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퐁퐁이와 함께 (3)
신주리가 은우네 집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신주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이 저절로 열렸네.”
김승태도 맞장구쳤다.
“그러게.”
보리가 문의 근처에서 꼬리 치고 있었다.
이정우가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강아지가 꼬리 치는 걸 보면 이 근처에 누가 있단 말이지.”
이정우는 보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그곳은 문 뒤였다.
‘저기에 은우가 서 있군.’
이정우가 김승태와 신주리에게 눈짓으로 문 뒤를 가리켰다.
김승태와 신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문을 지나가려고 하자 은우가 문 뒤에서 뛰어나왔다.
“왕.”
세 사람은 과도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정우는 뒤로 넘어지는 시늉까지 했다.
은우는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놀랴쬬?”
길동이 뒤늦게 거실에서 세 사람을 맞이하러 나왔다.
“은우야, 너 손님한테 장난을 치면 어떻게 해?”
이정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귀여운데요. 뭘. 오늘 저희가 온 이유가 은우를 더 잘 알기 위해서니까. 은우의 장난기도 잘 알아서 가야죠.”
“요즘 장난기가 유독 심해져서 큰일이에요. 종종 주의를 주곤 하는데 말이죠.”
“저도 어릴 땐 진짜 장난꾸러기였어요. 새총 날리다가 할머니 고추장독 깨뜨려서 혼나고, 지붕 위에서 뛰어다니다가 지붕에서 비 새고. 거의 매일 사고 친 기억뿐이에요.”
신주리는 이정우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부의 신, 이정우. 오늘 새로운 모습 많이 보네.’
길동이 말을 이었다.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들어오세요.”
길동은 은우의 방으로 안내했다.
“커피 드릴까요? 주스도 있는데.”
은우가 길동에게 말했다.
“횬야, 냐는 하쵸코.”
신주리가 말했다.
“저는 그럼 주스로요.”
김승태가 말했다.
“저는 커피요.”
이정우가 말을 이었다.
“저도 커피로요.”
길동이 부엌으로 음료를 가지러 간 사이, 은우가 방 중앙의 어린이용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안쟈서 해요.”
신주리는 처음 보는 유아용 테이블에 웃음이 터졌다.
‘공룡 변신 로봇 테이블이라니. 그 광고에 나온 장난감 정말 좋아하나 보네. 벽지도 침대보도 이불도 베개도 가방도 다 공룡 변신 로봇이네.’
신주리는 천천히 은우의 방을 살펴보았다.
천장에는 은우가 좋아하는 야광별이 붙어있었고 은우의 침대 옆에 나란히 보리의 침대가 있었다. 어린이용 책상에는 은우가 좋아하는 동화책과 미술도구가 나란히 정리돼 있었다.
‘책장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네. 일본, 중국 신화도 있고. 은우는 신화를 좋아하나 보다. 그리고 웬 아령이 있네. 은우는 운동하는 걸 좋아하나?’
신주리는 천천히 은우의 방을 보며 어떤 것을 촬영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은우는 세 사람을 보며 새로운 장난을 궁리 중이었다.
‘다음엔 또 무슨 장난을 쳐 볼까?’
보리는 은우의 곁에 몸을 말고 누웠다.
길동이 음료를 가지고 들어왔다.
“거마어요. 횬아.”
은우가 핫초코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마셨다.
신주리가 은우를 보고 웃었다.
“은우, 초코 수염 생겼다.”
“헤헤헤헤.”
은우가 웃으면서 혀를 낼름거려서 인중에 묻은 핫초코를 먹었다.
“이거 뱌요. 눈냐. 냐 이거 할 뚜 이떠요.”
은우가 혓바닥을 내밀어 콧구멍에 닿는 개인기를 했다.
신주리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와, 은우 혓바닥 완전 길다.”
“그쳐. 눈냐.”
은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정우가 갑자기 승부욕에 불타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런 거 할 수 있다. 은우야.”
이정우는 갑자기 눈을 가운데로 모아 사팔로 만들었다.
은우가 이정우를 보고 놀란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야.”
은우는 생각했다.
‘와 재밌는 형아네. 저런 건 어떻게 하지?’
이정우는 다음 개인기로 넘어갔다.
“이런 것도 있지.”
이정우가 왼쪽 팔을 등 뒤로 넘기더니 오른쪽 어깨 위로 왼손을 내밀었다.
“흐익.”
김승태가 이정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신주리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우 씨 연체동물이에요? 세상에, 이런 거 어떻게 해요?”
은우는 존경의 눈으로 이정우를 바라보았다.
“와, 횬아 완전 머쪄요. 냐도 저런 거 햐고 십따.”
신주리가 은우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면서 말했다.
“은우야, 저런 건 아무나 못 하는 거야. 저런 거 따라 하다 병원 가. 저 아저씨가 이상한 관절을 타고났나 봐.”
은우가 이정우에게 말했다.
“횬아. 다으메 만날 때 또 시햡패요. 열시미 연습해야지.”
길동은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은우 또 발동걸렸네. 이상한 거에 승부욕 작동하는 거. 애기들은 다 저런가. 저게 뭐가 멋있다고.’
신주리는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은우는 장난꾸러기구나.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장난을 보는 것도 좋아하나 보다.’
김승태는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티 없이 밝고 맑은 평범한 다섯 살 아기 같아. 은우를 만나기 전엔 은우가 슈퍼스타라서 다를 것 같았는데 그냥 장난을 좋아하는 옆집 아기 같잖아. 너무 귀엽다. 은우야. 널 만나기 전보다 만나고 나서 네가 더 좋아졌어.’
신주리가 말했다.
“정우 씨 이제 개인기 그만하고 일해야죠. 일. 우리 여기서 은우에 대해 알아보면서 프로그램 포맷 잡으려고 온 거잖아요. 이러다 계속 개인기만 하겠어요. 은우는 정우 씨 개인기에 빠져서 정우 씨가 멈추기 전엔 계속 정우 씨만 볼 것 같은데요.”
이정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은우가 코에 혓바닥 닿는 걸 보니 제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서. 제가 초등학교 때 저런 거에 집착하면서 거울 보며 연구하고 그랬거든요. 어서 일합시다. 일.”
김승태가 웃으며 말했다.
“전 정우 씨 새로운 모습 봐서 좋긴 한데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가서 부장님께 까일지도 모르니 괜찮은 결과물을 들고 가야죠.”
신주리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는 뭘 좋아하니?”
은우는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너무 많은데 대체 뭘 물어보는 거지? 좋아하는 과자,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난감, 좋아하는 노래. 너무 많은데.’
김승태가 말을 이었다.
“은우가 공룡 변신 로봇 좋아하고 이런 건 이미 많이 알려져서 알려지지 않은 걸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정우도 동의했다.
“일단 은우가 장난 좋아하는 걸 프로그램에 꼭 살리면 좋겠어요. 이게 실제 다섯 살 평범한 은우의 모습이니까요. 또 어떤 게 있을까? 은우 친구 이런 것도 음악 방송에 나갈 수 있나?”
신주리가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은우는 아기 슈퍼스타니까. 시청자들이 은우의 순수함, 귀여움을 보고 힐링 받는 것처럼 은우 친구들을 보고서도 비슷하게 힐링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김승태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은우 친구에 대해서 물어봐요.”
은우가 대답했다.
“저는 어린이집 칭규들이랑 친해요. 혜린이 눈나, 연아, 준수, 시우, 지호랑요. 혜린이 눈나는 공주 노리를 너뮤 조아해서 가끄믄 힘드려요. 준수랑 시우는 장냐늘 조아해서 재미떠요.
어린이지베는 김마리야 수녀니미 인는데 수녀니믄 차캐요.”
이정우가 말했다.
“어린이집 친구들과 함께 하는 동요메들리 이런 거 해야 하나?”
김승태가 말했다.
“아기 음악단 이런 거 귀여울 거 같은데 어때요?”
이정우와 신주리가 김승태의 말에 맞장구쳤다.
“오, 그거 좋은데.”
“너무 귀여워요.”
신주리가 신이 나서 은우의 대답을 재촉했다.
“다른 친구들은?”
“음. 늘푸른 태건도 칭규드리요. 가치 태건도 배우는데 재미떠요. 거기 칭구드른 다 냠자드리라 로봇 얘기하고 노라요. 로봇 싸움도 하고요. 피슝.”
김승태는 은우의 피슝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입으로 소리 내며 몇 시간 동안 로봇을 가지고 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로봇 하나만 있으면 너무 재밌었었지.’
김승태가 말했다.
“로봇 음악단도 재밌겠는데요. 왜 아기들이 로봇 분장 하나씩 하고 말이에요.”
이정우와 신주리가 김승태를 보며 맞장구쳤다.
“참신한데요.”
“와, 오늘 승태 씨 아이디어 폭발.”
김승태는 칭찬이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신주리가 다시 은우의 대답을 재촉했다.
“다른 친구는?”
“명셔기갸 인는데 명셔기는 래블 잘해요.”
“랩?”
“음반 낼 때 랩 때무네 어려원는데 명서기갸 마니 도와줘떠요.”
이정우가 말했다.
“아기 래퍼라니. 재밌겠는데요. 기브 미 더 머니 래퍼들과 아기 래퍼들의 대결은 어떨까요?”
김승태가 말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사실 요새 너무 많은 경연 프로가 있어서. 저는 경연 프로가 보기 좀 불편하더라구요. 뭐랄까 너무 경쟁을 강조하니까요. 거기 나오는 가수들 다 노래 잘해서 듣기 좋고 한데. 너무 스트레스 주는 것 같아서.”
신주리도 동의했다.
“맞아요. 회사에서도 늘 실적에 시달리는데 힐링하려고 보는 프로에서까지 경쟁을 보길 원하진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만약 아기들이 져서 울거나 하면 시청자 게시판에 온통 나쁜 댓글로 도배될 거예요.”
이정우가 대답했다.
“그렇긴 하네요. 그 생각까진 못했어요.”
신주리가 말했다.
“랩이 좋은 아이디어긴 하니까요. 일단 아기 래퍼는 혹시 모르니 아이디어 킵해 둬요. 다른 포맷이 생각날 수도 있잖아요.”
“좋아요.”
이정우와 김승태가 동의했다.
김승태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다른 친구도 있어?”
“퐁퐁이요. 퐁퐁이는 여기 이떠요.”
은우가 침대 쪽으로 가더니 알파카 인형 하나를 들고 왔다.
길동이 웃으며 말했다.
“퐁퐁이는 은우 팬이 선물해 준 인형인데 은우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에요. 은우의 최애 인형이라 은우가 늘 안고 자요.”
은우가 말했다.
“퐁퐁이는 알파카예요. 냐이는 세 샬이에요. 퐁퐁이는 반대로 말햐는 걸 조아해요. 퐁퐁이의 꾸믄 먹고 놀기예요. 그리고 퐁퐁이는 귀가 잘 안 들려서 크게 말해져야 해요. 고향은 페루고요.”
길동이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어느 날부터 이름을 붙이더니 저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더라구요. 상상 속의 친구 같기도 하고요. 왜 어릴 땐 누구나 있잖아요. 상상 속의 친구 말이에요. 인형이거나 로봇이거나 그런 친구.”
신주리는 길동이의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어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상 속의 친구를 불러내는 거야. 은우와 함께 티비에 나온다면 재밌지 않을까?’
신주리는 은우에게 퐁퐁이에 대해 더 묻기 시작했다.
“은우야, 퐁퐁이는 어떤 걸 좋아해?”
“퐁퐁이는 놀러가능 걸 조아해요. 방방 타는 거또 조아하고. 선생님 마른 잘 안 듣꼬요. 어린이집도 안 가고 시퍼해요. 그리고 가끔 페루에 가고 십다고 우러요.”
***
백인수는 신문에서 한 시인이 쓴 은우의 전시회에 대한 수필을 보게 되었다.
-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학익 미술관에 갔다. 학익 미술관은 나에게 젊음의 장소로 기억된다. 내가 학익 미술관을 가장 많이 들렀던 때가 대학생 시절, 그리고 내 남편과의 연애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십 대의 나는 예술에 대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앙리 마티스는 원래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을 하며 법관이 될 공부를 하는 청년이었다.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어머니가 선물해준 미술도구로 미술을 시작하게 된 그는 뛰어난 색채감각으로 야수파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나에게 진짜 감동을 준 것은 그의 말년의 삶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팔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무 막대 끝에 크레용을 묶어 그림을 그린 그의 열정은 모든 예술가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내 나이는 마흔. 거울 속에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기 시작한 내가 서 있다. 처음 등단할 때의 그 설렘은 사라지고 예술보다는 아들의 학원비가 더 신경 쓰이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예술혼을 깨우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내 발길을 붙잡은 한 장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얼굴 없는 화가 카를로스의 그림이었다. 스케치북에 크레용으로 그려진 한 장의 그림 앞에 나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림 속에는 고층 빌딩의 유리창에 비친 한 송이의 해바라기가 수줍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고층 빌딩의 맞은편에 어떻게 해바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내 머릿속은 과학적인 잣대로 그 그림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림의 기법 역시 세련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투박한 선. 몇몇 선은 채색 선을 넘어서 튀어나와 있었다.
‘아기가 그린 그림인가? 그림 솜씨가 너무 형편없잖아.’
그런데 그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니 그 삐뚤어진 선들이 그림의 주제를 더 잘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층 빌딩 속에 갇혀 하루를 보내는 현대인. 해가 어떻게 지는지 뜨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주어진 업무를 하며 한 송이의 해바라기를 바라볼 여유도 없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화가는 우리에게 유리창에 비친 한 송이의 해바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볼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얼굴 없는 화가 카를로스가 그렸다는 이 ‘변명’이라는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준다.
백인수는 신문을 덮고 옷과 모자를 챙겨 학익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전시회도 보고 관장님과 차도 한잔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