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퐁퐁이와 함께 (4)
엄태훈이 백인수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새로 온 청차예요. 첫 개시입니다. 좋은 분께 드리려고 저도 안 마시고 있었어요.”
“올 때마다 좋은 차를 주시니 영광입니다. 향이 참 좋네요.”
“홍차와 녹차의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맛을 잘 보시면 첫맛과 끝맛이 다르답니다.”
“그렇네요. 하하하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엄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시회 반응이 상당히 좋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큰 곳에서 전시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평론가들 반응도 좋지만, 관객들 평이 정말 좋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런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 걸요. 그때 그렇게 좋은 제안을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제 손자의 그림은 양복점 쇼윈도에만 걸려 있었겠죠.”
“제가 아니라도 카를로스의 그림은 누군가가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좋은 건 시간이 걸려도 사람들의 눈에 띄게 돼 있으니 말이죠. 다음번엔 우리 카를로스의 그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네요. 카를로스의 작품 활동은 잘 되고 있나요?”
백인수는 생각했다.
‘은우가 요즘 음반준비에 바쁜 것 같던데. 요샌 랩에 빠져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긴 한데 속도가 나질 않아서.’
백인수가 대답했다.
“요즘은 랩에 빠져 있어서요.”
“랩이요?”
엄태훈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카를로스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우리 때 화가들은 미술에 대한 재능 한 가지만을 타고나기도 힘들었는데. 카를로스는 음악에 대한 재능도 함께 타고난 걸까? 대체 카를로스는 어떤 아이지? 카를로스를 만나고 싶다.’
백인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기들은 스펀지 같거든요. 어른이 생각할 땐 랩과 그림이 너무 달라 보이는데 쉽게 금방금방 배우더라구요. 저도 랩은 손자 때문에 처음 들었는데 처음엔 저런 것도 노래인가 싶었어요. 우리 때 듣던 노래랑은 너무나 달라서, 왜 우리 땐 누가 뭐래도 이미복이나 심수희가 최고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저도 노래는 트로트가 좋아요. 판소리나 클래식도 좋아하긴 하지만, 가요 중에서는 트로트죠. 랩은 정말 낯설군요.”
“요새 손자가 랩을 해서 듣고 있는데 자꾸 듣다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저에게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 한다고 손을 내저었을 겁니다.”
“하하하. 저도 마찬가지죠. 전 사실 랩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햄버거보단 된장찌개죠? 안 그런가요?”
“그럼요.”
“그나저나 아쉬운데요. 다음 전시회 일정을 빨리 잡고 싶었는데 말이죠. 다음엔 입구가 아니라 작은 갤러리 같은 곳을 빌려서 전시회를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갤러리요?”
백인수의 마음이 설레였다.
‘갤러리라니. 화가가 되어 갤러리에 전시를 하는 것이 내 꿈이었는데. 은우가 먼저 내 꿈을 이루는구나.’
엄태훈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직장인들도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많이 하곤 해요. 무료 전시회도 많거든요. 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은 다음에 전시회를 하는 것이 좋죠. 그래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슈도 될 테니까요. 여러 화가들과 작품을 모아 단체전을 할 수도 있고 비슷한 주제로 특별전도 많이 해요. 제가 적당한 자리가 보일 때 다시 추천을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매번 도움을 주셔서. 저희 손자에게 꼭 감사 인사를 드리라고 전할게요.”
***
제작총괄본부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최경완이 물었다.
“이정우 씨, 신주리 씨, 김승태 씨. 이번에 은우네 방문해서 아이디어 짜 오기로 한 것 있었죠?”
먼저 이정우가 대답했다.
“네, 은우가 장난치는 걸 매우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서 은우의 장난기를 꼭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은우의 다양한 친구들이 나와서 함께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부르는 포맷도 생각해 봤어요.”
신주리가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은우가 좋아하는 인형인데 퐁퐁이라고, 매니저분 말로는 은우의 상상 속의 친구래요. 우리가 이걸 캐릭터화하면 어떨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최경완이 물었다.
“상상 속의 친구라면 실재하지 않는 그런 친구라는 건가?”
“실재하죠. 은우의 마음속에서요. 아마 은우는 그 친구와 대화하면서 늘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우리가 퐁퐁이를 실제 캐릭터로 만드는 거예요. 인형 탈 같은 걸 쓰고 말이죠.”
김승태가 맞장구를 쳤다.
“저도 어릴 때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속상한 일을 매일매일 말하는 친구요.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한테 못하는 얘기도 그 친구에겐 할 수 있었어요. 제 친구 이름은 핑핑이었는데. 요요였거든요.”
이정우가 동의했다.
“전 사슴벌레 키웠는데 그 사슴벌레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곤 했어요. 요를레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요를레이가 집을 나가서 얼마나 울었던지. 집을 나간 뒤로 안 돌아왔거든요.”
경완이 말했다.
“다들 다양한 친구가 있었네. 근데 인형 탈 말이야. 요즘 사람들이 그런 인형 탈을 좋아할까? 유치한 거 같기도 하고. 그거 애들 프로에서나 하는 그런 거 아냐?”
이정우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요. 부장님. 은우가 친구한테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귀여울 거 같아요.”
김승태도 동의했다.
“그쳐? 그 베이비가 돌아왔다에서 한 화 정도 비슷한 설정을 본 거 같은데 아빠가 산타로 분장해서 나오는 거요. 그 화 시청률이 꽤 괜찮았거든요. 그리고 아기들마다 산타를 본 반응이 달라서.
신기한 건 아기들은 아빠가 산타인 줄 거의 모르더라구요.”
신주리가 말했다.
“맞아요. 그 화 저도 봤는데 화제성도 좋고 시청률도 좋았어요.”
경완이 말했다.
“그럼 파일럿으로 단기로라도 한번 잡아보긴 하자고 구성을. 그럼 퐁퐁이 역은 누구를 섭외하지? 물망에 오른 인물이 있어? 아님 지금부터 찾아봐야 하나?”
신주리가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건 제 아이디어인데요. 의외의 사람이 퐁퐁이가 되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전문적인 배우나 이런 사람들은 너무 연기 같아서 식상할 거 같고. 일반인이 하면 어떨까 하고요. 순수한 느낌도 살고. 더 재밌을 거 같아요.”
김승태가 맞장구쳤다.
“좋네요. 사실 전문적인 연기자분들도 나쁘진 않지만, 너무 틀에 박힌 거 같은 느낌도 있고. 또 나중에 인형 속에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 그분의 평소 이미지가 덧붙여져서 안 좋을 거 같아요. 아예 어떤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좋을 거 같아요.”
경완이 물었다.
“어떤 일반인을 섭외하고자 하는데? 대학생? 직장인?”
신주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장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랄까 시청자가 생각할 때 완벽한 어른이나 완벽한 직장인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퐁퐁이가 되면, 그러면 더 신선하지 않을까 해서요. 상황에서 오는 재미나 애드리브도 더 살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장님 같은 분요.”
김승태가 동의했다.
“맞아요. 그럼 확실히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은우의 순수함에 동화되어 가는 그런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살아날 거 같기도 하고요.”
이정우도 동의했다.
“맞아요. 부장님이 딱이에요. 딱. 부장님은 완벽한 어른이시고 완벽한 상사이시니까요.”
경완은 생각했다.
‘이게 지금 나를 칭찬하는 건가? 물 먹이려고 하는 건가?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다른 부원들도 동의했다.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생각만 해도 재밌겠다. 50대의 부장님이 퐁퐁이가 되신다니 얼마나 참신해요.”
“저도 부장님 강력추천합니다.”
“탈 안에 들어가면 아무도 부장님인지 모를 거예요.”
“부장님 퐁퐁이 역 하시면 은우 촬영 때마다 보실 수 있어요. 부럽습니다.”
“부장님이 시청률을 견인하실 겁니다. 꼭 출연해 주세요.”
“부장님이 우리 회사를 끌고 나가시는 것처럼 우리 프로도 끌고 나가 주세요.”
경완은 난감했다.
‘다들 나보고 하라고 하니 이것 참. 그래도 그렇지 인형 탈이라는 게 말이 돼.’
경완이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전문적인 배우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연기도 자신이 없고 말이야.”
그때 김승태가 말했다.
“부장님 늘 말씀하셨잖아요.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 하셨다고. 햄릿 대사 매번 인용하셨잖아요. ‘올라가느냐, 떨어지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는 매일 같이 혼을 갈아 넣어 올려야만 한다. 시청률을.’ 잊으셨어요?”
부원들은 김승태의 실감 나는 부장 성대모사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경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긴 했지만.”
부원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부장님이 딱이에요.”
“우리 회사의 최고의 브레인 부장님이 하셔야죠.”
“부장님 연기하시는 거 보고 싶습니다. 대학로 배우들은 다 울고 갈 정도의 연기셨다면서요.”
“맞아요. 부장님. 부장님. 재능을 이렇게 썩히기는 아깝잖아요.”
경완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
은우는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어떤 재밌는 것을 하고 놀까?’
차 안에 울려 퍼지는 동요를 들으며 은우는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 왔다.”
창현이 은우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수녀님 말씀 잘 들어. 은우야.”
“네, 아뺘.”
은우가 아빠의 볼에 입을 맞춘 뒤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
은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떼요. 슈녀님. 안녕. 얘듀라.”
은우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이상하다. 다들 내가 오면 반갑게 맞아줬는데.’
평소엔 은우가 어린이집 문을 열기도 전에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인사를 하거나 수녀님이 먼저 문을 열어주곤 했었다.
‘오늘 어린이집에 무슨 일이 있나?’
은우는 천천히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들은 거실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있었다.
은우도 조심스럽게 친구들에게로 다가갔다.
“기여워.”
“우유 멍는 거 쫌 뱌. 배 고판나 보댜.”
“먀니 머꼬 쭉쭉 커랴. 거양아.”
수녀님의 손에는 젖병이 들려져 있었다. 그 젖병을 빠는 생후 3개월 된 작은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옆에는 아기 고양이의 형제인 것으로 보이는 다른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었다.
‘한 마리는 치즈처럼 털이 노랗다. 털이 짧고 배랑 입 주변은 하얀색이야. 다른 한 마리는 무늬가 꼭 고등어 같잖아. 털이 짧은 거랑 눈, 코, 입은 서로 닮았어. 형제인가?’
은우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어디서 와떠? 거양이.”
연아가 대답했다.
“엄먀가 주거때. 불썅하지.”
지호가 말했다.
“내갸 어린이지베 오다가 주어와떠. 자동차 여페서 울고 이떠더. 갸치 가쟈고 핸는데 안 와서 수녀니미량 가치 가서 데려와떠.”
혜린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기를 거야.”
준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갸 거양이 엄먀 아뺘야.”
시우가 대답했다.
“이름도 지어떠. 노랸 애는 노량이. 까만 애는 까먕이.”
“노량이, 까먕이. 이름 조타.”
“그치? 뱝 먀니 먹고 튼튼해질 거야. 나처럼.”
시우가 팔에 힘주며 알통 자랑을 했다.
혜린이가 말했다.
“거양이 유리 보뮤리야. 노량이 까먕이 공듀 해야대.”
혜린이가 달려가더니 장난감 통에서 왕관을 가져다 고양이 앞에 두었다.
“이제 크면 왕관 쓰고 드레스 입쟈.”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혜린이 누나랑 공주 놀이를 해야 하다니 고양이도 힘들겠다. 혜린이 누나는 착한데 공주 놀이가 문제야.’
연아는 달려가더니 가방 안에서 젤리를 가져왔다.
“이거 머겨. 노량아 까먕아. 이겨 마디는 거야. 내갸 젤루 조아하는 거.”
지호도 달려가더니 장난감을 들고 왔다.
“이거 빌려주께. 노량아 까먕아. 새로 나온 쟝난갸미야. 내갸 진쨔 아끼는 거야.”
은우가 가방에서 마카롱을 꺼내서 왔다.
“이거 머겨. 진쨔 마딛는 마캬롱이야. 내갸 매일 매일 가져댜 주께.”
김마리아 수녀님은 아기들을 보며 생각했다.
‘너희들도 아직 아기인데 더 어린 아기를 이렇게 예뻐하니 너무 사랑스럽다. 고양이는 아마 너희가 준 선물에 관심이 없겠지만, 그래도 고양이를 위하는 너희의 마음을 보니 앞으로 이 고양이들은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
아직 어려서 두 시간에 한 번씩 우유를 주는 일이 버겁긴 하지만 잘 키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