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세상을 바꾸는 사람 (5)
보리는 생각했다.
‘이대로 뒀다간 애들이 마카롱을 다 먹어치워서 수녀님과 신부님은 드시지도 못할 거야. 마카롱이 사라진 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더 달라고 울기라도 하면 수녀님이 곤란해지실 거야. 내가 또 나서야겠고만. 오늘은 노래만 하려 했는데.’
보리가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보이며 죽은 척을 했다.
그러자 은우가 외쳤다.
“빵야.”
시우가 관심을 보였다.
“보이 머햔 거야?”
은우가 시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뺭야. 연기하능 거야. 나량 가치 연습해떠. 내갸 뺭야하면 보이갸 뜨러지는 거야.”
시우가 동그란 눈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우아아아아.”
아기들이 보이 근처로 달려왔다.
연아가 말했다.
“뽀이 머띠뎌.”
혜린이가 말했다.
“뽀이 천재.”
은우가 대답했다.
“에이 이 졍도쯤이야. 보이 이따가 우리량 노래도 하꺼야.”
연아가 놀란 억양으로 물었다.
“뽀이갸 노래도 해?”
아기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응, 보이 오늘 우리량 노래하려고 어린이집 온 거야.”
아기들은 마카롱은 다 잊었다는 듯이 말했다.
“우아아아아.”
연아가 말했다.
“나 뽀이량 노래할 거야.”
혜린이가 맞장구쳤다.
“냐두. 냐두.”
아기들은 보리의 근처로 모였다.
은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겹쨍이 토먀토, 토마토.”
보리도 노래를 시작했다.
“아우우~~ 아우우우~”
시우가 말했다.
“뽀이 노래햐네. 와아. 뽀이 노래 자하네.”
연아도 말했다.
“걍아지갸 노래해. 와아. 뽀이 티브이 나가쟈.”
준호가 노래를 따라부르며 박수를 쳤다.
“나는야, 어듀미 무서어.
나는야, 주샤가 무서어.
나는야, 슈영이 무서어.
나는야, 고양이갸 무서어.”
보리는 꼬리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아우우~ 아우우.
왈왈왈왈.”
김마리아 수녀님이 웃었다.
‘보리 덕분에 신부님도 마카롱을 드실 수 있겠네. 근데 마카롱은 정말 위험한 과자인걸. 아기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라. 다음엔 잘 생각하고 줘야겠어.’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은우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듀라. 오늘 우리가 다가치 노래를 부릉 건데. 내가 녹음해 와꺼든. 드러뱌.”
은우가 키즈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냐는 엄마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엄마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냐는 아빠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아빠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우린 모듀 소듕해.
우린 모듀 사랑바꼬 시퍼요.
우린 모듀 행보카고 시퍼요.
우린 모듀 날고 시퍼요.”
김마리아 수녀님은 은우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밝고 예쁜 멜로디 속에 이렇게 슬픈 가사가 들어있다니. 어른들이 미안하다. 은우야. 그래도 이번 헌법 소원을 계기로 법이 바뀐다면 앞으로 미혼부의 아기들의 삶이 훨씬 나아지겠지. 수녀님도 열심히 도와줄게.’
아기들은 신나고 귀여운 멜로디 탓인지 노래를 금방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연아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날갯짓하는 춤을 추었다.
“우린 모듀 날고 시퍼요.”
시우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양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자신을 꼭 안는 춤을 추었다.
“우린 모듀 소듕해.”
은우는 친구들이 하는 춤동작을 기억해 두고 있었다.
‘안무는 친구들이 다 만들어주는구나. 배운 동요 안무들을 여기저기 가사에 녹였네. 너무 귀여워.’
은우가 아기들에게 말했다.
“우리 츔도 가치 해 보쟈.”
은우가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냐는 엄마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엄마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우린 모듀 소듕해.
우린 모듀 사랑바꼬 시퍼요.
우린 모듀 행보카고 시퍼요.
우린 모듀 날고 시퍼요.”
김마리아 수녀님은 은우의 춤을 보며 놀랐다.
‘엄마라는 가사는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동작으로, 슬프지 않아라는 가사는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방긋방긋 웃는 동작으로 표현했어. 소중해는 양어깨에 손을 교차시켜 올리고 어깨를 으쓱으쓱하는 동작으로 표현하고.
마지막에 날고 싶다고 말할 때의 날개 춤이 특히 귀여운데 양팔로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귀엽게 사방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아기들도 금방 은우의 춤을 따라 했다.
김마리아 수녀님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녹화만 하면 되겠네.”
김마리아 수녀님은 길동이 맡기고 간 고프로로 영상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아기들은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은우는 맨 앞에 서서 음정을 잡았다.
“냐는 엄마갸 엄떠요. 햐지만 슬프지 아냐.
냐를 슬프게 햐는 건 나쁜 법.
엄마갸 엄떠도 냐는 소듕해.”
보리도 노래를 부르며 꼬리로 박자를 맞췄다.
“아우우~ 아우우~”
김마리아 수녀님은 아기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이란다. 앞으로도 세상을 비추렴. 아가들아.’
***
종례가 끝나고 교문 밖으로 우르르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이희주는 친구인 김서영에게 말했다.
“서영아 우리 학교도 끝났는데 담배 피러 갈래?”
“아니, 나 오늘부터 담배 끊었어.”
이희주는 웃으면서 김서영의 팔을 끊었다.
“끊긴 뭘 끊어? 야, 담배가 하루아침에 끊어지냐?”
김서영이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끊었다고!”
김서영이 빠르게 걸어서 사라져 버리자 이희주는 옆에 서 있던 정주영에게 말했다.
“야, 김서영 왜 저래? 뭐 잘못 먹었어? 어떤 담배가 맛있냐고 지난주에도 지가 먼저 물어보더니 일주일 만에 왜 저래?”
정주영이 대답했다.
“서영이 아빠가 서영이 혼자 키우셨잖아. 엄마는 집 나가서 안 계시고. 요새 은우가 미혼부 아기들을 위한 챌린지를 하는데 그거 보더니 저래. 서영이 며칠 전에 착한 일 챌린지에 자기 담배 끊었다고 올렸거든. 서영이는 은우가 남 같지가 않나 봐. 서영이는 다 커서 엄마가 집을 나가시긴 했지만 말야. 그래서 이번에 꼭 담배 끊는다고 그러더라고.”
이희주는 머쓱해졌다.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말을 하지. 기지배. 같이 가. 김서영. 이제 담배 피자고 안 할게.”
***
“9시 뉴스입니다. 루게릭병 환우들을 아픔을 함께 느껴보자던 취지에서 시작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기억하십니까? 2014년에 시작된 이 운동은 sns를 타고 급속도로 퍼져 하나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사회적으로 루게릭병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모인 모금액만도 1억 90만 달러가 넘었는데요. 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1123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한국에서도 아이스버킷 챌린지와 유사한 착한 일 챌린지가 시작되었는데요. 착한 일 챌린지는 얼마 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이은우 군이 미혼부의 아기들도 호적을 가지게 해 달라며 가족관계법에 대한 헌법 소원을 청구하면서 시작한 챌린지입니다. 착한 일 챌린지는 특히 sns를 많이 사용하는 10대들 사이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보도에 유진우 기잡니다.”
중학교의 한 교문 앞에 양복을 입고 서 있는 유진우 기자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 경기도의 한 중학교 앞에 나와 있습니다. 착한 일 챌린지가 급속하게 퍼지면서 이 학교 학생들의 흡연율이 줄어들었다는 제보를 받고 온 건데요. 이게 사실인지 직접 학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우 기자가 지나가는 교복 입고 있는 남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안녕하세요. 최근 학생들 사이에 착한 일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흡연율이 줄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이마와 볼에 여드름이 잔뜩 난 검은 피부의 남학생이 화면을 신경 쓰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원래 학교에서 교칙으로 피지 말라고 해도 남자 화장실에서는 계속 담배 냄새가 났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학교 끝나고 밖에 나가서 피는 애들도 있고 전자 담배 피는 애들도 있어서 잡기가 어려웠어요. 전자 담배는 향이 딸기향처럼 맛있는 냄새가 나거든요. 예전처럼 담배 연기나 냄새로는 잡기가 좀 힘들어요. 그런데 애들이 착한 일 챌린지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서로서로 담배 좀 줄이자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 좀 참았다가 어른 돼서 피자고 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좀 많이 바꿨어요.”
카메라가 다시 유진우 기자를 잡았다.
“이번에는 여학생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긴 머리에 화장을 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마이크를 댄다.
“여학생들도 많이 달라졌나요? 착한 일 챌린지로 바뀐 학교 분위기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질문을 받은 여학생의 곁으로 다른 학생들이 얼굴을 들이민다. 다들 카메라에 나오고 싶은 표정이다. 여학생이 친구들을 밀치며 화면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저희 반 같은 경우는 사실 왕따가 좀 있었어요. 애들이 같이 놀기 싫어하는 애들 있잖아요. 눈치 없고 그런 애들. 저도 그런 애들은 싫어하는데. 그래도 저는 그냥 그런 애들이랑 안 놀지 괴롭히진 않거든요. 근데 저희 반에 왕따인 애한테 대놓고 욕하고 물건 숨기고 그런 애가 있어서요. 왕따 당하는 애가 막 울고 그랬어요. 저도 너무 심하다 생각했는데 그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아주다가 저도 왕따가 될까 봐 두려워서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근데 애들이 착한 일 챌린지를 시작하더니 왕따인 애를 괴롭히는 애한테 뭐라고 하기 시작했어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대드니까 괴롭히는 애도 별말을 못 하더라구요. 그래서 반 분위기가 좀 변했어요.”
유진우 기자가 감명받은 듯 말했다.
“대단한 챌린지네요. 착한 일 챌린지가 대한민국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 경기도의 한 중학교 앞에서 유진우 기자였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김철수와 이익섭은 함께 일식집에서 회를 먹는 중이었다.
김철수가 뉴스의 내용을 보며 이익섭에게 말했다.
“이번에 헌법 소원을 한 아기가 챌린지를 하나 보군요.”
“그러게요. 근데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단하네요. 왜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전쟁이 터질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나란 무서운 중2가 있어서 북한군도 못 쳐들어온다고. 무슨 수로 중학생들을 바꿔놓은 걸까요?”
“저 아기가 전에 호적을 받을 때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었다고 하더라구요. 요즘은 청소년들에겐 연예인이 참 대단한 존재인 거 같아요. 얼마 전 빌보드 정상에 오른 탑보이즈 뉴스도 그렇구요.”
“우리 때 연예인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져도 그냥 연예인일 뿐이었는데 말이에요.”
김철수가 두툼한 고등어회에 와사비를 찍으며 말했다.
“시대가 많이 변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법도 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중이고요.”
이익섭이 복지리의 국물을 뜨며 말을 받았다.
“세상엔 변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있는데 말이죠. 저는 변하지 않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우리 판결이 또 세간에 오르내리겠군요. 재판이 이제 얼마 남았죠?”
이익섭이 양복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이제 정확히 이 주가 남았네요. 어떤 판결을 내리든 우리가 대한민국의 가장 상위의 법 기관 아닙니까. 우리의 판결이 곧 법이죠.”
김철수가 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도 딱 그만큼 남았군요. 판결도 판결이지만 괜찮은 판결문을 준비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번 판결문은 어쩌면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볼 것 같으니까요.”
***
한국대 동양학과 교수 김진태의 질문에 백인수는 할 말이 없었다.
‘은우의 나이를 말하면 누구든 당장 보자고 할 텐데. 그랬다간 은우가 이 그림을 그린 아이라는 게 밝혀지고 그렇게 되면 일이 좀 더 복잡해질지도 몰라. 아직은 은우에 대해서 말을 해선 안 돼.’
백인수는 신중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손자에 대한 것은 아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진로와 관련한 것이다 보니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고. 송구스럽게도 제가 아직 저희 딸과 사위에게 손자의 그림에 대한 평가를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손자와 딸 내외가 매우 바쁘기도 했고요.”
엄태훈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말했다.
“지난번에도 그리 말씀하셔서 저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