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첫 번째 음반 (6)
은우는 명석이와 헤어진 뒤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내가 20대, 30대 가수들이 부른 가사를 그대로 부른다면 그건 웃기기만 할 뿐이야.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나는 내 마음을 담은 내 이야기를 가사로 써야만 해.’
은우는 놀이터에서 들은 명석이의 노래가 깊은 울림을 준 이유를 생각했다.
‘그 노래엔 명석이의 진심이 있었어.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명석이만의 생각과 경험들. 명석이의 인생. 노래란 내 진심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 멋진 비트나 기교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일지도 몰라. 척하지 말자. 나는 아직 있는 그대로가 예쁠 나이니까.’
은우는 스케치북을 폈다.
‘나의 지난 5년간의 인생을 돌아보는 거야. 노래에 내 인생과 마음을 담는다.’
은우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처음엔 아빠와 함께 좁은 원룸에 살았었지.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호적을 받지 못했어. 난 미처 몰랐지만, 그땐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던 것 같다고 아빠가 그랬어.
그 어둠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라는 빛 때문이었다고.
아빠는 날 위해 버텼지. 아빤 몰랐지만 내겐 신이 준 재능이 있었어. 그 재능 덕에 인생에서 많은 행운을 만났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운을 말이야.
하지만 내가 만난 가장 큰 행운을 꼽으라면 그건 신이 준 재능이 아닌 것 같아.
그건 날 사랑해준 많은 사람들.
처음 날 지켰던 아빠의 사랑, 중고시장에서 물건을 사 주었던 손님들, 날 예뻐해 주고 걱정해주었던 손님들, 떡볶이집의 단골손님들, 어린 배우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드라마를 보고 국민청원에 응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걱정하며 눈물지었던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은우는 키즈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샹은 내게 안 된다고 마해떠
(너는 미혼뷰의 아이야.)
세상은 내게 포기하랴고 마해떠
(너는 엄마가 엄떠.)
냐를 키운 거슨 샤량
(아뺘의 샤량
팬드리 샤량)
그 샤량으로 난 히믈 내.
나는 포기하지 아나
(여러부늬 응언 거마어요.)
나는 포기하지 아나.
(저도 호저기 생겨떠요.)
냔 할 뚜 이떠.
(샤랑만 이뜨면 냔 무얻또 두렵지 아냐)
이제 우리에겐 꼬낄마니 이떠.
난 우리 모듀를 위해 더욱 히믈 내.
먀지먁까지 내 모든 걸 거러.
이건 끝나지 아늘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샤량으로 비치된 전설갸도 가튼 이야기.
(마지막엔 속삭임으로) 세상엔 너뮤 감샤할게 마냐
여러뷴 샤량해요.”
은우가 녹음을 끝냈을 때 보리가 박수를 쳤다.
“멍멍(너 랩 잘한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는 거야?)”
“명서기갸 알려져떠.”
“멍멍(명석이가 랩을 잘했어? 처음 알았네.)”
은우는 자신이 만든 랩을 윤기세와 정미나, 이철, 강라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 이틀 남았다. 이틀 후에 다들 놀라겠지?’
***
윤기세, 정미나, 이철, 강라온, 은우는 강라온의 사무실에서 은우의 타이틀곡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윤기세가 말했다.
“타이틀곡 편곡을 마쳤어요. 대화하듯 랩과 멜로디가 교차하게 만들었어요. 데모곡의 랩은
기브미더머니에서 우승했던 힘찬이 도와주었어요. 실제로 녹음할 땐 지난번 말씀하셨던 슈퍼
보이즈의 지석이나 현우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곡의 분위기랑 랩이 잘 어울리나 봐주세요.
주 멜로디가 부드럽고 귀여운 편이어서 랩은 좀 힘 있고 자신감 있게 넣어봤어요.
‘내가 은우야. 난 원래 잘났어. 그러니까 다 덤벼.’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봤는데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네요.”
윤기세가 데모곡을 재생시켰다.
“내 꿈은 월드 스타.
난 배우로서 인정받고 가수로도 인정받네.
난 두려울 것 없어. 거칠 것 없어.
난 오로지 음악을 위해 태어난 전사. 혹은 천사.
나를 향한 시기, 질투.
그딴 건 다 두렵지 않아.
난 오직 나를 믿어.
나의 재능. 능력. 실력.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지.
넌 귀여워.
귀여워서 뜬 거야.
하지만 웃기지 마.
귀여움 때문에 실력이 가려진 것뿐 실력이 없는 게 아니니까.
나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네.
귀여움까지 갖췄으니 난 21세기가 원하는 슈퍼스타.
이제 내 시대가 열렸네.
난 세상을 거머쥘 월드 스타.”
곡이 끝나자 이철이 박수를 쳤다.
“신나는데요. 춤추기엔 더 좋을 거 같아요 확실히.”
정미나는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비트는 신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가사가 원래 있던 가사랑 랩 가사가 합쳐지니까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난 체하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은우한테 이런 가사가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랩 스타일도 너무 망치 스타일 같은데요. 망치가 자뻑랩의 일인자잖아요. 이미 기브미더머니를 통해 저 스타일이 힙합 마니아층에겐 망치의 시그니처처럼 각인돼 버려서요.”
강라온이 말했다.
“자신감 있는 이미지가 나쁜 건 아닌데 기존에 은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순수하고 귀엽고 그런 이미지라서 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 우려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 같아. 그리고 망치가 떠오르는 거 같긴 해.
랩 자체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말이야. 이게 타이틀곡이니 고민을 안 해볼 수가 없는 거 같아.”
그때 은우가 조용히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강라온이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도 의견이 있으면 말해 봐.”
“져도 만드러 와떠요.”
“은우가?”
“네, 열심히 준비해떠요.”
은우가 키즈폰의 재생 파일을 눌렀다.
“세샹은 내게 안 된다고 마해떠
(너는 미혼뷰의 아이야.)
세상은 내게 포기하랴고 마해떠
(너는 엄마가 엄떠.)
냐를 키운 거슨 샤량
(아뺘의 샤량
팬드리 샤량)
그 샤량으로 난 히믈 내.
나는 포기하지 아나
(여러부늬 응언 거마어요.)
나는 포기하지 아나.
(저도 호저기 생겨떠요.)
냔 할 뚜 이떠.
(샤랑만 이뜨면 냔 무얻또 두렵지 아냐)
이제 우리에겐 꼬낄마니 이떠.
난 우리 모듀를 위해 더욱 히믈 내.
먀지먁까지 내 모든 걸 거러.
이건 끝나지 아늘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샤량으로 비치된 전설갸도 가튼 이야기.
(마지막엔 속삭임으로) 세상엔 너뮤 감샤할 게 마냐
여러뷴 샤량해요.”
노래가 끝나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정미나였다.
“너무 좋은데요. 가사에 은우 마음이 담긴 것 같아요. 근데 이걸 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기존에 들었던 랩이랑 좀 다른 거 같아서.”
윤기세가 말했다.
“말하는 듯이 랩을 하는 래퍼들이 있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건 버벌플로우. 랩은 자기 스타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팬들의 취향이 갈리긴 하겠지만 방금 들은 건 은우만의 랩이에요.”
강라온이 말을 이었다.
“자기만의 느낌은 확실히 있는 거 같아. 은우가 아직 어른만큼 발음이 정확하거나 빠르지 못하니까 지금 잘 나가는 다이나믹 트리오나 비제이 스타일의 강하고 빠른 랩을 하는 건 사실 무리가 있어 보이고. 어른인 객원 래퍼를 쓰지 않는다면 지금 스타일이 은우에게 잘 맞는 것 같아. 곡의 분위기랑도 잘 맞고.”
이철이 말했다.
“이번에도 나름 숙제를 해 왔네. 녀석. 신기하단 말이지. 전에 춤출 때도 전혀 못 할 것 같은 풀죽은 얼굴로 집에 가더니 다음에 만날 땐 조금씩 나아져서 온다고. 그래서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어.”
윤기세가 말했다.
“객원 래퍼보단 낫겠어요. 은우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이러다 작사, 작곡에 다 자기 이름 올릴 기세인데요. 미나 씨랑 나, 긴장해야겠어요.”
정미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요. 이러다 최연소 싱어송라이터 나오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근데 되게 기분이 좋아요. 은우는 뭐랄까. 너무 열심히 하니까 질투심이 난다기보단 은우가 이렇게 열심히 생각해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예술가로서의 나를 돌아보게도 되고요. 중요하잖아요. 예술가에게 자극이란 거. 우린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잖아요. 늘 이상을 추구하는 게 예술가죠. 그런 점에서 전 늘 즐거워요. 은우 보러 올 때마다.”
윤기세도 동의했다.
“만날 때마다 자극이 돼요.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리게 하는. 이쯤 되면 거의 마법 같아. 은우 매직. 우리 다 같이 은우 매직에 빠지는 거 아닐까요?”
강라온이 야심 찬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빠져야지. 첫 번째 미니앨범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사로잡고, 두 번째 미니앨범으로 세계를 사로잡는다.”
이철이 말했다.
“이제 타이틀곡도 거의 정리되는 분위기고 녹음이랑 안무만 정하면 되겠네요.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다.”
강라온이 말했다.
“3곡만 더 준비하고 녹음 시작하고 마케팅팀이랑 회의해서 어떤 식으로 마케팅 들어갈지도 생각해 봐야지.”
은우는 가슴이 설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대에서 팬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신난다.’
***
엄흥미는 카를로스의 그림이 전시될 미술관 입구에 서 있었다.
‘작년에 딱 한 번 사진전 수상작 전시회로 사용된 적이 있는 공간이야. 그 후론 계속 비어있었고. 들어오자마자 관람객들의 눈에 띄긴 좋은 곳이지만 전문적인 공간으로 보이진 않지. 그림이 전시된다고 해도 입장료도 받을 수 없는 공간이고.
하지만 아직 미술계에 정식 평가를 받지 않은 신인 작가에겐 관람객의 공정한 평가를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엄흥미는 태블릿으로 은우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켜서 보고 있었다.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과 풍선껌 포장지에 그린 그림은 액자로 걸어야 할 것 같은데 과자 상자에 그린 그림은 과자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서 고민이 되네. 그런데 이 작가는 어쩜 이렇게 일상적인 소재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봐도 참신해. 아마 관람객들도 좋아할 거야.’
탈색한 핑크색 머리에 흰색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엄흥미의 뒤에 섰다.
“뭘 그리 열심히 보세요? 누님?”
엄흥미가 깜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왔구나. 상철아. 깜짝 놀랐잖아.”
“이번엔 앙리 마티스 전 아니에요? 이건 마티스 그림이 아닌데. 한국 작가예요?”
상철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였다. 5년 전까지만 해도 BBS의 간판 아나운서였으나 프랑스 유학 후 도슨트로 전향을 한 케이스로 스타일리시한 패션과 수려한 외모로 아이돌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은우의 그림을 찍은 태블릿의 화면을 유심히 보았다.
“모르는 작가 같은데 신인인가? 그림 좋네요.”
“네가 보기에도 그래?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도슨트인 네가 보기에도 그럴 정도면 아빠 안목이 대단하긴 하네.”
“관장님이 발굴하신 신인이에요? 관장님은 웬만해선 그림 좋다는 말 안 하시는 분인데? 이 작가 누구야? 진짜 궁금하다.”
“카를로스. 얼굴 없는 화가로 활동할 거야. 앞으로.”
“얼굴 없는 화가요? 외국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그렇게 활동하는 화가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아마 최초가 되겠지.”
“그림 더 볼 수 있어요?”
“여기 더 있어.”
상철은 엄흥미로부터 태블릿을 넘겨받아 은우의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과자 상자나 풍선껌 종이는 스케치북에 비해 다루기 어려운 소재였을 텐데. 소재의 특징을 잘 알고 있는 작가 같아. 풍선껌 종이가 쉽게 구겨지는 걸 오히려 문양으로 이용했어. 과자 상자는 종이 질이 좋지 않아 물이 잘 번지는데 이 부분은 일부러 물에 살짝 적신 것 같아. 그걸 통해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살아났어. 이 정도 신인이면 관람객들도 금방 알아볼 거야.’
상철이 흥분한 표정으로 엄흥미에게 말했다.
“이 그림 전시하실 거면 제가 해설하고 싶어요.”
“이건 정식 전시가 아니야. 그냥 빈공간에 하는 전시고 입장권에 포함되는 것도 아닌데.”
“돈은 상관없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엄흥미는 상철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 여기서 열렸던 사진전도 그렇고 그 전에 이 공간을 활용했던 전시는 한 번도 도슨트가 해설을 한 적이 없었거든. 카를로스는 아직 정식으로 등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 봐.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만약 언론에서 특권 남용이라든지 그런 걸로 삼으면 문제가 심각해지잖아.”
“이 정도 작품이면 누구든지 인정을 할 거 같은데요.”
“그래도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화가로 인정받으려면 국전에서 입상하거나 어느 대학 출신이거나 어떤 교수로부터 사사 받았거나 이런 약력들이 필요하니까.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다음 전시 때는 입구가 아니라 전시장 안에 정식으로 전시할 수 있겠지. 그땐 네가 해설을 해주면 카를로스가 기뻐하지 않을까?”
“아쉽지만, 알겠어요. 누나. 누나와 관장님을 곤란에 빠지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근데 이 그림을 보니 관장님이 왜 특권 남용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그림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관객들이 알아주도록 내가 잘 전시를 해 봐야지.”
엄흥미가 태블릿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