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108화 (108/257)

108화. 세상을 바꾸는 한 걸음 (5)

이혜주는 서둘러 관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저기가 김상태 도슨트님이 해설하시고 있는 곳일 거야.’

이혜주는 그곳으로 갔다.

김상태의 해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보시는 작품은 유명한 마티스의 푸른 누드라는 작품입니다. 말년의 마티스는 암에 걸려 큰 수술을 받게 되는데요. 이 수술 때문에 더 이상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이것을 극복해 내는데요. 바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새로운 기법으로 완성한 이 푸른 누드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한데요.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절망을 이겨낸 마티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가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곤 해요. 아마 보통의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했을 텐데. 마티스에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라는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의 마티스의 그림들은 전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보여질 정도로 처절한 기법과의 싸움이었는데요. 덕분에 마티스는 다양한 기법들을 시도하는 화가가 될 수 있었죠. 저는 마티스가 세계적으로 야수파란 명성을 얻게 한 초기의 그림들도 좋지만, 후기의 이런 그림들이 저에게 더 큰 뭉클함을 주더라구요.”

이혜주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를 멍하니 보았다.

이혜주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세 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카를로스의 ‘어떤 여자’라는 그림, 어릴 적 자신의 딸 승은이 그렸던 엄마라는 제목의 그림,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

‘원래 내 꿈은 화가였었지. 미대를 졸업하고 국전에도 입상했지만, 승은이, 민준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림과는 멀어졌어. 내 꿈은 당연히 아이들이 자란 뒤로 미뤄졌던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맞는 걸까? 죽음 앞에서 움직일 수 없는 팔에 막대를 묶어 그림을 그렸다는 마티스 같은 화가도 있는데.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라도 다시 그림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아.’

***

도마뱀 미디어의 제작총괄부장 최경완이 회의를 소집했다.

“미리 연락했던 대로 우리 회사에 새로운 외주 의뢰가 들어왔어요. 요즘 우리 회사 실적이 저조한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상대적으로 우리 경쟁업체인 스튜디오 몬스터는 히트작을 빵빵 내면서 잘 나가고 있죠. 이번 의뢰가 매우 중요한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기대합니다.”

경완의 말을 들으며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생각했다.

‘저놈의 스튜디오 몬스터. 지긋지긋하다. 귀에 딱지 앉을 거 같아.’

‘내가 스튜디오 몬스터로 이직하고 만다. 아휴. 지겨워.’

‘학교 다닐 때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제발 좀 1절만 하라고. 1절만.’

경완이 웃으며 말했다.

“자, 누구부터 말할까요?”

직원들은 하나같이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경완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회피했다.

경완은 방긋 웃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꼭 맞는 인물을 하나 찾아냈다.

‘김승태. 이번 달 직원 평가 성적이 가장 저조하지. 대체 회사를 무슨 생각으로 다니는지 모르겠어.’

경완은 김승태의 이름을 불렀다.

“김승태 씨가 발표해 보면 어떨까요?”

김승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제 하루종일 고민했는데 새로운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하필 내가 가장 먼저 말하게 되다니. 중간쯤이 좋은데.’

김승태가 작은 목소리로 제안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연예인 채널에 주인공으로는 요즘 대세 연예인인 탑보이즈가 어떨까 싶은데요. 이번에 빌보드 1위에 올라간 I got a rhythm(나는 리듬을 타고 있어.)를 조명하면서 탑 보이즈의 성공스토리 위주로 구성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주된 타겟층은요?”

“탑보이즈는 고정 팬층이 1차적인 타겟층이 될 것 같습니다.”

“탑보이즈가 현재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는 다른 프로그램은 없나요?”

“고정 프로그램은 없지만, 아무래도 요즘 대세다 보니 각종 예능에 단발성 출연이 많은 편입니다.”

“그럼 성공스토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여줄 건가요?”

“일기 형식으로 해서 보여주거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게 재미있을까요? 약간 다큐 형식 같은데. 시청률은 재미 아닙니까?”

“탑스타의 유명하지 않은 시절을 알아가는 그런 재미로 구상해 봤습니다. 부장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평소에 경완의 의견에 맞장구를 잘 치는 이정우가 말했다.

“제 생각에 탑보이즈는 현재 이미지 소모가 너무 심하고 사실 기획사에서 단독 너투브나 블로그 관리를 너무 잘하고 있어서 팬들이 굳이 채널 n을 보지 않더라고 탑보이즈를 만날 수 있는 매체가 많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연예인을 다루는 방식 역시 흥미 있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경완의 발표를 들으며 신주리는 생각했다.

‘저 재수. 암튼 저렇게 아부해서 도대체 얼마나 오래 회사생활 하나 보자. 자기 동기 까면서까지 그렇게 승진하면 좋냐?’

신주리는 짜증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경완과 신주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신주리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암튼 회사는 치사해. 줄 잘 서는 놈, 아부 잘하는 놈이 능력 있는 사람보다 우선이라니까. 근데 아무래도 다음은 나인 거 같네. 망했다.’

경완이 말했다.

“정우 씨의 의견 잘 들었어요. 다음은 신주리 씨.”

“저는 이번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이은우를 채널의 주인공으로 선정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은우는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힙한 아기입니다. 얼마 전에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소아암 환자를 돕고 이번에 미혼부의 아기를 대표해서 헌법 소원도 했고요. 그런 선한 영향력이 다른 스타들과 차별화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은우는 정말 귀엽습니다. 누구든 은우의 귀여운 모습을 한 번 보면 반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은우 군이 고정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없습니다. 소속사에서 관리하는 너투브 채널이 있긴 하지만, 요즘은 업데이트되는 영상이 많지 않아요.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소속사에서 전과 다르게 영상 올리는 걸 많이 자제하는 분위기인 거 같습니다.”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엄호준이 말했다.

“이은우 좋은데요. 요즘 아카데미 수상 때문에 가장 핫한데 소속사에서 음반 준비 때문인지 예능 출연을 잘 안 시키더라구요. 얼마 전 네고맨에 나온 게 다일 걸요. 은우 귀엽죠. 랜선이모, 삼촌이 얼마나 많다구요. 팬이 아닌 사람도 무장해제 하게 만드는 힘이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아기 스타가 거의 없는데, 은우가 성공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고태리가 말했다.

“선한 영향력은 스타가 지니기 힘든 건데 은우는 정말 선한 영향력의 대표 주자예요. 아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은우의 선한 영향력은 은우를 더욱더 특별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인물 선정에 있어서는 은우보다 나은 선정이 없을 것 같은데요.”

경완이 말했다.

“그럼 신주리 씨는 은우를 어떤 포맷으로 찍어보고 싶은가?”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 첫 번째는 은우의 숨겨진 매력을 파헤치는 1문 1답 코너를 찍는 거예요.

두 번째는 요즘 레트로가 유행인 데다가 은우가 풍선껌 스티커 등 레트로에 앞장섰던 적이 있으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해서 과거의 물건들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는 그런 것으로 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경완이 말했다.

“첫 번째는 그걸로 우리 프로그램을 모두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화당 15분 정도의 시간이긴 하지만 질문만으로 이어나가면 좀 지루할 수 있을 것 같고 두 번째 의견은 좋지만, 그걸로 10화 이상을 이끌고 갈 수 있을까 싶은데.”

“포맷과 관련해서는 다른 팀원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어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모델 선정보다 포맷이 훨씬 어렵더라구요.”

고태리가 말했다.

“아기들은 일상 자체가 귀여워서 일상을 보여주기만 해도 어느 정도 시청률이 나오죠. 시즌 4까지 돌입한 베이비가 돌아왔다가 그걸 보여주긴 하는데 잘못하면 동일한 포맷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엄호준이 말했다.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아기의 귀여움은 어른이 의도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오기 때문에 관찰 예능 포맷이 가장 잘 맞는 대상이죠. 어른이 대본을 만들거나 포맷을 줘 버리면 거기서 아이의 순수함이나 귀여움이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이정우가 말했다.

“여행 컨셉은 너무 식상하겠죠?”

고태리가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기가 혼자 단독으로 여행을 다니기가 어려워서. 누군가 다른 인물이 있으면 몰라도요.”

김승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우에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은우가 가장 잘 알 수도 있고. 제 생각엔 저희끼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단 은우를 만나서 은우에 대해서 좀 알아본 다음에 다시 포맷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고태리가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채널의 주인공이 은우가 된다는 게 확실하다면 은우를 만나보고 정하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아요. 근데 은우가 출연하고 싶어 할까요? 우선 출연 여부를 알아보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경완이 말했다.

“내가 꼭 출연시키도록 하지.”

***

은우와 이철은 연습실에 있었다.

은우는 신이 나서 앞으로 뒤로 뛰는 깡충깡충 댄스를 추었다.

‘미니 앨범에 들어갈 곡의 안무를 짠다니 신난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이철은 강라온 대표와 회의 때 했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안무의 초점은 은우의 귀여움이 잘 살아나야 할 것.

뒤에 있는 안무팀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해.’

이철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기존의 안무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가사를 잘 표현할지. 어떻게 하면 재밌게 동작을 표현할지. 어떻게 하면 유행할 수 있을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귀여움이라니.’

이철은 귀여움이라는 주제가 너무도 어렵게 느껴졌다.

‘43살 독신남에게 귀여움이라니. 터프함이나 섹시함이 더 쉽겠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일단 은우에게 노래를 먼저 틀어주고 어떤 식으로 춤을 추는지 봐서 그걸 안무로 만드는 게 좋겠어.’

이철이 음악을 틀면서 말했다.

“은우야, 노래를 틀 테니까 생각나는 대로 춤을 춰 봐. 알았지?”

연습실에 노래가 가득 찼다.

“거리를 냐셔면 날 보는 시션들.

누냐, 횬아, 할뷰지, 할모니

내갸 그러케 기여운가여.”

은우는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이철은 은우의 행동이 의아했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은우는 뒤돌아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철은 은우의 안무 센스에 놀랐다.

‘도입부에서 뒷모습으로 시작하다니. 이런 파격은. 걸그룹 댄스에서나 시도하는 건데. 일단 도입부에서 확실하게 팬들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겠어.

그런데 걸그룹 댄스와 다르게 너무 귀엽잖아. 저 작은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드는 모습이라니.’

“내갸 지나갈 때먀댜 냘 향한 시션들.

멀리셔도 냐를 쫓는 시션들.

내갸 그러케 기여운가여.”

은우는 ‘날 향한 시선들’이라는 가사에서 얼굴만 앞으로 반쯤 돌려 살짝 웃었다.

이철은 팬이라도 된 듯 자지러졌다.

‘너무 귀엽잖아. 얼굴을 드러내며 웃는 게.’

은우는 이제 앞으로 돌아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 너무 기여워. 난 너무 사랑스러어.

여러분도 너무 기여어. 여러분도 너무 사랑스러어.

우린 모두 소중해.”

은우는 어깨를 으쓱으쓱하는 춤을 추면서 큰 하트를 만들었다.

‘우린 모두 소중해’라는 부분에서는 하트를 날리는 춤을 추었다.

이철은 은우의 춤을 보며 고민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걸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아. 역시 은우에게 먼저 춰 보라고 하길 잘했지. 은우는 안무 천재다.’

***

경완은 커다란 백팩을 멘 채 HO 엔터테인먼트 앞에 서 있었다.

‘오늘 꼭 성공시키고 만다.’

경완은 힘차게 HO 엔터의 회전문을 돌렸다.

경완은 안내 직원에게 명함을 주면서 말했다.

“도마뱀 미디어의 제작총괄부장 최경완입니다. 여기 김태현 실장님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안내 직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잡상인도 아니고, 도마뱀 미디어면 외주 업체지만 나름 큰 회사인데 부장이 직접 오다니. 이거 고민되네. 올려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경완이 싱글싱글 웃으며 백팩에서 박카스를 한 통을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저도 나름 저희 회사의 총괄부장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508호로 올라가세요.”

경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08호에서 멈췄다.

경완은 508호 앞에서 멈춰 섰다.

경완은 백팩 안에서 시집을 한 권 꺼냈다.

- 이육사 시집.

경완은 익숙한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절정.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비껴 디딜 곳조차 없다.’

경완은 시를 다 읽은 뒤 기도를 하고 가방 속에 시집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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