샤량해 퐁퐁아. 다음 주에 꼭 만냐. 기다릴게.”
“응, 나두.”
경완은 차마 ‘사랑해’라는 단어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말해본 지 얼마나 오래된 걸까? 아기들은 정말 감정 표현이 다양하구나. 사랑한다는 말도 잘하고.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지도 정말 오래됐어. 아이들도 너무 커버렸고, 아내도 신혼이 지나고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은우가 뱉은 ‘사랑해’라는 단어는 경완의 마음에 커다란 파도를 만들고 지나갔다.
길동이 은우를 데리러 왔다.
“횬아, 여기 퐁퐁이예요. 내 칭규. 이쁘죠?”
“아, 네가 퐁퐁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은우에게. 은우가 매일매일 네 얘길 했거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은우랑 친하게 지낼게요. 은우야 어서 차 타고 집에 가.”
“퐁퐁이는 누구량 갸? 지베?”
“나는 알파카라서 잘 걸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댜리 안 아퍄?”
“알파카들은 원래 많이 걸어. 높은 산에서도 아주 잘 걷는걸. 먼저 가.”
“징쨔 갠차냐?”
은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경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길동도 은우를 달랬다.
“은우야, 퐁퐁이는 혼자 잘 갈 수 있으니까 어서 집에 가자. 보리가 기다리잖아.”
“마쟈. 보리도 보구 십댜.”
은우가 퐁퐁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퐁퐁아, 안뇽. 다음 주에 만냐.”
“다음 주에 보자. 은우야.”
경완은 은우를 태운 길동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은우가 떠난 뒤에 퐁퐁이 탈을 벗으며 경완은 생각했다.
‘그전까진 내가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퐁퐁이 탈을 쓰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어. 정말 잘살고 있었던 걸까? 매일 실적, 실적 하다가 정작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은우는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노량아, 까망아 어디쪄?”
은우는 가방도 벗지 않고 노랑이와 까망이를 찾으러 나섰다.
노랑이와 까망이는 미끄럼틀 아래에 있었다.
아기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연아가 노랑이에게 장난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잡야 뱌, 노량아.”
장난감이 흔들릴 때마다 노랑이는 작은 발을 내밀어 냥냥펀치를 날렸다.
준수는 옆에서 노랑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네 노량이 션수, 펀치. 펀치.”
준수는 노랑이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지호는 옆에서 키즈폰으로 까망이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까망아. 까망아. 여기 좀 뱌.”
지호가 이름을 부르면 까망이는 이름을 알아듣는지 낮게 갸르릉거렸다.
혜린이는 머리띠를 가져와서 까망이에게 대 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혜린이는 머리띠의 크기가 고민이었다.
‘머리띠를 하면 예쁠 거 같은데 너무 커. 까망이는 너무 작잖아. 어떻게 하지?’
은우는 노랑이와 까망이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서 서운했다.
‘노랑아, 까망아, 난 너희가 너무 좋은데. 너희는 날 봐주지 않는구나.’
김마리아 수녀님이 은우에게 인사했다.
“은우 왔구나. 표정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수녀님. 까망이랑 노랑이갸 저랑 안 노랴져요.”
“친구들이랑 노느라 그렇지. 친구들은 많은데 고양이는 두 마리뿐이니 어쩔 수가 없지. 이제 우리 노랑이랑 까망이 좀 쉬게 해 줄까?”
수녀님이 아기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우리 노랑이랑 까망이를 위해서 캣타워를 만들어 볼까?”
“와아? 캐타어요?”
아기들이 수녀님을 바라보았다.
“응,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캣타워. 캣터널 이런 걸 만들어주면 노랑이랑 까망이가 좋아할 거야.”
“네네네네네.”
은우가 소리 높여 대답했다.
김마리아 수녀님이 은우를 보고 웃었다.
“은우야, 니에 니에 니에 안 하고 네네네네네 하기로 했어?”
“헤헤헤헤. 네네네네네가 더 재미떠요.”
수녀님이 다용도실에서 빈 박스를 여러 개 가지고 왔다.
“빈 박스를 여러 개 붙여서 캣타워를 만들 거야. 이렇게 테이프로 잘 붙이면 돼요.”
“네네네네네.”
아기들은 수녀님이 시키는 대로 박스에 테이프칠을 했다.
은우는 테이프로 붙인 박스를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은우는 테이프로 박스를 붙인 다음 그 안에 쏘옥 들어가서 울었다.
“이야옹. 이야옹. 냐는 은우 고양이댜.”
그러자 옆에서 은우가 하는 것을 본 준수가 은우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준수도 상자 안에 들어가더니 울었다.
“이야옹. 이야옹. 냐는 준수 고양이댜.”
혜린이도 은우의 행동을 따라 해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옹. 이야옹. 냐는 고양이 공듀님이댜.”
수녀님은 아기들의 고양이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얘들아, 여기 고양이가 몇 마리예요?”
“은우 고양이요.”
“준슈 고양이요.”
“혜린이 공듀님 고양이요.”
“연아 공듀님 고양이.”
“지호 고양이.”
“시우 고양이.”
아기들은 상자 속에서 계속 울어댔다.
미끄럼틀 아래에 있던 노랑이와 까망이가 갑자기 들리는 울음소리가 이상했던지 아기들 곁으로 왔다.
노랑이와 까망이가 울었다.
“미야옹.”
아기들도 울었다.
“이야옹.”
김마리아 수녀님은 아기들과 고양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캣타워를 만들려고 했는데 아기집이 돼 버렸네. 그나저나 아기들이 고양이 흉내에 재미 들린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하지?’
결국 김마리아 수녀님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애들아 간식 먹자.”
아기들이 상자 안에서 나와 수녀님께 말했다.
“수녀님 간식 주세요.”
노랑이와 까망이도 분위기를 아는 것인지 수녀님 다리 옆에 붙어 갸르릉거렸다.
***
은우 티비의 첫 방송 날 초록창 게시판은 팬들의 댓글로 뒤덮였다.
에티우 : 은우 단독 채널이 생기다니 너무 좋아요. 초록창에 상 줘야 함.
광묵 : 저 홍대에서 은우 만났잖아요. 실제로 보니 외모도 외모인데 밝은 목소리에 방긋방긋 잘 웃어서 너무 이쁘더라구요. 밝은 에너지가 넘쳐요. 은우 만나고 돌아가는데 면접 합격 소식 들었어요. 여러분 모두 은우 만나고 좋은 기운 받아가세요.
찐찌버거 : 전 그날 홍대 못 가서 너무 서운했는데 그래도 오늘 방송분에 그날 찍은 거 나오겠죠?
jah6 : 저도 그날 못 갔는데 너무 서운해 마세요. 오늘 같이 보면서 응원합시다. 그리고 은우 미니 앨범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날을 위해 우리 모두 파이팅해야죠.
jim : 전 은우 앨범 10장 살 거예요. 은우 순위 올라가라고요. 은우 1위 한번 해야죠. 1위. 재롱이들 자존심이 있지.
스페로라 : 은우가 당연히 1등 할 겁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경완 역시 초조한 표정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책상에는 맥주와 오징어, 땅콩, 담배가 놓여 있었다.
‘대학 때 하지 못했던 데뷔를 이제야 하는 건가.’
경완은 4년 내내 나간 연극 동아리에서 한 번도 무대에 서지 못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땐 너무 바보 같았어. 늘 떨기만 하고. 무대에 서고 싶은 열망은 늘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지. 처음엔 정말 쓰기 싫었지만, 저 인형 탈이 나에게 용기를 준 것 같아. 인형 탈 덕분에 편하게 말할 수 있었어.’
경완은 맥주를 따고 오징어를 뜯었다.
집안 식구들에게는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어 자료를 마련해야 하니 방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오롯이 혼자인 공간에서 경완은 묘한 설렘과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드디어 은우 티비가 시작했다.
인트로에는 은우를 만나기 전 경완이 퐁퐁이의 탈을 쓰고 혼자 찍은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의자에 앉아있는 퐁퐁이에게 정형욱 PD가 질문을 했다.
“퐁퐁이는 어디에서 왔나요?”
“저는 페루에서 왔어요. 페루는 비행기를 타고 하루가 넘게 걸리는 아주 먼 곳이에요.”
“퐁퐁이는 언제부터 은우를 알게 됐어요?”
“얼마 전에 은우 팬이 저를 은우에게 선물했어요. 저는 그때부터 은우 침대에서 같이 자고, 은우가 하는 비밀 얘기들을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은우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고 있겠네요.”
“네, 저는 은우의 비밀 친구예요.”
“은우는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해요?”
“계속 바뀌었는데 최근에는 마카롱을 가장 좋아하는 거 같아요. 은우한테서 매일 마카롱 냄새가 나요. 그런데 또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은우는 좋아하는 음식이 계속 바뀌거든요.”
“제일 친한 친구가 맞는 것 같네요. 좋아하는 음식도 잘 알고. 퐁퐁이는 꿈이 뭐예요?”
“제 꿈은 은우랑 행복한 추억을 많이많이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은우가 저를 오래오래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른이 돼서도요.”
“퐁퐁이를 보니까 생각났는데 저도 어렸을 때 퐁퐁이 비슷한 친구가 있었어요. 일기장이었는데. 어렸을 땐 그 친구에게 매일매일 속상한 일들을 털어놓았어요. 엄마한테 종아리를 맞은 날도요. 신기하게 일기장에게 털어놓고 나면 조금 나아지더라구요.
이제 일기를 안 쓴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아주 가끔, 아주 가끔 속상한 날만 그 일기장을 떠올려요.”
“아저씨 일기장이 속상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잊지 마세요. 그 일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