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첫 번째 음반 (1)
창현은 긴장한 모습으로 백인수의 양복점 앞에 서 있었다.
‘어떤 말을 하려고 부르신 걸까? 설마 영탁이 말대로 결혼 얘기를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창현은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는데.’
백인수는 차를 준비하면서 창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백인수는 무거운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양복점 앞을 서성이는 창현을 보았다.
‘뭐하는 거지? 저기서.’
백인수가 양복점의 문을 열고 창현에게 말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창현이 백인수의 양복점으로 들어왔다.
창현이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백인수는 탁자에 놓인 홍삼, 과일 선물세트, 한우 선물세트를 보고 놀랐다.
“뭘 이렇게나 많이 샀어? 명절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보자고 한 건데.”
창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백수희 씨 아버님이니 잘 보여야 할 것 같아서 그랬는데 직접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은우 이야기를 해야겠다. 은우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은우 이야기만 하면 늘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창현이 대답했다.
“지난번에 은우 용돈 주셨단 말도 듣고 해서요. 은우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우야, 워낙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요새 내가 은우 보는 낙으로 살아. 좀 자주 놀러 오면 좋겠는데 은우가 바쁘니까. 할 것도 많고.”
“아니에요. 주말마다 다 같이 밥도 만들어 먹고 하는데 아버님도 오실래요? 은우가 바쁘긴 하지만 가족이 중요하죠.”
“허허허허. 그래. 참 좋구만. 자네들끼리 즐거운데 내가 괜히 끼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백인수가 창현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선물 받은 보이차라네. 중국 운남성에서 온 귀한 것이니 마셔보게.”
창현이 차를 음미하며 말했다.
“향이 참 좋네요. 건강해지는 기분이에요.”
“커피와는 다른 깊은 맛이 있지. 내가 자네를 부른 건 은우가 그린 그림이 전문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고 부른 걸세.”
창현은 놀랐다.
‘백수희 씨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아쉽네. 하긴 아직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더 두고 보고 싶으실 수도 있지. 은우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전에 장미나 선생님께도 들었었는데.’
백인수가 말을 이었다.
“은우가 날 그려준 그림이 좋아서 내가 양복점 쇼윈도에 그림을 붙여놓았었는데 그걸 보고 어떤 분이 명함을 주고 가셨어. 그분이 미술평론가 겸 학익미술관장이신 엄태훈 씨셨어. 그리고 그분의 지인이신 한국대 동양화과 교수 김진태 씨도 은우의 그림이 아깝다고 하시더라고.”
“학익미술관이요? 한국대 동양화과라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전에 미술수업을 받게 했을 때도 미술 선생님께서 뛰어나다는 말을 하셨지만, 예술의 경지에 이르리라곤.”
“나도 몰랐다네. 축복받은 재능이지. 예술에서의 재능은 노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니까. 특히 그림은 그렇다네. 나도 한때 화가를 꿈꾸었었지. 그래서 은우의 재능이 더 아깝게 생각되네만.”
창현은 생각이 많아졌다.
‘은우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당장 음반 발매가 있고 앞으로의 활동도 계속될 텐데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은우가 하고 싶어 해야 할 텐데. 부모라고 강요할 순 없으니까 말이야.’
백인수가 말을 이었다.
“은우가 화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네. 다만 은우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면 은우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그 그림이 대중들에게 소개되면 어떨까 해서. 나도 은우 그림을 매일 보지만 정말 좋거든.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힐링을 이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백인수가 양복점의 선반에 올려두었던 은우의 그림을 가져와 창현에게 보여주었다.
창현은 은우의 그림을 보았다.
‘풍선껌 포장지 위에 연필로 그려진 보리라니. 그런데 표정이 영락없이 보리잖아. 배고플 때의 보리 표정. 너무 생생하다. 어쩜 이렇게 잘 그렸지? 금방이라도 보리가 배고프다고 코로 간식 상자를 가리킬 것만 같은데.
안 본 사이 이렇게 그림이 늘었다니.’
백인수가 미소를 지으며 창현에게 말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 다 비슷한 기분일 거야. 삶이라는 게 참 힘들지 않은가? 때론 외롭고 때론 쓸쓸하고 때론 무섭고.
나도 수희 엄마가 죽었을 땐 한동안 가게 문도 못 열었어. 그래도 수희가 있어서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왔지. 내 나이쯤 되면 말이네. 가끔은 마음속에서 너무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다 소용없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런 사람들에게 이 그림이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마치 다섯 살이 된 것 같아서 말이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말이네.”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섯 살 때로 돌아간 것만 같네요.”
창현은 자신의 다섯 살 때를 회상했다.
‘그때쯤 내가 고아라는 걸 조금씩 인지했던 것 같아. 울어도 안 될 것 같고 떼를 써도 안 될 것 같아서 늘 조용히 지냈지. 명절과 크리스마스 때면 고아원에 과자가 많아져서 좋았지. 평상시완 다르게 먹을 게 많아졌었어.
일 년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크리스마스.
내가 착하게 지내면 산타 할아버지가 나를 루돌프 썰매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거든. 진짜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이 그림은 마치 산타의 양말 같아.’
창현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좋죠. 하지만 은우가 그린 걸 알면 은우 활동에 어떤 영향을 줄지.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소속사와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만약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은우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모르면 어떨까?”
“어떻게요?”
“영국의 미술가 뱅크시라는 사람이 있네. 일부러 나이와 본명을 드러내지 않고 얼굴 없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지. 어쩌면 이름이나 나이 같은 것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고정관념을 주기도 하니까.
예를 들어서 여성 화가가 그린 그림이 너무 선정적이면 사람들이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 것과 비슷하달까?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면 기대하게 된다든지 그런 것들 말이야. 은우가 그림을 언제까지 그릴지 알 수 없으니 이렇게 하면 언제든 그만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창현은 백인수의 제안에 크게 동요했다.
“멋진 생각이네요. 제가 은우에게 말해볼게요.”
백인수가 말했다.
“은우가 허락한다면 내가 다시 그분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네. 은우의 그림을 세상에 소개하고 싶어 하셨거든.”
***
은우는 새로운 곡을 구상 중이었다.
‘강라온 대표님이 타이틀곡 말고도 3-4곡을 더 녹음할 거라고 하셨으니까. 곡이 생각날 때마다 녹음을 해 놔야 해.’
은우는 스케치북을 펴고 생각했다.
‘만들고 싶은 노래는 첫 번째 내 친구 보리에 대한 것. 보리는 나의 소중한 친구니까.
또, 팬들에게 주고 싶은 노래. 팬들이 나를 많이 아껴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또, 어린이집 친구들이랑 태권도장 친구들이랑.
지구를 지키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은우는 자기식으로 스케치북에 필기를 했다.
숫자 1 옆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보리 그림.
숫자 2 옆엔 은우가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글자 중 하나인 재롱이들.
‘롱’은 여전히 리을과 모음 오가 너무 크게 써서 이응이 들어갈 자리가 모자라 점처럼 작은 이응이 되었다.
숫자 3 옆엔 어린이집 친구들의 얼굴 그림과 태권도장 친구들의 태권도 띠가 그려져 있었다.
숫자 4 옆에는 공룡변신 로봇이 그려져 있었다.
은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 일단 오늘은 보리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어. 보리를 보면서 어떤 곡을 만들면 좋을지 생각해야지.’
은우는 태블릿을 켜고 보리의 사진들을 보았다.
- 기어 다니는 은우 옆에서 꼬리치는 작은 강아지 보리.
- 은우의 이유식을 탐내는 강아지 보리.
- 은우가 자기보다 조금 작은 보리를 안고 걸어가느라 낑낑대는 사진.
- 은우의 아기 자동차에 함께 타고 웃고 있는 보리.
- 은우의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든 보리.
- 보리가 배가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자는 포즈를 보고 똑같이 따라 하는 은우.
- 보리가 간식을 먹고 싶다고 몸을 세우고 앞발을 창현에게 주자 옆에서 그런 보리를 따라 하는 은우.
- 은우가 우유를 마시면서 흘리자 우유를 먹고 싶은 보리가 은우의 볼과 입술을 열심히 핥는 장면
- 은우가 부엌에서 밀가루로 장난을 치는데 보리까지 합세해서 둘 다 밀가루 범벅이 된 사진.
- 산책 줄을 물고 와서 은우 앞에 내려놓는 보리.
- 은우와 함께 잔디밭을 달리는 보리.
은우는 사진 속의 보리를 보면서 행복해졌다.
‘사진 속에서 우린 함께 자라고 있구나. 보리야. 네가 내 친구라서 너무 좋아. 보리야. 내 친구가 돼 줘서 정말 고마워.’
은우는 보리를 위한 곡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보리의 털은 부드럽고 따뜻해. 꼬리는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고. 보리는 오후 2시에 만나는 봄의 햇살 같아.’
은우가 키즈폰의 녹음 파일을 누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칭규 보이. 새까먄 코가 너무 기여어.
부드러운 꼬리로 냐를 반기면 냐는 세상에서 갸장 행복햔 샤람.
너능 냐의 초콜릿
너능 냐의 마카롱
너능 냐의 공룡변신로봇
세상에서 갸장 조은 너.
우린 함께 장냐늘 치고
우린 함께 사교도 치고
우린 함께 혼냐고
그래도 너와 함께 이뜨면
모든 거시 추억.
함께 거러온 시간쳐럼
야프로도 냔 너와 함께
따뜨탄 이 빋쏙을 영언히.”
옆에서 노래를 듣던 보리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멍멍(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갑자기 눈물이 나네.)”
은우가 보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따량해. 보이야. 내 칭구.”
***
네고맨의 최지훈 PD는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을 느끼고 고민 중이었다.
‘이제 시즌 1 마무리 촬영 마지막 한 화를 남겨뒀는데 뭘 하지? 마무리니까 뭔가 근사한 걸 보여줘야 할 것 같고.
반응이 좋아 시즌 2까지 하게 된 건 다행이지만. 이번 주에 마무리를 잘해야 시즌 2에서도 시청률이 유지될 텐데.
지난번에 했던 스킨테라피 화장품 전 상품 칠천 원이랑 편의점 맥주 4종에 오천 원이 너무 커서 그 이상을 보여주기가 힘들어.
프로그램의 특성상 네고 의뢰가 들어온 회사 중에서 기획을 잡아야 하니까.’
최지훈 PD는 의뢰가 들어온 회사 목록을 살펴보았다.
- 마루치킨. 양념치킨, 프라이드치킨 기간 한정 20프로 할인 가능.
- 스시 뷔페. 자연애스시. 샐러드바 기간 한정 50프로 할인 가능.
- 화장품 프리미엄 브랜드. 황후애. 아이크림, 아이세럼 기간 한정 30프로 할인 가능.
‘뭔가 참신한 게 없어. 회사도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고민하던 최지훈 PD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초록창을 켰다.
- 미혼부 아기들을 위한 캠페인 송.
귀여운 아기들이 웃고 있는 썸네일에 최지훈 PD의 눈길이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땐 힐링이지?’
최지훈 PD가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 속에서 은우와 어린이집 친구들, 보리가 함께 노래하며 춤추었다.
“냐는 엄마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엄마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아우우우우~~~ 아우우우~~ 왈왈.
냐는 아빠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아빠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아우우우우~~~ 아우우우~~ 왈왈.
우린 모듀 소듕해.
우린 모듀 사랑바꼬 시퍼요.
우린 모듀 행보카고 시퍼요.
우린 모듀 날고 시퍼요.
아우우우우~~~ 아우우우~~ 왈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