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101화 (101/257)

101화. 첫 번째 음반 (4)

백인수는 은우에 대답에 미소가 지어졌다.

“은우야, 민들레 꽃이 져야 홀씨가 만들어지는데 왜 같이 그렸어?”

“하뷰지. 그건 민들레 홀씨에 제 기도를 다마서 그래요. 슈녀님이 그래떠요.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안는다고. 그 그리믄 명서기를 생가카면서 그려떠요.”

백인수는 은우의 마음에 감탄했다.

‘이 그림은 친구를 위한 은우의 기도가 담겨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과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한 장의 그림 안에 담긴 거야. 이 그림 너무 따뜻하다. 색감도 너무 좋고 구도도 너무 좋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은우의 마음이야.’

백인수는 지난번 창현에게 했던 말을 은우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우야, 이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는데 들어보련?”

은우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백인수의 앞에 앉았다.

“은우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은우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명한 교수님이랑 평론가가 은우 그림을 칭찬했어. 그래서 은우가 괜찮다고 하면 은우가 그린 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은우는 어떠니?”

은우는 고민했다.

‘예술가로 데뷔를 하는 것이 이 시대에는 그리 쉬워졌단 말인가? 음악이나 연기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걸 보면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져서 그런 건가. 하지만 괜찮은 화가가 되려면 궁중화가가 돼야 하고 궁중화가가 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은우는 파리넬리였던 시절 보았던 유명한 화가들을 떠올렸다.

‘로코코 시대엔 여성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게 유행했었지.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만 생각해도 그렇고 말야. 그 시대엔 주로 아름다운 귀족을 그리는 게 그림의 권위였지. 혹시 이 시대도 그런 건가?’

은우가 백인수에게 물었다.

“하뷰지. 어떤 그리믈 그려야 대요?”

“어떤이라니? 주제를 묻는 거냐? 그림을 소개한다고 하니 심각하게 생각한 모양이구나. 네가 그린 그림 중에서 좋은 걸 골라 소개할 거란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그림은 모두 훌륭하지만 말이다.”

은우는 생각했다.

‘역시 에르페우페의 재능이 대단하긴 하군. 헤파이토스의 재능보다도 말이야. 장미나 선생님의 칭찬과는 비교할 수가 없군.’

은우가 말했다.

“제 그리믈 보고 샤람들이 행보케 진댜면 조아요.”

“은우야 만약 너의 이름 그대로 그림을 발표하게 된다면 말이다. 네가 배우나 가수로 활동할 때 불편할 수도 있어서 너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까 하고 생각 중이란다. 이건 너의 아빠랑도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도 찬성하더구나.”

“저도 조은 거 가타요. 제갸 그린 걸 샤람드리 몰라두 대요.”

“그래서 말이다. 만약 가짜 이름 같은 걸 짓는다면 어떤 이름을 쓰고 싶니?”

은우는 생각했다.

‘전전생에 내 본명은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 니콜라 브로스키’였는데 무대에 오르면서 파리넬리란 예명을 얻었지. 그 뒤론 평생 사람들은 날 무대 위에서 파리넬리라고 불렀지만 말이야.

이번 생에 다시 예명을 써야 한다면 그럼 난 전전생의 이름을 택하겠어.’

은우가 대답했다.

“카를로스요.”

백인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를로스라니. 좋은 이름이구나. 외국 이름 같은데 말이다. 그 이름이 좋은 이유라도 있니?”

“그냥 마으메 드러요.”

은우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전전생의 이름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요. 할아버지. 하지만 전 제 삶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어요. 저의 이번 생만큼이나 파드와였던 전생과 파리넬리였던 저의 전전생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백인수는 은우의 말을 메모하며 말했다.

‘은우는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대답이 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니까.’

***

엄태훈이 백인수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귀한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자분과 따님 모두에게요.”

“이제부터 올 때마다 손자가 그린 그림을 가져오도록 할게요. 오늘도 몇 점 가져왔습니다만.”

“이번엔 어떤 그림을 가져오셨을지 마음이 설레네요.”

백인수가 가방 안에서 은우의 그림을 꺼냈다.

엄태훈은 은우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간결한 선으로 표현한 민들레. 채색이 돼 있지 않은 그림인데도 섬세한 꽃잎이 살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아. 그런데 민들레꽃 근처에 날아다니고 있는 건 민들레 홀씨인가? 두 가지가 한 계절에 만날 수는 없을 텐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는 그림이군.

가만 보니 민들레 꽃대에 밴드가 붙여져 있네. 부러진 꽃대에 밴드를 붙이고 간 건 누구일까?

채색이 없어서 심심한 것처럼 느껴졌던 그림의 여백을 메꿔주는 두 가지라니. 참신한 그림이군.’

엄태훈은 무릎을 탁 쳤다.

“이번 그림도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저도 이 그림을 봤을 때 감탄했습니다. 여기 다른 그림 한 장은 다른 그림들과 기법이 좀 바뀌었어요.”

백인수가 은우의 그림 한 장을 더 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엄태훈은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았다.

‘개미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옮기고 있는데 그 위로 작은 손 하나가 빗방울을 막아주고 있어. 아기의 손처럼 작은 손이야. 덕분에 다른 땅은 다 젖었는데 개미들이 가는 길은 전혀 젖지 않았어. 이 그림 역시 뭔가 따뜻해.’

엄태훈이 말했다.

“이 그림 역시 좋군요. 손자분은 천재가 맞습니다. 요즘 애들 유행하는 말로 감성 천재요.”

“과찬이십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알게 되죠. 마음을 그림에 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림에서 테크닉을 늘리는 건 하다 보면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건 정말 어려워요. 더군다나 요즘은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그림에 마음이나 생각을 담는 일이 더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백인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태훈에게 물었다.

“이 그림은 기법이 좀 달라져서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관장님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저도 그 점이 좀 놀라웠습니다. 다른 그림들은 간략하게 대상의 특징을 잡는 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이 개미를 그린 그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놀랐어요. 손등의 주름까지 다 표현이 돼 있더군요.”

“자세히 보면 개미들의 표정이 다 다르더라구요.”

엄태훈이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말이네요. 개미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옮기면서 친구를 바라보며 웃고 있네요. 개미가 웃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아이다운 상상력이죠. 절대 어른이 그릴 수는 없는 그림이에요. 그림을 보다 보니 제 손자가 천천히 자라길 바라게 되더라구요.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요. 손자는 자라도 그림을 잘 그릴지 모르지만 이런 순수함은 지금만 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엄태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부분은 저도 동의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아마 손자분은 사춘기가 오면 사춘기에 맞는 멋진 그림을 그려줄 것 같은데요. 그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춘기를 돌이켜보며 공감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난번에 김진태 교수님은 이미 은우의 그림을 보셨지만 제가 은우의 그림을 다른 미술계 인사분들에게 소개하고 전시회 일정을 잡아볼까 합니다만.”

“그거 좋지요. 참 제 손자가 자기 이름을 지었어요. 며칠 전 제가 물었더니 골똘히 고민하더니 카를로스라는 이름을 내놓았습니다.”

엄태훈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카를로스요?”

“네. 너무 이상한 이름인가요? 제가 다시 물었더니 이유 없이 그냥 그 이름이 좋다고만 하더라구요.”

“너무 멋진 이름이네요. 얼굴 없는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지만, 화가의 삶과 그림이 분리되는 건 예술적으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국적도 숨기는 거죠. 아무도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화가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관장님 말씀을 들으니 맞는 말씀 같네요.”

백인수는 생각했다.

‘역시 은우는 속이 깊은 놈이야. 나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어.’

***

이철과 강라온, 윤기세, 정미나, 은우가 함께 연습실에 모여 있었다.

“지난번에 만든 은우의 타이틀곡 ‘난 너무 귀여워’를 편곡했어요.”

윤기세가 가져온 파일을 재생시켰다.

“거리를 냐셔면 날 보는 시션들.

누냐, 횬아, 할뷰지, 할모니

내갸 그러케 기여운 가여.

내갸 지나갈 때먀댜 냘 향한 시션들.

멀리셔도 냐를 쫓는 시션들.

내갸 그러케 기여운 가여.”

파일이 끝나고 강라온이 말했다.

“전보다 비트가 더 풍부해진 거 같네. 좀 더 춤추기 좋아졌어. 어깨가 들썩들썩하는데.”

이철도 동의했다.

“멜로디는 똑같지만, 저도 이 곡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안무 짜기에 말이죠.”

윤기세가 말했다.

“그런데 이 곡은 다 완성된 게 아니에요. 사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윤기세에게 집중되었다.

“랩을 넣으면 더 좋은 곡이 될 거 같은데 말이죠. 은우가 랩을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죠. 그래서 편곡을 멈춘 상태거든요. 은우가 랩을 할 수 있을까요?”

은우는 슈퍼보이즈 형들의 랩을 떠올렸다.

‘메인 래퍼 지석이 형이랑 서브 래퍼 현우 형의 랩은 정말 멋졌는데 나도 무대에서 그렇게 멋지게 해 보고 싶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 뚜 이떠요. 잘할 슈 이떠요.”

강라온이 은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은우는 늘 할 수 있다고 말한다니까. 그러다가 또 응급실에 실려 가면 은우 아빠한테서 전화 온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안 돼.”

이철도 은우를 말렸다.

“은우야 시간이 너무 없는 거 같아. 랩을 하는 것도 좋지만 노래에 비해 랩을 너무 못하면 곡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도 있어. 참, 차라리 객원 래퍼를 쓰는 건 어때요? 슈퍼보이즈한테 부탁하면 되겠네.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은우한테 랩을 가르치는 건 무리니까.”

윤기세가 동의했다.

“그것도 괜찮네요. 객원 래퍼. 그럼 다들 이 곡에 랩이 들어가는 게 더 좋다는 건 동의하시는 거죠?”

이철과 강라온 정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생각했다.

‘내 노래니까 내가 부르고 싶어. 나 혼자서라도 연습해야겠다.’

***

러브파파의 회원인 윤아 아빠는 1인 피켓 팻말을 들고 헌법재판소 앞에 서 있었다.

- 미혼부의 아기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의 권리도 보장하라.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아 헌법재판소 건물로 들어가는 윤경숙 재판관은 생각했다.

‘이번 가족관계법 위헌 소송과 관련해서 세상의 이목이 끊이질 않는군.

챌린지다 뭐다 해서 온 나라가 난리더니 1인 시위도 매일 사람이 바뀌면서 줄지어 나오는 거 같아.

이렇게 세상의 이목을 받는 재판은 판결하기가 껄끄러운데 말야.’

윤경숙 재판관은 스마트폰을 꺼내어 오늘의 스케줄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중학교 2학년인 연아의 중간고사 날이네. 연아가 시험인 걸 알고나 있으려나. 시험보다 조는 건 아닐까?’

연아는 윤경숙 재판관의 막내딸이었다.

곱게 키운 딸이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기를 싫어하더니 1년 전부턴 질 나쁜 친구들과 함께 다녀서 골치가 아픈 딸이었다.

‘어렸을 땐 그렇게 순하고 착하던 애였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비행은 처음엔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거나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점점 비행의 정도가 커져 담배를 피우거나 동급생을 때리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윤경숙 재판관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재판관의 딸이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법을 판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윤경숙 재판관은 연아를 타일렀다.

하지만 연아는 그럴수록 더욱 엇나가기만 했다.

연아는 윤경숙 재판관에게 외쳤다.

“엄만 일밖에 모르잖아. 엄만 늘 인정받았고 늘 칭찬받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창피한 거 아냐? 엄마랑 다르게 공부도 못하고 놀기만 해서. 엄마처럼 공부도 잘하고 칭찬받는 딸을 원했는데 내가 그러지 못해서 싫은 거잖아.”

윤경숙 재판관은 연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어쩌면 난 널 내 기준 안에 넣어서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연아야 엄마의 직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만 하는 직업이란다.

사람들은 손쉽게 판사가 내린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욕하지.

재판관이 된 지금은 하는 판결의 숫자가 줄어들긴 했지만, 엄마가 어떤 판결을 내릴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칭찬을 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단다.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네가 친구를 때리거나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엄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윤경숙 재판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재판소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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