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114화 (114/257)

114화. 퐁퐁이와 함께 (5)

강라온은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들었다.

“배부르고 나른한 오후 두 시. 에너지를 청취자 여러분께 드립니다.

두 시 충전. 빵빵.

이번 코너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어드리는 사연 있는 여자입니다.”

라온은 졸음 방지용 껌을 꺼내 씹었다.

‘은우 음반준비 때문에 어제도 늦게 잤더니 졸리네.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핫에잇이라도 하나 사서 마셔야 하나?’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사연이 흘러나왔다.

진행자인 코메디언 최선미는 성대모사를 하며 사연을 실감 나게 읽어가고 있었다.

“눈물겨운 나의 다이어트 성공기.

저는 이제 3살 딸을 둔 아기엄마입니다. 처음 임신을 했을 땐 아기를 가졌다는 기쁨에 이것저것 입에 당기는 대로 막 먹었어요. 어느새 15킬로가 늘어 65킬로가 됐고 저는 그게 당연히 임신 때문에 찐 살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딸인 세아가 태어나고 나서 10달이 지나고 다른 임산부들은 다들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저만 전과는 다른 모습이 돼 있었습니다. 세아를 낳았는데도 5킬로밖에 빠지지 않았거든요. 달라진 제 모습은 저에게서 자신감을 뺏어 갔고 거울을 볼 때면 한숨부터 나왔어요. 산후 우울증에 폭식증이 겹쳐 체중은 도로 임신할 때와 같은 65킬로가 되었습니다.”

라온은 여자의 사연을 들으며 생각했다.

‘산후 우울증 심각하다고 하던데.

정말 많이 힘들었겠네. 그런데, 저 정도면 다이어트를 계획적으로 해야지. 더 먹으면 어떻게 해. 우울증만 더 심해질 텐데.’

사연은 이어졌다.

“저는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헬스장에 갔습니다. 헬스장에 가니 날씬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지 더 우울해지더라구요. 그래서 헬스장 등록한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이 곡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좋아요. 제가 헬스장 회원분들과 이야기 해 봤는데 다들 이 곡을 좋아하더라구요. 저희 성동구 프리미엄 헬스장의 단골 곡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다이어트의 기쁨과 노력의 달콤함을 알게 해 준 노래를 신청합니다.

이은우의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에게]”

라디오에서 은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쉽지 안쬬? 내 먀미.

포기하고 십쬬? 가끄믄.

노려캐도 제자리.

더 노려캐야 할꺄?”

강라온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저건 은우가 지난번에 가져온 곡 아냐? 저 곡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졌지? 게다가 반응이 너무 좋잖아.’

강라온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은우의 곡명을 검색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에게]

가장 위에 올라온 글은 공무원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강라온은 그 글을 클릭했다.

- 의지박약이던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물해 준 곡. 이은우의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에게]

저는 공무원 시험 장수생입니다. 어느덧 노량진에서 보낸 시간만 5년.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 합격해서 나가고. 점점 자신은 없어지고 시골 부모님도 슬슬 눈치를 주시고. 명절날 집에도 못 내려가고 고시원에만 처박혀서 삶이 우울해졌어요.

제가 제일 힘들었던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원래 기초가 없기도 하고 외우는 것도 안 좋아하고 해서 늘 점수가 제일 안 나왔거든요. 사실 매일 단어를 외웠으면 진작 붙었을 텐데 말이죠.

암튼 저 은우의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웬일로 영어 단어가 잘 외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 이번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제 곧 연수받으러 가요. 여러분 저 같은 의지박약도 해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공부가 안될 땐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에게]를 들어보세요.

강라온은 놀랐다.

‘아니 공부를 잘하게 도와주는 노래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던 적이 없는데. 은우 노래가 단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공부를 잘하게 도와준다고?’

강라온은 어리둥절해서 밑에 있는 다른 카페의 글을 클릭했다.

그 카페는 수능생이 모여있는 ‘수능 시험날 만점을 외치자’라는 카페였다.

- 여러분 공부하기 싫을 때나 잘 안될 때 이은우의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에게]라는 곡 들어보세요. 신기하게 집중이 잘 돼요.

이어지는 댓글들.

[스페로라] : 이 글 읽고 저도 틀고 수학 문제 풀었는데 신기하게 잘 풀렸어요.

[sylv] : 저는 암기가 약해서 한국사가 너무 싫었는데 저 노래 들으면서 하니까 그래도 조금 외워지더라구요.

[에티우] : 마법의 곡인가 봐요. 귀여운 은우가 저 곡에 마법을 건 걸까요?

[백묘앵] : 모르셨나요? 저 곡 이미 저희 반 교실에서 유명해요. 선생님이 아침에 조회할 때 틀어줘요. 오늘도 힘내라고요. 그럼 신기하게 힘이 나더라구요.

[with] : 저희는 전교생이 저 노래 외우고 다녀요. 애들이 가사를 다 알아서 모의고사 보기 전에 떼창으로 부릅니다.

강라온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가 은우가 만든 곡의 진가를 못 알아본 걸까? 이런 곡을 음반에 실었어야 하는 건데. 내 판단 미스로 이 곡이 음반에 실리지 못했다니.’

***

경완은 퐁퐁이 탈을 쓰면서 구시렁대고 있었다.

‘내가 인형 탈을 쓰게 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걸 매주 써야 된다는 거지. 하아.’

경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깊은 빡침을 느꼈다.

하지만 부하 직원들의 그 진심 어린 눈빛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현재 제작총괄부서는 제대로 된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

경완은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 잡으려 이육사의 절정을 암송했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비껴 디딜 곳조차 없다.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한번 해 보자. 잘할 수 있어. 아자.’

오늘의 촬영장면은 퐁퐁이와 은우가 처음 만나는 장면.

촬영 장소는 놀이터로 설정이 돼 있었다.

정형욱 PD가 경완에게 유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부장님. 대본은 다 외우셨죠?”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내 신분이 들통나면 안 되니까 퐁퐁이라고 불러. 혹시 모르잖아. 기자들이 듣기라도 해서 정보가 누설되면.”

정형욱 PD가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일 처리 확실하신 울 부장님이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울 퐁퐁이 님이시네요. 인형 탈을 쓴 동안에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할 수 없으세요. 그리고 보다시피 화장실도 이게 탈을 다 벗어야 하니까요. 되도록 촬영 중에는 안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수신기로 제가 다급한 상황이 생기거나 할 경우 말할 테니 잘 듣고 계세요.”

경완은 인형 탈 안에 있는 수신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거의 감옥 비슷한 거구나. 인형이 보기에나 좋지. 탈을 쓰면 좋은 게 하나도 없네. 좀 있으면 여름이 다가올 텐데 그땐 더위까지 덮쳐 올 테니 참.’

경완은 알파카 인형 탈을 쓰고 그네에 앉으려고 했다.

‘하아 인형이라 엉덩이가 너무 커서 그네에 끼는구나. 그네에도 못 앉으니 바닥에 앉아야겠다.’

경완이 놀이터 바닥에 앉자 정형욱 PD가 말했다.

“부장님. 거기 앉으시면 퐁퐁이 엉덩이가 까매져서 화면에 이쁘게 안 나와요.”

경완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은우를 기다렸다.

‘놀이공원에 가면 인형 탈 알바하는 분들 있다던데 정말 힘들겠다. 이 탈을 쓰니 쉬는 것도 마시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경완은 마음속으로 대사를 연습했다.

‘안녕. 은우야. 나는 퐁퐁이야. 나는 페루에서 왔어. 매일 네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다가 도와주고 싶어서 달려왔어.’

경완은 긴장을 달래며 자기암시를 했다.

‘잘할 수 있어. 잘할 수 있어. 나는 더 이상 스무 살의 내가 아니라고.’

경완은 어느덧 대학 1학년 새내기로 돌아가 있었다.

가장 먼저 온 예비역 인규 선배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야, 신입. 여기 와서 바닥 좀 닦아. 연습실이 이렇게 더러워서야 연습이 되겠어.”

“네, 선배님.”

경완은 대걸레를 들고 와서 바닥을 닦았다.

조금 있자 선배들과 신입생들이 우르르 연습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경완이가 연습실 청소한 거야? 경완이 좀 멋진데.”

졸업반인 혜정이 경완을 칭찬했다.

“경완아 수고 많았어.”

같은 1학년 동급생인 호연이도 경완을 칭찬해 주었다.

인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자, 연습해야지. 이제 공연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

경완은 뒤에 앉아 부원들을 바라만 보았다.

유일하게 배역을 맡지 못한 부원은 경완 하나뿐이었다.

‘무대 공포증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때 경완이 차고 있는 수신기에서 정형욱 PD의 음성이 들렸다.

“퐁퐁이 님, 은우 등장이요.”

놀이터로 달려오고 있는 은우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경완은 긴장된 마음으로 목을 다듬었다.

은우가 경완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

“어디서 와떠? 넌 누구야?”

“난 퐁퐁이야. 은우량 칭구갸 돼고 싶어서 왔어.”

은우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대답했다.

“퐁퐁이. 이상햐댜. 내 칭규 퐁퐁이랑 이르미 똑간네.”

“내갸 퐁퐁이라니꺄.”

“이상햐댜. 긍데 퐁퐁이는 내 방 침대 위에 인는데. 내갸 보고 와떠.”

경완은 순간 손에서 땀이 났다.

‘대본이랑 너무 반응이 다르잖아. 대본에는 ‘나는 페루에서 왔어. 매일 네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다가 도와주고 싶어서 달려왔어.’라고 하라고 돼 있는데. 은우 반응이 그게 아닌데 그럼 뭐라고 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할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경완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퐁퐁이도 나고 네 눈앞에 있는 퐁퐁이도 나야. 은우랑 말하고 시퍼서 찾아왔어.”

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퐁퐁이가 두 명이야?”

“작은 몸으로는 너랑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어서 큰 몸을 빌려서 찾아왔어. 은우랑 같이 놀려고.”

“그래? 나랑 갸치 놀려고? 신난댜.”

은우가 방긋 웃더니 경완의 다리를 안았다.

“녀량 놀고 시퍼떠. 퐁퐁아. 만나고 시퍼떠.”

경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먹힐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그래도 믿어주었네. 다행이다. 휴우. 처음부터 촬영 짤리는 줄 알았네.’

은우가 다시 경완에게 물었다.

“근데 퐁퐁아. 목또리갸 왜 그래? 꼭 아저씨 목소리 갸치 마리야. 퐁퐁이는 세 샤린데. 목소리가 아저씨 갸탸.”

경완은 당황했다.

‘아, 퐁퐁이가 세 살이었나. 그렇다고 목소리를 바꿀 수도 없고. 아니 이렇게 중요한 설정을 왜? 작가는 아무 말도 안 해 준 거야? 무슨 작가가 5살짜리 아기보다 허술하냐고 생각이. 이게 지금 대본이 의미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젯밤까지 얼마나 열심히 달달 외웠는데.’

경완은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대본은 어차피 쓸모없어진 것 같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겠다. 오늘 내가 말한 내용을 녹화본으로 빌려서 보고 외워야지. 이게 설정이 될 테니.’

경완이 대답했다.

“아, 그게 페루에서 왔더니 한국이 너무 추워서 그래서 감기에 걸려서 그래.”

은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야근 머겨떠? 퐁퐁아? 병언은 가 봐떠? 의샤 선땡님한테 가 뱌야지.”

“아, 괜찮아. 아까 약국에 가서 약을 먹었더니 약사 선생님이 곧 나을 거라고 했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경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은우가 믿어주었네. 그런데 너무 급조되는 대로 막 말하니 은우에게 미안한 것 같다. 은우는 진짜라고 생각하는지 저렇게 걱정을 해 주는데.’

은우가 말했다.

“아플 때는 따뜨탄 걸 머거야 하는데 하초코 마실래? 타다 주까?”

경완은 고민이 되었다.

‘감기에 걸렸을 땐 쌍화탕이지. 핫초코라고? 신기한 민간요법이네. 근데 핫초코를 마시려면 은우 집에 가야 할 거 같은데. 은우 집엔 소파가 있으니 앉을 수 있겠다. 간다고 할까?’

그때 수신기에서 정형욱 PD의 음성이 들렸다.

“퐁퐁이 님, 인형 탈 쓰시고 있는 동안은 어차피 아무것도 못 드세요. 괜찮다고 하고 넘어가세요.”

경완은 날아간 소파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괜찮아. 은우야. 핫초코는 다음에 마실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우리 같이 놀이터에서 놀자.”

“그래.”

은우는 신이 나서 그네 쪽으로 갔다.

은우가 그네에 앉으며 말했다.

“퐁퐁아, 이리 와서 앉아. 같이 그네 타자.”

경완이 은우의 뒤에 서며 말했다.

“엉덩이가 너무 커서 그네를 탈 수 없어. 대신 밀어줄게.”

은우가 그네에서 내리며 말했다.

“퐁퐁아. 모미 너무 커셔 불편하게따. 우리 다른 거 하고 놀쟈. 나 혼쟈 타면 네가 심심하자냐. 그리고 그네도 더 타고 시플 거고.”

경완은 은우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은우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눈물겹네. 이런 사랑을 받다니. 이게 얼마 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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