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세상을 바꾸는 한 걸음 (6)
태현은 은우의 스케줄을 정리 중이었다.
‘5월 18일 음반 발매.
18일 쇼 음악센터에 출연.
19일 유정열의 크레파스에 출연.
20일 라디오 달이 빛나는 밤에 출연.
음반 발매와 함께 음악프로 일정이 쫙 잡혀 있네.
잘돼야 할 텐데 우리 은우.’
그때 508호의 문의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누구지? 함부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남자는 방긋방긋 웃더니 명함과 함께 풍선껌 하나를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도마뱀 미디어의 총괄부장 최경완이라고 합니다.”
태현은 남자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의아했다.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풍선껌이라니. 대체 뭐지?’
경완이 말했다.
“연말 시상식 때 은우가 풍선껌 스티커 붙이고 나온 이후로 저도 풍선껌을 좋아하게 됐어요. 맛있더라구요.”
“저희 회산 은우 덕분에 풍선껌 회사에서 후원도 받았어요. 감사하다고 풍선껌을 잔뜩 보내 주시더라구요.”
“풍선껌 회사 사장님은 참 좋으셨을 거 같아요. 은우 음반준비는 잘 되고 있죠?”
“네, 이제 녹음하고 음반 발매까지 3주 남았어요.”
“채널 N에서 연예인 채널을 만들려고 기획 중인데 저희 회사에서 외주를 맡게 됐거든요. 저희 회사에서는 은우가 적임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원래는 전화나 메일로 컨택 요청을 드리지만, 이번 일이 저희 회사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라 이렇게 찾아뵙게 됐어요.”
태현은 난감했다.
‘채널 N 라이브의 단독 채널이라면 나쁜 제안은 아니지만, 대표님께서는 은우가 기존에 가졌던 배우라는 이미지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음악 프로가 아닌 다른 프로의 스케줄은 잡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경완이 말했다.
“매화 15분 분량으로 일주일에 한 편씩 업로드돼요. 아시다시피 초록창은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 중의 하나죠. 그렇지만 영상에선 후발주자라서 너투브나 지상파 채널과는 다른 차별화된 영상을 올리고 싶어 해요.
탑보이즈 등 다른 유명한 그룹들도 채널의 후보로 올랐었지만, 가장 적합한 건 은우라는 게 저희 회사의 판단입니다. 일단 출연 제의만 받아주시면 저희 회사의 이름을 걸고 꼭 시청률 상위권으로 만들겠습니다.”
“그게 사실 은우 스케줄은 저도 대표님께 허락을 받아야 되는 입장이라서요.”
경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원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저희 회사 실적이 매우 안 좋습니다. 지난 5년간 만들었던 작품 중 히트작이 없어요. 외주 업체라는 게 아마 아실 겁니다. 저희에게 의뢰하는 지상파 방송국이나 종편 방송국에서는 외주 업체를 고르죠. 단가를 후려쳐도 저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약자니까요.
이번 채널 N 의뢰까지 잘 안 되면 저는 바다에 빠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완은 사장이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최 팀장. 자네가 일 열심히 하는 거 내 알지. 그치만 방송이라는 게 열심히 한다고만 되는 게 아니지 않나? 적자가 지속되면 직접 촬영을 하지 않는 제작총괄본부는 곧 사라져야 할지도 모르네. 수익이 나지 않으면 몸집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게 회사니까.”
“사장님. 그럼 저희 팀원들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그 전에 일이 잘돼서 회사가 다시 전성기처럼 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경완의 눈앞에는 10명의 부원들이 어른거렸다.
미우니 고우니 하고 잔소리해도 함께 동고동락한 직원들이었다.
그 중엔 들어온 지 6개월 된 신입직원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몸이 아픈 아내가 떠올랐다.
‘이제 내 나이도 오십.
다시 직장을 구한다면 부장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을까.
평직원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날 뽑아주지 않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획은 꼭 성공시켜야만 해.’
경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태현은 얼마 전 자살한 자신의 친구인 매니저 연욱이 떠올랐다.
‘마지막 만났던 날 연욱이가 술에 취한 채 저 말을 했었어.
바다에 빠지고 싶다고.
그때 난 그게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며칠 뒤 신문 기사에서 연욱의 부고를 접했을 때 태현은 얼마나 그날의 자신을 후회했는지 몰랐다.
태현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경완이 아니라 연욱인 것만 같았다.
“저희 대표님과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
은우는 명석이를 기다리며 장난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명석이랑 같이 공룡변신 로봇 놀이해야지.’
벨이 울리자 은우는 신이 나서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누구떼요?”
“공룡 변신 로볻 블랙팬더 윌리엄 3세임니댜. 누구떼요.”
“비밀경찰 구급대언 박쥐맨 4세임니댜. 어서 오떼요.”
은우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나서 커튼 뒤에 숨었다.
벨소리를 듣고 온 창현이 은우를 보면서 말했다.
“은우야. 명석이 오는데 숨으면 어떻게 해?”
은우가 입술 앞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쉬잇. 아뺘. 비밀노리예요.”
명석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창현이 명석이를 맞이했다.
“어서 와. 명석아.”
“멍멍(어서 와. 명석아.)
보리가 창현의 옆에서 꼬리를 쳤다.
명석이가 들어오자 커튼 뒤에 숨어있던 은우가 소리쳤다.
“와아.”
명석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이고 깜땨기야. 놀래쨔나.”
“재미엄떠더?”
“다음 버넨 내갸 먼저 놀래킬 거야.”
“내 방으로 가쟈.”
은우와 명석이는 은우의 방으로 갔다.
은우의 놀이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트레이가 올려져 있었다.
“이거 뱌뱌. 명서갸. 이거 백수희 눈냐가 사준 건데. 너량 가치 화산 폭뱔 노리하라고 마리야.”
“화산 폭뱔 노리??”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자 안에서 풀과 플라스틱 산, 돌멩이를 꺼냈다.
“이걸로 갸치 화샤늘 꾸미쟈.”
명석이는 플라스틱 트레이 안에 풀과 돌멩이로 장식했다.
은우는 중앙에 달걀 상자를 뒤집어 놓았다.
은우가 선반에서 장난감 상자를 들고 왔다.
“명서갸. 여기서 맘에 드는 공룡 골랴서 꺼내.”
명석이는 신이 나서 장난감 공룡을 잔뜩 꺼내 트레이 안에 세워 두었다.
“애기 공룡이 배가 고퍄서 푸를 머겨요.”
명석이는 금방 공룡을 들고 상황극을 시작했다.
“엄먀 공룡이 애기 공룡을 기엽다고 쓰댜드머요.”
은우는 백수희를 생각하며 엄마 공룡을 집어 들었다.
명석이가 애기 공룡을 들고 말했다.
“푸를 먹고 냐니 간식기 머꼬 싶대요.”
“갼식?”
은우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마카롱을 가져왔다.
“쟈, 이거 머겨.”
명석이는 마카롱 봉지를 뜯어서 공룡에게 주었다.
“마디땨. 냠냠냠냠.”
공룡이 먹고 나서 명석이가 자기 입안에 마카롱을 넣었다.
“마디땨. 냠냠냠냠.”
은우도 자신의 마카롱을 공룡의 입 앞에 놓아주었다.
“냠냠냠냠. 냐는 배갸 부르니 은우갸 먹으렴.”
“니에 니에 니에.”
은우는 스스로 공룡 역할도 하면서 마카롱을 먹었다.
“아이고, 내 정시니야.”
은우가 부엌에서 식초와 베이킹소다를 들고 왔다.
“명서갸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은우가 달걀 상자를 들고 베이킹소다를 잔뜩 부었다.
명석이는 잘은 모르면서도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은우야. 이거 지냔버네 콜라처럼 대는 거 아냐?”
은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이게 보글보글 맞긴 한데 그러케 먁 튀는 게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대.”
은우는 명석이의 말에 지난번 콜라 사건이 떠올랐다.
사방에 콜라가 튀어 아빠가 화가 났던 때, 지금 생각해도 그땐 너무 놀라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었다.
은우가 물이 담긴 비커에 식초를 부었다.
그리고 스포이드로 식초물을 빨아들였다.
명석이가 두 눈을 가리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또 보글보글이쟈나.”
은우가 명석이의 두 눈을 풀어주면서 말했다.
“재민는 보글보글.”
은우가 스포이드 안에 들어있는 식초물을 계란 상자의 구멍 안으로 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 진짜 화산처럼 계산 상자의 구멍 안에서 물이 튀어 올랐다.
“우아. 재민는 보글보글.”
명석이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은우가 명석이에게 스포이드를 건넸다.
명석이도 신이 나서 스포이드에 식초물을 채워서 베이킹소다 위에 부었다.
은우가 공룡을 들고 외쳤다.
“화샨 폭뱌리랴. 모듀 피해.”
“피해.”
은우와 명석이는 공룡들을 대피시킨 다음 스포이드로 화산을 계속해서 터트렸다.
계란 상자로 된 화산 안에서는 계속해서 하얀색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보리는 집에서 코를 꼭 쥐고 있었다.
‘아이고 식초 냄새야. 온 집에 쉰내가 진동하네. 그런데도 명석이랑 은우는 재밌나 봐. 웃고 있는 것 좀 봐.’
명석이는 스포이드로 여기저기 뿜으면서 노래를 불렀댜.
“퐁댱퐁댱 화샨 퐁댱.”
은우가 명석이의 노래를 받았다.
“재민는 퐁댱노리
초콜레시 퐁댱
톡톡 샤턍이 퐁댱”
명석이가 다시 은우의 노래를 받았다.
“먀시는 퐁댱노리
토먀토가 퐁댱
피쟈도 퐁댱.”
은우가 다시 명석이의 노래를 받았다.
“신냐는 퐁댱노리
공룡 변신 로봇도 퐁댱.
폴리됴 퐁댱.
핑크 샤쟈도 퐁댱.”
은우가 공룡을 들고 왔다.
“유리는 공룡 변신 로봇. 화샨을 이기러 와따.”
명석이도 공룡을 들고 왔다.
“애기 동물드를 구하쟈.”
명석이와 은우는 다른 장난감 통에서 기린, 코끼리, 사슴 등의 인형들을 잔뜩 꺼냈다.
은우는 공룡 인형 역을 맡아 기린과 사슴을 구했다.
“어서 피해. 얘두랴. 여긴 위험해.”
명석이는 코끼리와 호랑이를 구했다.
“내 등에 올라타. 내가 빨리 달릴게.”
은우와 명석이의 활약으로 숲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
고3 수험생 안현태는 교실에 남아 모의고사 시험지를 채점 중이었다.
‘국어 3등급, 수학 3등급, 영어 3등급.
왜 다 3이야.’
안현태는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떠올렸다.
‘신라대 행정학과에 가려면 이 점수로는 안 되는데.’
안현태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현태야, 신라대 행정학과는 사탐 과목이 1등급, 수학과 언어가 2등급이어야 지원 가능해. 영어는 3등급도 가능하긴 하지만.
현재 네 점수로 갈 수 있는 행정학과는 지방에 있는 백제대 정도가 가능하겠구나.”
안현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달엔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왜 성적이 안 올랐지? 난 머리가 나쁜가 봐. 해도 안 되나. 그냥 백제대나 가야 하는 걸까. 노래나 한 곡 들어야겠다.’
안현태는 구글 클라우드에서 노래를 검색했다.
탑보이즈 등 아이돌 그룹이 무료로 음원을 배포하면서 요즘 들어 안현태는 음악을 검색할 때 수박 등의 사이트보다 구글 클라우드를 더 애용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너에게 되게 심심한 제목이네. 오늘 기분 엉망인데 한번 들어볼까?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의 곡이었으면 좋겠다. 오늘 같은 날 우울한 노래 들으면 공부 때려치우고 싶을 것 같아.’
재생 버튼을 누르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쉽지 안쬬? 내 먀미.
포기하고 십쬬? 가끄믄.
노려캐도 제자리.
더 노려캐야 할꺄?”
안현태는 노래 가사에 크게 공감했다.
‘이거 지금 딱 내 맘이잖아.’
노래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나는 내 노래에 먀으믈 시러. 눈나갸 보낸 편지 한 통. 내 마으믈 울려. 냐는 고 샤미 먼지 모르지먄 눈나의 아프믈 느껴.
눈나의 지친 어깨를 감싸쥬고 시펴. 노래는 소니 되고 핫팩이 돼 눈나에게 다아. 눈나 더 이샹 울지 마요. 내갸 여기 이떠요. 냐는 언제나 눈나의 마으미 궁그매요. 냐는 언제냐 눈나의 편지를 기댜려요. 우리 재롱이들 샤량해. 재롱이드를 위해 더 머찐 내가 돼.”
안현태는 은우의 랩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건 아기 목소린데. 아기가 하는 랩은 처음 들어.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리듬을 강하게 싣진 않았지만. 뭔가 따뜻한 느낌이야. 아기가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그런 느낌.’
노래는 계속 흘러나왔다.
“어제 오늘 내일 우린 더 많은 행복을 알고 그 큰 행복을 위해 오늘을 노력하며 살아. 지나고 나면 노력도 추억이 돼. 너는 오늘보다 내일 더 자라있고 오늘보다 내일 더 뿌듯할 거야. 우리 재롱이들 모두 함께 힘내.”
안현태는 슈퍼보이즈 성수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성수가 피처링했나 보네. 근데 대체 이거 누가 부른 거지?’
안현태는 파일명을 다시 잘 살펴보았다.
‘이은우. 아티스트 이름이 이은우라고 돼 있네. 이번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그 이은우? 내일도 사랑해도 그렇고. 연기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잘하는구나. 이 노래 너무 좋다. 또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