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세상을 바꾸는 한 걸음 (4)
은우는 길동의 차를 타고 성수의 집에 왔다.
성수가 은우를 보자 반갑게 말했다.
“HEY, YO. 은우. 세상에서 젤로 귀여운 랩전사.”
은우는 신이 나서 성수의 말을 따라 했다.
“HEY, YO. 횬야. 세상에서 젤로 머찐 랩전샤.”
성수가 은우에게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잘 지냈어? 브로.”
은우가 작은 주먹을 성수의 주먹에 맞대었다.
“네, 횬아.”
길동이 은우에게 말했다.
“형, 근처에서 볼일 보고 있을 테니 끝나면 전화해.”
“네, 횬아.”
길동은 은우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성수가 은우에게 말했다.
“작곡한 노래 좀 들을 수 있을까?”
은우가 키즈폰의 재생 파일을 눌렀다.
“쉽지 안쬬? 내 먀미.
포기하고 십쬬? 가끄믄.
노려캐도 제자리.
더 노려캐야 할꺄?
거울 쏙에 내갸 몬생겨 보여 슬픈 날
그럴 땐 이 음아글 트러요.”
노래가 끝나자 성수가 박수를 쳤다.
“은우, 대단하다. 아티스트. 진정한 아티스트야. 형이 은우 팬이라면 이 노래를 꼭 듣고 싶을 거 같아. 근데 이 곡엔 랩이 없네?”
“횬아, 이 고근 제 고샴 패늘 위해서 먄든 건데요. 래비 잘 생각나지 아나서 이러케 만드러떠요.”
“그럼 형이랑 같이 랩을 넣어볼까? 지금 이 곡도 좋지만, 형 생각엔 랩을 넣으면 곡이 더 멋져질 거 같아서 말이야.”
“조아요.”
“은우가 형한테 그 팬에 대해서 더 말해 줘야 해. 그래야 형이 랩 가사를 쓸 수 있거든.”
은우는 오지혜를 떠올리며 성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갼 외로어떠요. 너뮤 외로운 샤람. 엄먀도 아뺘도 내 먀믈 아라주지 아나서 슬퍼때요. 슬프댜갸 꾸미 생견는데 그 꿈믈 위해서 열심히 공뷰해야 하는데. 공뷰가 잘 안 된대요.”
성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삼은 힘든 거야. 대한민국의 모든 고삼은 힘든 거야. 나도 그랬지. 물론 형은 공부를 안 했지만. 형이 공부하는 고통을 몰라서 랩을 못 쓰겠다.”
성수가 옆에 있던 쇼파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말했다.
“횬아.”
은우가 걱정이 되는지 쇼파에 드러누운 성수의 바지를 잡고 흔들었다.
“횬아. 랩 몬 만드러요?”
성수가 은우를 간지럽히며 말했다.
“못 만들긴 왜 못 만들어. 형이 밥 먹고 랩만 하는 사람인데. 형 머릿속에 온통 랩뿐인데 왜 못 만들어. 다만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적어서 랩 가사를 쓰는 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거지.”
“헤헤헤헤헤.”
은우가 성수의 간지럼에 몸을 흔들며 웃었다.
“은우야. 형이 재밌는 거 해 줄까? 지난번에 네 광고 봤는데 공룡변신 로봇 광고 말야. 그 노래에 랩 만들어서 넣어볼까?”
성수가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은우는 처음 보는 기계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뭐지? 세상이 정말 발전했네. 작곡을 도와주는 기계도 있었던 거야?’
성수가 말했다.
“형은 여기서 녹음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곡들도 있어서. 물론 그런 곡들은 슈퍼보이즈 멤버들과 함께 부르기엔 부담스러운 랩 위주의 곡이야. 그래서 집 안에 장비가 많아.”
성수가 은우가 광고에서 부른 노래를 틀었다.
“유리는 공룡 변신 로봇.
햐늘가 땅을 지켜 지구를 지켜
우리는 할 뚜 이떠.
잘할 뚜 이떠.
피웅피웅피웅.
슉슉슉슉”
성수가 작곡 프로그램을 조작하면서 말했다.
“여기다 드럼을 얹어 볼게.”
은우는 드럼이 얹어진 곡을 듣고 놀랐다.
‘같은 곡인데 드럼이 추가되니 훨씬 힘찬 느낌이야. 놀라운 기술인데.’
성수는 은우의 감동한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짜식, 형이 멋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인데. 형이 더 멋진 걸 보여주지.’
성수가 드럼을 더한 은우의 노래 위에 랩을 얹었다.
“이제 용감해지는 것밖에 길이 없지. 난 히어로. 넌 무서우면 내 뒤에 숨어. 난 모두를 지켜.
내가 나서면 모두가 비켜. 비켜. 승리는 따 놓은 당상.
모두가 날 보고 벌벌 떨어. 내 이름은 은우. 난 타고난 히어로. 스웨그.”
은우는 감동받은 눈으로 성수를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불렀던 공룡 변신 로봇 노래라니. 느낌이 완전 달라졌어.’
성수가 방긋 웃었다.
“형이랑 같이 랩으로 놀아 볼래? 원래 랩은 놀면서 느는 거거든. 이 작곡 프로그램 가지고 놀면 생각보다 아주 재밌거든.”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가 겁쟁이 토마토를 틀었다.
“겹쨍이 토먀툐, 토먀툐.
나는야, 어듀미 무서어.
나는야, 주샤가 무서어.
나는야, 슈영이 무서어.
나는야, 고양이갸 무서어.”
성수가 겁쟁이 토마토 위에 기타를 얹었다.
은우는 성수가 마법사처럼 보였다.
‘내가 모르던 다양한 악기가 많구나. 그런데 그 악기들이 전부 다 기계 안에서 소리를 내고 있다니. 현대의 과학은 마법보다도 대단한 건가. 대체 어떻게 저 작은 기계 안에 모든 걸 집어넣은 거지.’
성수는 겁쟁이 토마토 위에 랩을 얹기 시작했다.
“난 항상 겁은 많은 꼬맹이. 친구들 다 나를 놀려. 나를 무시하고 때리는 네가 미워. 하지만 날 늘 아무 말도 못 해. 두려워. 무서워. 그래서 자꾸만 움츠러들어.
그들은 더 나를 놀려. 내 엄마를 비웃어. 니가 뭔데. 내 엄마를 욕해. 아빠가 없는 건 내 죄가 아니야. 난 더 이상 참지 않아. 내 속의 분노를 터트려. 내가 참으니 보자기로 보나 본데 난 보자기가 아니라 다이너마이트. 이 순간 나는 토르보다 강해. 벌크업으로 너를 눌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들리지 않아.”
은우는 성수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놀랐다.
‘내가 만들어내던 귀여운 멜로디랑은 달라. 어둡고 무겁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런 노래가 됐어. 성수 형은 마치 흑마법사 같아. 저주를 거는. 그런데 왜 매력적이지?’
성수가 은우에게 말했다.
“이제 은우랑도 같이 해 볼까? 형이 작곡 프로그램으로 간단한 곡을 틀면 은우랑 형이 대화하듯 랩을 주고받는 거야. 잘 못 해도 되니까 편하게 해 봐. 원래 랩은 같이 놀아야 느는 거야.”
은우는 생각했다.
‘명석이랑 같이 했던 것처럼 말하듯이 해도 괜찮을까? 성수 형이 하는 랩이랑은 완전히 다른 거 같은데.’
성수가 멜로디를 틀었다.
“오늘 은우가 놀러와서 너무 신나. 괜찮은 곡을 가져와서 함께 작업을 하네. 넌 귀엽고 사랑스럽고 노래까지 잘하는 완벽한 아기. 사람들 모두 너에게 찬사를 하네.
우린 함께 랩을 해. 랩으로 지구를 지켜. 우주를 지켜. 우린 랩 히어로. 랩의 황제. 돌아온 랩의 천마. 우린 랩 세상의 절대자. 평화로운 이 세계는 우리가 지킨다. 예.”
은우가 천천히 리듬을 타며 노래를 시작했다.
“냐는 내 노래를 팬드레게 들려주고 시퍼. 그런데 대표니믄 안 댄다고 그래. 성공보댜 중요한 건 먀음. 나는 내 노래에 먀으믈 시러. 눈나갸 보낸 편지 한 통. 내 마으믈 울려. 냐는 고 샤미 먼지 모르지먄 눈나의 아프믈 느껴.
눈나의 지친 어깨를 감싸쥬고 시펴. 노래는 소니 되고 핫팩이 돼 눈나에게 다아. 눈나 더 이샹 울지 마요. 내갸 여기 이떠요. 냐는 언제나 눈나의 마으미 궁그매요. 냐는 언제냐 눈나의 편지를 기댜려요. 우리 재롱이들 샤량해. 재롱이드를 위해 더 머찐 내가 돼.”
성수는 은우의 랩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건 말하듯이 하는 랩이네. 내 스타일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매력이 있어. 게다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진심이 담긴 가사를 쏟아냈어. 상황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놀이처럼 하긴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자작랩을 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놀랍다. 은우.’
성수가 프로그램을 끄면서 말했다.
“은우야. 내가 랩을 만들 필요 없겠는데. 지금 네가 한 그 랩을 원래 만든 곡 위에 덧씌우면 될 거 같아. 원한다면 형이 피처링을 해줄게. 음 뭐로 하지?”
성수가 은우가 녹음해 온 파일을 켰다.
“너는 세상이 내게 쥰 션물.
냐는 너를 위해 밤하늘에 불을 켜요.
(반쨕반쨕 벼를 달믄 너의 눈똥쟈)
냐는 너와 함께 밤하느를 냐라
저 달로 우쥬로”
성수가 노래 위에 피처링을 얹었다.
“어제 오늘 내일 우린 더 많은 행복을 알고 그 큰 행복을 위해 오늘을 노력하며 살아. 지나고 나면 노력도 추억이 돼. 너는 오늘보다 내일 더 자라있고 오늘보다 내일 더 뿌듯할 거야. 우리 재롱이들 모두 함께 힘내.”
노래가 끝나자 은우가 박수를 쳤다.
“횬아, 너무 조아요. 머쪄요.”
“못할 줄 알았는데 은우랑 놀다 보니 노래가 완성됐네. 그럼 이거 조금만 다듬어서 구글 드라이브에 은우 이름으로 올려볼까?”
“와아.”
은우는 재능창을 열었다.
‘형, 좋은 노래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이 노래의 마지막은 이 재능이 될 거예요.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희망의 신 루딘의 긍정의 선택 레벨 3 – 0/100000
의지가 강해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은우는 성수가 완성한 노래 위에 재능을 실었다.
***
학익미술관에서는 앙리 마티스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주말을 맞아 미술관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 단위 관람객들과 데이트 나온 연인들로 붐볐다.
엄흥미는 미소를 띤 얼굴로 관람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큐레이터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내가 꾸민 공간에 관람객들이 첫발을 디딜 때. 이번 전시회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마무리해야 할 텐데.’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온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초등학생이 입구에 전시된 은우의 그림을 보고 멈춰 섰다.
“엄마. 이것 뱌요. 풍선껌 포장지예요. 풍선껌 먹고 싶다.”
“그러게 풍선껌 포장지에 그린 그림은 처음 보네.”
“이거 뱌요. 엄마. 강아지갸 우꼬 이떠요.”
초등학생이 강아지의 표정을 따라 했다.
“이러케 잇모미 드러나게 웃고 이써요.”
엄흥미는 초등학생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은우의 그림이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주나 보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은우의 그림 앞에 섰다.
“선생님이 어떤 걸 봤는지 잘 적어오라고 했으니까 적어야지. 카를로스 작가의 쉬는 시간이라는 그림이야. 근데 이거 내가 좋아하는 초코과자 상자인 거 같은데. 맞나? 여기 보리별이라고 써있는 게 맞잖아. 초코 과자 먹고 싶다.”
남자아이는 유리로 된 진열대 안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꺼내 보고 싶은데. 꺼낼 수가 없네.”
엄흥미는 남자아이에게로 가서 말을 걸었다.
“그림이 손상될 염려가 있어서 진열대에 넣어놓은 거야. 그래야 보관이 잘 되거든. 이 그림 맘에 드니?”
“맘에 들어요. 표정이 재밌어요. 그리고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아요.”
“그래? 어떤 그림이 제일 맘에 드는지 말해 줄래?”
“여기 이 그림요.”
남자아이가 자신이 보고 있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어요. 한 명이 곧 술래의 등을 칠 것만 같은데. 술래는 등을 돌리고 ‘피었습니다’를 외쳤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달릴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그림 속의 아이들과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기분이에요.”
엄흥미는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훌륭한 감상평이야.”
그때 관람실 안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12시부터 김상태 도슨트의 ‘앙리 마티스와 다시 만나기’가 시작됩니다. 해설을 듣기 원하시는 관람객은 1층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앞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엄흥미는 김상태의 해설을 듣기 위해 관람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상태 도슨트의 해설이 시작된대.”
다른 관람객들도 서둘러 관람실로 들어갔다.
그때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긴 치마의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서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42살의 전업주부 이혜주는 입장권을 손에 쥔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꼭 듣고 싶었던 김상태 도슨트의 해설인데. 벌써 5분이나 지났네.’
두리번거리던 이혜주의 눈에 은우의 그림이 들어왔다.
‘이건 누가 그린 그림일까? 스케치북에 그려진 투박한 선들. 그런데 그림 속 여자에게서 빛이 나. 삐뚤빼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선 같은데. 그림의 제목은 ‘어떤 여자’야. 이 여잔 누구일까? 여자 옆에 그려진 하트. 이건 아, 이건. 생각났어. 승은이도 3살 때 이런 그림을 나에게 그려서 줬었어.’
이혜주는 기억 속에서 이제는 중학생이 된 딸이 3살이던 그때를 불러왔다.
혼자 방에 조용히 있길래 무슨 사고를 치느라 조용한가 조용히 다가가 보니 승은이는 크레파스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승은아. 뭐해?”
“엄먀. 이쁘댜.”
승은이가 스케치북 속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나인가?’
이혜주는 승은이가 그려준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이건 해골바가지도 아니고 커다란 원 안에 눈코입만 뚫어놨네. 그 와중에 어디서 배웠는지 하트를 그렸네. 엄마 사랑해란 뜻인가.’
그 이상한 해골바가지 옆 하트에 이혜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가 된다는 게 이런 건가. 남들은 웃고 지나갈 일에도 내 아기는 천재처럼 느껴진다더니. 고마워. 승은아.’
이혜주는 은우의 그림 속에서 딸인 승은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묘한 그림이네. 요즘 승은이가 사춘기라 말도 안 듣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예쁘던 아기 시절 떠올리며 잘해 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