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퐁퐁이와 함께 (1)
안현태는 반복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들으니까 더 좋아. 마치 눈부신 아침의 햇살이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야. 내가 식물이 돼서 광합성을 하는 그런 기분. 내 몸 안에 해가 차오르는 그런 기분.
첫 번째로 들을 때는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면 두 번째로 들었을 때는 새로운 의지가 생기는 그런 기분.’
안현태는 노래의 리듬을 따라 박자를 맞추며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모의고사 망쳤다고 아까까지 죽을상이더니 기분 풀렸어?”
단짝인 태윤이가 어깨를 치며 물었다.
안현태는 노래 가사를 따라 하고 있었다.
“거울 쏙에 내갸 몬생겨 보여 슬픈 날
그럴 땐 이 음아글 트러요.”
태윤이가 현태의 무선 이어폰 한 짝을 뺏어서 자신의 귀에 끼며 말했다.
“좋은 노래면 같이 듣자고. 치사하게 너 혼자 듣냐?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모의고사 망쳤다고.”
현태와 태윤이는 나란히 무선 이어폰을 한 짝씩 끼고 함께 노래를 들었다.
태윤이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발음을 들으면 아기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맑고 예쁘다.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내 기분을 바꿔 놓았어.
아까까진 기분이 우울했는데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네. 마법 같은 곡이다. 가사도 매우 쉽고. 랩도 매력적인데.’
태윤이와 현태는 함께 노래 가사를 따라 불렀다.
“너는 세상이 내게 쥰 션물.
냐는 너를 위해 밤하늘에 불을 켜요.
(반쨕반쨕 벼를 달믄 너의 눈똥쟈)
냐는 너와 함께 밤하느를 냐라
저 달로 우쥬로”
집에 가려던 우주가 태윤이와 현태의 노래에 멈춰 섰다.
“뭐야? 니네 채점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모의고사 등급 올랐나 보다.”
현태가 대답했다.
“이리 와서 노래나 들어.”
현태가 블루투스 기능을 끄고 스마트폰의 음량을 키웠다.
교실에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노래에 먀으믈 시러. 눈나갸 보낸 편지 한 통. 내 마으믈 울려. 냐는 고 샤미 먼지 모르지먄 눈나의 아프믈 느껴.
눈나의 지친 어깨를 감싸쥬고 시펴. 노래는 소니 되고 핫팩이 돼 눈나에게 다아. 눈나 더 이샹 울지 마요. 내갸 여기 이떠요. 냐는 언제나 눈나의 마으미 궁그매요. 냐는 언제냐 눈나의 편지를 기댜려요. 우리 재롱이들 샤량해. 재롱이드를 위해 더 머찐 내가 돼.”
교실에 남아있던 학생들의 귀에 은우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
강라온은 경완과 마주 보고 앉았다.
‘대체 태현이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외주 업체 부장이랑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 대놓고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갈매기살을 굽던 태현이 다 익은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대접하는 날입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요. 대접은 저희가 해야죠. 한 잔 받으십시오. 강 대표님.”
경완이 술잔을 강라온에게 내밀었다.
“소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주로 준비할 걸 그랬나요?”
“아, 소주 좋아해요. 보통 스케줄 때문에 못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내일 오전 중엔 아무것도 없네요.”
태현이 경완의 취향도 물었다.
“부장님은 어떠세요? 소주 괜찮으신가요? 여기 복분자주나 막걸리도 있던데.”
“전 종류 안 가립니다. 그보다 호칭을 편하게 하면 어떨까요? 전 재수생 아들 하나, 고3짜리 딸이 있어요. 이름은 최경완이고요.”
“실례지만 몇 년생이세요?”
“1971년생이요.”
“아, 형님이시네요. 경완 형님. 근데 애들 교육비 만만치 않겠어요?”
“그렇죠. 근데도 못 해줘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특히 딸아이. 제 오빠보다 똑똑해서 과학고에 다니거든요.”
“와 한국과학고요?”
“네.”
“거긴 다 천재들만 모이던데. 예전 직장이 한국교육방송 CBS였거든요. 한국과학고로 촬영간 적이 있었어요. 같은 사람인가 싶었어요.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로봇 경연대회 나가서도 금상 받았어요. 꿈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로봇 수술 기기를 만드는 거라나.”
“캬아, 멋지네요.”
“딸애 꿈을 위해서도 아빠가 끝까지 버텨야 할 텐데…….”
경완은 뒷말을 더 하려다가 멈췄다.
정리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지금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태현은 경완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게 쉽지 않지. 행복만큼이나 책임도 늘어날 테니까.’
동질감을 느꼈는지 태현도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의 딸 사진을 보여주었다.
“제 딸이에요. 올해 일곱 살. 어린이집에 다니는데 캣걸스 춤을 곧잘 따라 해요. 나중에 커서 가수가 될 거래요. 가수 안 시키고 싶은데 말이죠. 나중에 대표님 따라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
강라온이 태현의 사진을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널 안 닮아 외모는 될 것 같은데, 춤이나 노래는 알 수 없잖아. 알지? 난 아는 사람이라고 절대 맘에 없는 말 못 하는 거.”
“알죠. 대표님 성격. 저도 제니가 가수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잘 알아서인지 시키고 싶지 않네요.”
불판 위에서 갈매기살이 지글지글 익어갔다.
태현이 익은 고기를 가위로 잘랐다.
“경완 형님. 은우 촬영, 네이버에선 어떤 포맷으로 해달라던가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모델도 포맷도 본청이 아닌 저희가 정하거든요. 일단 은우 출연 여부 결정하는 게 중요해요. 저희 팀원들은 은우를 직접 만나보고 함께 포맷을 짜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고요.”
태현이 아까부터 줄곧 생각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대표님은 팬들에게 배우보다는 가수로서의 은우를 알리고 싶으시죠? 채널 N이 음악방송은 아니지만, 고정 채널로 편성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채널 N을 음악방송처럼 활용하면 어떨까요?”
강라온이 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버스킹이나 찾아가는 노래방 같은 걸 할 수도 있고요. 포맷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면 출연을 안 할 이유도 없죠. 대표님만 동의하신다면야. 물론 이건 제 의견이고 두 분 다 동의를 하셔야 은우의 출연이 결정되겠죠.”
경완은 터널 끝에서 빛을 본 것처럼 기뻤다.
“은우가 출연 확정만 해 준다면 포맷은 원하시는 대로 짜보겠습니다. 방금 말한 아이디어 참신하고 좋네요.”
강라온도 동의했다.
“그런 방송이라면 출연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매주 15분, 은우만을 찍은 영상이 업로드된다면. 대신 촬영 일주일 전까지 대본을 나에게 미리 보내줘요.”
“감사합니다.”
경완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모든 고민이 다 해결됐다.
태현이 건배를 청했다.
“채널 N 라이브의 흥행을 위하여.”
“위하여.”
경완의 눈앞에는 기뻐할 부원들의 얼굴과 가족들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술이 참 달다. 집에 들어갈 때 오랜만에 치킨이나 한 마리 사서 들어갈까?’
경완은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볼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태현은 그런 경완을 보며 연욱을 떠올렸다.
‘연욱아. 네가 힘들 때, 그때 내가 이렇게 움직였더라면 넌 아직 내 곁에 있었겠지. 근데 네가 날 떠나고 난 후에 내게도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어.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거.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루지 않는 거.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너로 인해 알게 됐거든.’
***
명석이 엄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사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완치인가요?”
“네,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에요. 지난번보다 더 좋아져서 모든 검사 수치가 정상 범주 안으로 들어왔어요. 이제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검진만 받으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석이 엄마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눈물이 났다.
‘처음 이 병원에 와서 명석이가 소아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에게만 이런 벌을 주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지. 명석이가 나으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원망했던 신에게도.’
명석이가 신이 나서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떤생님, 져 매일매일 노랴두 대요? 놀이공언도 갈 수 이떠요?”
“그럼. 명석이가 가고 싶은 곳 모두 다 갈 수 있어. 약도 안 먹어도 되고 말이야. 이제 유치원도 가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해야지.”
“고맘뜸니댜.”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저도 명석이가 나아서 너무 기쁘네요. 소아암이 완치율이 높은 질환이긴 해요. 저희 지도 교수님도 어릴 때 소아암을 앓으셨다고 하더라구요. 명석이도 튼튼해져서 멋진 사람이 되렴.”
“네에. 져도 의샤갸 되고 시퍼요.”
명석이는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엄마의 전화를 빌려 은우에게 전화했다.
“은우야. 나 이제 병언 안 와도 댄대. 다 나아때.”
“졍먀리랴. 이제 약도 안 머겨?”
“응, 이제 약도 엄떠.”
“와아, 추카해. 명서갸. 우리 키즈 카페 놀러 갈까?”
***
명석이 엄마가 은우와 명석이를 데리고 키즈 카페에 들어섰다.
명석이는 신이 나서 은우에게 말했다.
“진쨔 녈댜.”
“쥬스 하냐 골랴. 여기 오면 쥬스 쥰댜. 머 먀실래?”
명석이는 사과 맛 주스를 골랐다. 은우는 요구르트를 골랐다.
“쟈 어떤 뱡부터 갈꺄?”
첫 번째 방에는 부엌놀이 세트가 꾸며져 있었다.
은우가 명석이를 바라보자 명석이가 고개를 저었다.
“댜음.”
은우가 빠르게 명석이를 다음 방으로 인도했다.
두 번째 방에는 캠핑 세트가 꾸며져 있었다.
은우는 캠핑 세트를 보자마자 백수희가 떠올랐다.
‘지난번에 백수희 눈나랑 아빠랑 캠핑 갔을 때 재밌었는데 또 가자고 할까?’
은우는 여기서 놀고 싶었지만, 명석이는 별로인지 다음 방으로 향했다.
다음 방에는 드럼과 피아노가 있었다.
명석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겨 뱌떠. 티비에서. 요러케 요러케 하는 겨.”
명석이가 피아노를 쳤다.
“이상햐네.”
명석이는 티비에서 볼 때는 노래가 돼서 나왔는데 자신이 치는 소리는 소음인 것만 같았다.
은우가 피아노 옆에 서서 말했다.
“내갸 해볼게. 명셔갸. 넌 져기 드러믈 쳐.”
명석이가 드럼에 앉고 은우가 피아노에 앉았다.
은우는 피아노에 앉아 생각했다.
‘파리넬리이던 때의 기억으로 간단한 곡은 칠 수 있으니까. 쉬운 걸로 해 볼까.’
은우가 명석이에게 곡명을 말했다.
“명셔갸 겁쟁이 툐마툐.”
은우가 아기용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겹쨍이 토먀툐, 토먀툐.
나는야, 어듀미 무서어.
나는야, 주샤가 무서어.
나는야, 슈영이 무서어.
나는야, 고양이갸 무서어.”
명석이도 함께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드럼의 박자는 엉망이었지만 명석이는 신이 나서 마구 두들겼다.
‘키즈 카페도 오고 드럼도 쳐 보고 오늘 신난다. 병이 다 나으니 너무 신난다. 매일매일 재밌게 놀아야지.’
명석이의 엉망인 드럼 소리에 아기들은 더 신나 했다.
다른 방의 아기들도 노랫소리를 듣고 은우와 명석이가 있는 피아노 방으로 왔다.
“와, 노래 잘햔댜.”
“냐도 겁쟁이 토마툐 노래 잘햐는데.”
어느새 피아노 방에는 다섯 명의 아기가 몰려들었다.
그중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 아기가 은우를 알아보았다.
“져기, 져 아기. 은우 아냐?”
“아니야. 은우는 티비 소게 이떠.”
“아니야. 뱌부야 어떠케 샤랴미 티비 소게 사랴.”
“아니라니깐. 티비 끄면 사람도 사랴지쟈나.”
“아니라니깐. 댜댜패. 내갸 무러볼게.”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아기가 은우에게 와서 물었다.
“혹시 이은우야? 이버네 샹 받은”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은우가 아니라고 우기던 청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아기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진쨔 은우야. 세샹에. 엄먀. 나 은우 뱌떠.”
여자아기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는지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명석이는 여자 아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 칭규 1호가 머찌긴 하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 아기가 은우에게 말했다.
“냐는 하으니야. 냐, 겨울 냐랴 2 노래 조아하는데 불러줄 뚜 이떠?”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쌰우믈 해 본 져기 인냐요?
빈나던 칭구의 우슴을 기억하냐요?
뾰득뾰득 소리 나던 눈밥끼 노리.”
피아노 방에 서 있는 아기들이 모두 은우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따뜨타던 겨울냘.
행보캐던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