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세상을 바꾸는 한 걸음 (2)
아기들은 밀가루투성이가 된 몸으로 자장면을 먹고 있었다.
“마디떠요. 수녀님.”
“체고예요.”
지호는 포크가 불편한지 손가락으로 면발을 쥐고 먹고 있었다.
준수는 자장 소스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그릇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지호가 준수를 보면서 웃었다.
“헤헤헤헤, 준수 얼구레 짜장 무더땨.”
연아도 준수를 보면서 웃었다.
“준수 좀 뱌. 수염 생겨땨.”
지호가 자장이 묻은 손으로 연아의 볼에 자장을 묻혔다.
“눈냐도. 쟈장수여미댜.”
연아가 울상이 되었다.
“냔 공쥰데 수여미라니.”
연아가 거울을 보러 갔다.
혜린이가 연아를 걱정하며 같이 갔다.
“연아야 갠챠냐?”
혜린이가 연아의 얼굴에 묻은 자장을 닦아주었다.
은우는 지호와 함께 자장 수염 만들기에 재미를 붙였다.
“헤헤헤헤. 지호야. 자장 수염 재미땨.”
“그치? 횬아. 우리 더 하꺄?”
지호가 은우의 볼에 자장을 묻혔다.
은우도 지호의 볼에 자장을 묻혔다.
“와, 점 대땨.”
“여기도 점이댜.”
지호와 은우는 서로 얼굴에 자장을 묻혀주며 놀았다.
준수와 시우도 자장 수염 만들기에 동참했다.
“자장 마디뗘.”
“자장 재미뗘.”
은우는 친구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꺈먄 애듀라. 기댜려 뱌. 수녀님 샤진 찌거두세요.”
은우가 키즈폰을 김마리아 수녀님께 드렸다.
아기들은 자장이 묻은 얼굴로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냐는 티랴노 사유루스댜.”
입을 크게 벌리고 양손으로 화난 공룡의 발을 표현하는 준수.
“냐는 쟈쟝 기시니댜.”
고개를 푹 숙이고 흰자를 위로 뜬 시우.
“냐는 블랙팬더댜.”
자장 범벅이 된 히어로 은우는 양손을 주먹을 쥔 채 교차시켜 엑스 표시를 했다.
김마리아 수녀님은 아기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웃고 있었다.
‘다들 자장 히어로 같은데. 너희가 귀여워서 적들이 도망가겠다.’
지호가 영화 속에서 블랙팬더가 등장할 때 나오는 동물이 달려오는 효과음을 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아아아아아아~”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동물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지호의 사진.
은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져기 공격햔다. 모듀 냐를 따르랴.”
지호와 시우, 준수가 은우의 사방을 지켜서며 비장한 모습으로 발톱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지규를 지켜랴!”
지구를 지키기 위해 뭉친 블랙팬더와 친구들의 사진이 또 한 장.
김마리아 수녀님은 생각했다.
‘신기하게 모든 히어로물의 줄거리는 비슷하단 말이지. 어른들은 안 읽어도 줄거리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야. 사진으로 찍어놓으니 재밌네. 아기들 사진을 더 많이 찍어둬야겠어.’
그때 어린이집 앞으로 한 대의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치킨 왔습니다.”
배달원 아저씨가 치킨을 내려놓자 아기들이 소리를 질렀다.
“와야, 치키니댜.”
“퍄티댜.”
“자장면도 먹꼬 치킨도 먹꼬 신냔댜.”
배달원 아저씨가 아기들을 보며 웃었다.
“리액션 부자들이네. 치킨 배달와서 연예인급 환호를 받고 돌아가네. 맛있게 먹어.”
김마리아 수녀님은 배달원 아저씨가 주고 간 치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자, 앞접시에 놔줄 테니 하나씩 먹으렴.”
“수녀님, 댜리. 댜리.”
치킨을 좋아하는 혜린이는 다리를 울부짖었다.
수녀님이 혜린이 앞에 다리를 하나 주었다.
“수녀님, 냐두요. 냐두요.”
입 벌린 아기새들처럼 치킨을 요구하는 아기들 때문에 김마리아 수녀님은 정신이 없었다.
지호는 치킨을 잡고 치킨을 먹다가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빨다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혜린이는 야무지게 양손으로 닭 다리를 잡고 뜯었다.
연아는 치킨 무에 꽂혀서 한 손엔 치킨, 한 손엔 치킨 무를 잡고 양손 신공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은우는 배달된 양배추 소스에 치킨을 굴려서 먹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추억도 쌓고. 법도 통과되고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구나.’
은우의 눈앞에 변화한 재능창이 보였다.
[희망의 신 루딘의 긍정의 선택 레벨 3 – 0/100000
의지가 강해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와 이거 꼭 필요한 재능인데.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해 봐야겠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목 풀기 노래 연습과 체력 단련을 해야 하는 은우에게는 요즘 잠이 고민이었다.
‘잠은 좋지만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아침잠 10분은 왜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랩 연습도 하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
도마뱀 미디어의 제작총괄본부장 최경완은 새로 들어온 제안서를 꼼꼼히 보고 있는 중이었다.
‘초록창의 채널 N에서 연예인 채널을 새로 만들겠다는 건데. 초록창은 국내에서 가장 큰 포털 사이트이니까 이건 우리 회사에게 기회야.’
도마뱀 미디어는 6년 전 시트콤 ‘로우킥 시리즈’를 히트시킨 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놓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내 외주 업체 중에서는 가장 크다고 이름난 우리 회사였지만,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지. 얼마 전부터 스튜디오 몬스터가 ‘오월의 신부’, ‘조선 검객’ 등을 히트시키며 우리 회사를 앞질러 가고 있어.’
최경완은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작품을 성공시켜야만 해.’
최경완은 메신저를 켜고 제작총괄부의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초록창 채널 N에 들어갈 연예인 채널과 관련하여 내일 오후 3시에 아이디어 회의를 열 생각이니 모두 각자의 제안서를 가지고 참여할 것.
최경완의 메시지를 받은 신주리는 머리가 아파 왔다.
‘내일은 또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가지?’
지난번 아이디어 회의에서도 경완에게 무참히 깨졌던 신주리였다.
‘이번에도 깨지면 세 시간짜리 설교를 들어야 할 텐데.’
경완은 늘 아이디어가 맘에 들지 않을 때면 부하직원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설교를 늘어놓고 했다.
“라떼는 말이야. 아이디어를 10개씩 준비했었어. 뭐가 먹힐지 모르니까. 아이디어는 티비 프로그램의 생명인 거 몰라. 시청자의 니즈를 파악하라고. 다른 프로그램 따라가기만 했다가는 일등이 될 수 없어. 일등이.
이 대리. 어제 몇 시간 잤어? 여섯 시간? 잠이 와? 우리 회사 프로그램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는데 잠이 오냐고 잠이.
라떼는 말이야. 시청률이 안 나오면 잠이 안 왔어. 잠도 안 자고 아이디어 기획하고 시청률이 안 나오는 원인을 분석하고 경쟁사 작품 다 모니터하고 그랬다고.
시청률은 직원의 정신 상태라고. 정신 차려. 다들.”
신주리는 다시 생각해도 경완의 잔소리를 듣기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어. 이놈의 회사 언젠간 때려치워야지.’
신주리는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은 사직서를 꺼내 보았다.
‘저걸 부장한테 던질 때 얼마나 신이 날까?’
상상만 해도 기뻐서 신주리는 웃음을 지었다.
‘다음 달 카드값만 해도 백만 원이 넘는데. 지난달에 할인해서 구매한 가방이랑 원피스랑 신발이랑. 스마트폰 할부도 아직 안 끝났고. 월세 오십만 원에 전기세, 각종 공과금을 생각하면.’
신주리는 조용히 사직서를 집어넣었다.
‘치사해도 꾹 참고 다녀야지. 고향에서 딸 회사 잘 다닌다고 자랑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말이지.’
신주리는 조용히 제안서를 작성하기 위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탑 보이즈. 얼마 전 빌보드 차트 1위에 입성했으니 나와주기만 한다면 시청률은 팍팍 오를 텐데. 이미 인지도가 높아져서 채널 N 같은 작은 채널에 나오려고 할까?
요즘 티비만 틀면 나와서 방송에서 이미지 소비도 심해졌고. 고정 시청자 확보에선 좋지만 신선함은 떨어질 것 같고.
슈퍼보이즈. 얼마 전 내놓은 ‘러브러브’라는 곡으로 음원차트 1위를 5주간 달성. 새롭게 ‘일요일 오후의 너에게’라는 발라드곡이 음원차트 10위로 진입.
다들 뭔가 비슷비슷한 거 같아. 이대로 가면 또 라떼는 말이야를 3시간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뭐 새로운 거 없나?’
모니터 앞에서 커피만 홀짝이는 신주리였다.
***
은우는 졸린 눈을 부비며 잠을 깨었다.
‘7시에 일어나는 걸 연습한 지 1년 반이 됐는데도 늘 졸려. 졸음이란 쫓기 힘든 것일까? 어차피 죽으면 계속 잠만 잘 텐데도 왜 이리 졸릴까.
새로 생긴 재능을 시험해 봐야겠다.’
은우는 재능창을 켰다.
[희망의 신 루딘의 긍정의 선택 레벨 3 – 0/100000
의지가 강해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일어나서 연습을 할 거야. 난 랩을 잘하는 랩계의 티라노사우르스가 될 거야. 아자.’
은우의 눈앞에 나타난 티라노사우르스가 천천히 은우에게로 걸어오더니 은우의 볼을 핥으며 은우를 깨우는 것이 아닌가.
“일어나. 은우야. 멋진 래퍼가 돼야지. 은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래퍼다.”
티라노사우르스가 은우를 자신의 목 위에 태우더니 미끄럼을 태워주었다.
“헤헤헤헤헤헤. 간지러. 이러나께. 이러나께.”
은우는 기분 좋게 잠에서 일어났다.
‘오 진짜 좋은데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대상을 만나게 해주니까 잠이 와도 꼭 의지대로 하게 돼.’
은우는 새로운 재능에 감탄했다.
‘이건 정말 필요한 재능이야.’
은우는 매일 저녁 양치질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미룬 것을 떠올렸다.
‘아, 과자를 먹고 양치를 잘 안 했더니 이빨이 썩은 거 같아. 치과는 무서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양치를 잘할걸. 그랬으면 이도 안 썩었을 텐데. 이 재능을 미리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누구나 원하는 재능이야. 누구한테 가장 필요할까?’
은우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은우가 보리에게 물었다.
“보이야. 기챠능 걸 뱌로뱌로 하게 만드능 재능은 누규에게 피료할꺄?”
“멍멍(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로 할 걸. 누구나 그런 문제에 시달리잖아. 물론 강아지들은 안 그렇지만. 난 그날 먹을 간식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지. 암, 맛있는 건 바로바로 먹어줘야 해. 가만있어 보자.)”
보리가 은우의 방 한구석에 정리된 상자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멍멍(생각해보니까 니 팬레터를 읽다가 그 재능이 꼭 필요한 팬을 한 명 봤던 거 같아. 여기 있다.)”
보리가 편지를 입으로 물고 왔다.
“멍멍(충무공 고등학교 3학년 오지혜의 편지.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했어.)”
은우가 보리가 꺼낸 편지를 폈다.
- 안녕, 은우야. 오늘은 너의 팬이 된 지 523일이 되는 날이야. 수능시험이 174일 남은 날이기도 하네. 난 오늘 윤리와 사상이랑 동아시아사 인강을 3개씩 듣고 언어와 수리 모의고사를 2개씩 풀려고 했는데 아직 절반도 못 했어.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 사실 난 그동안 공부랑 안 친하게 지냈거든. 공부를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학교 수업도 잘 안 듣고 매일 엎드려 자고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어.
그런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너투브에서 본 하나의 영상 때문이었어.
그 영상은 내전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된 것이었어. 팔이 한쪽밖에 없는 여자가 머리에 스카프 같은 걸 두른 채 군복을 입고 있었어. 여자는 하나 남은 팔로 총을 들고 있었지. 옆에는 이제 한 대여섯 살 정도 된 것 같은 작은 아기가 여자에게 엄마라고 불렀어. 여자는 아기에게 건빵 한 조각을 주었어. 아기는 건빵을 입에 넣고 천천히 오물거렸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아기는 너무 귀여웠어.
그런데 난 그 아기를 보면서 슬퍼졌어. 그 아기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오늘 밤 전쟁이 다시 나서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필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다니 참 운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자가 히잡을 쓴 여자에게 물었어.
“전쟁이 언제쯤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요? 전쟁에서 이길 거라고 확신하나요?”
여자는 총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어.
“모른다. 아무것도.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여자의 몸으로 총을 들었나요?”
“나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우린 죽음을 거부할 순 없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이유로 죽음을 선택했다. 때론 죽음이 삶보다 값질 수도 있다.”
여자의 말이 내 머리를 망치로 때린 것만 같았어.
그동안 난 그렇게 생각했었어. 내가 가장 불행하다. 내 부모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싸우셨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진 부모님이 싸우면 울었는데 그 뒤론 울지 않았어. 감정이 메마른 것 같았거든. 대신 엄마, 아빠와 말을 하는 횟수도 줄어들었지.
부모님은 결국 내가 중학생이 되자 별거를 하시기 시작하셨어. 난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했어.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집에서 물건이 깨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어. 그렇다고 내가 엄마와 말을 자주 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엄마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했지. 나쁜 친구랑 어울리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 담배 피지 마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라.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어. 수업 시간에 졸지 마라. 지각하지 마라. 학교 근처에서 담배 피지 마라.
난 누구의 말도 안 들었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어른들 말을 듣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영상 속의 여자를 보면서 생각했어.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저기 있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불행을 탓하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구나. 현재를 견뎌서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
그 뒤로 꿈이 생겼어. 난 기자가 돼서 아프가니스탄에 갈 거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알릴 거야.
그래서 기자가 꼭 되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가고 싶은 대한대 신문방송학과에 가려면 1등급이 필요한데 말이야. 할 수 있을까?
보리가 말했다.
“멍멍(이 친구야. 재능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이는 친구.)”
“마쟈. 져 눈냐도 재능이 피료해. 그런데 져 눈냐만 도와주면 다른 눈나드른 안 죠은 거 아닐까?”
“멍멍(그럴 수도 있겠다. 하긴 재능이란 게 누군가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은 못 가지게 될 수도 있으니까)”
“고샴 횬아 눈냐들 모듀를 위로햐는 노래를 만들고 시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