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카데미 시상식 (5)
저편에서 그레고리가 은우를 알아보고 걸어왔다.
그레고리는 은우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느낌이었다.
‘7살 때 나에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행운이 왔었지. 그땐 너무 어려서 그 행운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던 것 같아. 그 모든 게 당연하기만 했어.
난 내가 하는 거면 뭐든지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마약도 하고. 하지만 그 순간에도 믿었던 것 같아. 언제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말야.
지난 10년 동안 그런 건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은우야. 넌 지금 네가 가진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주변 사람들의 그 기대가 얼마나 고마운 건지 알고 있니?’
그레고리는 은우에게 걸어갔다.
“안녕. 은우야.”
“안녕. 그레고리.”
에릭이 말했다.
“두 사람의 남우조연상 후보가 만났군.”
그레고리가 노래를 불렀다.
“두유 워너 메이크 어 스노우볼~ 두유 워너 메이크 어 윈드.”
은우는 그레고리의 음성이 매우 아름다운 것에 놀랐다.
에릭이 말했다.
“그레고리 노래를 정말 잘하네요. 가수 같아요.”
“은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마약 사건으로 이미지가 벼랑으로 떨어진 후에 어느 무대에서도 절 써 주지 않아서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었어요.”
은우가 놀라서 물었다.
“그레고리가요?”
“그 클럽에선 그레고리라는 내 이름 대신 날 빅 마우스라고 불렀어. 일부러 고음이 들어가는 곡만 골라서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했거든.”
“빅 마우스 재미떠요. 헤헤헤헤헤.”
“언제 너와 함께 노래를 불러보고 싶구나. 은우야.”
“저도요. 횬아.”
***
은우는 자리에 앉아 남우조연상 후보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에는 시상자인 로라가 서 있었다.
로라는 어깨가 드러난 갈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 전에 한 기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보다 남우조연상 시상자가 더욱더 궁금하다. 참 이례적인 일이죠? 배우들은 누구나 주연이 되고 싶어 하니까요.
하지만 전 배우라면 누구나 훌륭한 조연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주연이라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남우조연상 시상자가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수상자는 이은우 군.”
은우는 얼떨떨한 느낌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린다가 은우에게 말했다.
“어서 가. 너의 차례야. 세상 모두가 너의 말을 기다리고 있어.”
은우는 천천히 걸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실감 나지 않아. 내가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다니. 참 아까 크리스토퍼가 45초 동안 수상소감을 말해야 한다고 했는데 뭐라고 하지?’
은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이 안 난다. 아까 한국말로 말해야겠다고 거기까진 생각은 했는데 45초니까 짧게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나. 근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별로라고 생각할까?’
카메라는 은우와 그레고리를 교차하며 비추고 있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그레고리는 은우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은우의 옆에 선 린다가 은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은우야 수상소감은 45초 동안 말해야 해. 시상식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아카데미에선 만든 규칙이야.”
무대에 선 은우는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카메라도 너무 많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시상자인 로라가 말했다.
“은우 군, 수상소감은 45초 안에 말해야 하니 빨리 시작해야 해요.”
***
그레고리는 무대 위의 은우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랬었어.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잘 모르겠을 때가 더 많았지.
내가 아무리 유명해도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던져진 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
아이가 어른의 시간에 맞추는 게 가능할 일일까.
어쩜 그건 어른들의 폭력일지도 몰라.’
그레고리가 무대를 향해 외쳤다.
“은우는 이제 고작 다섯 살이라고요. 예외를 둘 순 없나요? 조금 더 기다려줄 수도 있잖아요.”
관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더 기다려줍시다. 다섯 살이잖아요.”
“아직까지 아카데미엔 다섯 살짜리 수상자가 없어서 45초 안에 말하라고 했을 거예요.”
“맞아요.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로라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방금 운영위원회 측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은우의 나이를 고려하여 시간을 더 주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은우 군.”
은우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그제서야 무대 아래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카메라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상을 받아서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수상 후보자격을 박탈당한 폴이 불쌍하기도 해. 그레고리도 이제야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말야.’
은우가 말했다.
“져는 아기랴서 제 생갸글 모듀 말로 하지 모떼요. 노래를 하게뜸니댜.”
린다가 은우의 옆에 서서 번역을 했다.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어리지만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하고 있어.’
‘과연 어떤 노래를 부를까?’
‘다섯 살에 남우조연상이라. 난 저 나이 때 대체 뭘 했었지?’
은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냐리 이떠쬬.
내 소게 잠든 미윤 마으미 고개를 드느는 그런 냘.
그런 냘 나는 달려떠요.
그런 냐리 이떠죠.
아무도 냐를 이해해 주지 아늘 거만 가던 그런 냘.
그런 냘 나는 달려떠요.”
그레고리는 은우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 노래 알 것 같아. 디즈니 영화였는데 그 얼굴 파란 캐릭터가 펑펑 울던 그 영화. 슬픔, 기쁨, 까칠, 소심 감정들이 싸우는 영화였지. 정말 재밌었는데.’
무대 아래서 그레고리가 영어로 은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There was a day~(그런 날이 있었죠.)”
카메라 감독은 그런 두 사람을 함께 비추었다.
‘정말 감동적이다. 형식적으로 수상자가 후보자를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 정말 다 같이 화합하는 모습이야.’
은우의 노래가 이어졌다.
“유린 모두 완벽햐지 않죠.
노력할 뿐.
먀으믈 여러요.
먀음 소게 여러 감정들
탓하지 마라요.
냐는 댱시늬 마음 속 비밀칭규.”
관객석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은우의 노래를 영어로 따라불렀다.
‘폴이 떠올라. 폴은 미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실수를 한 거지.’
‘은우는 폴마저도 안아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은우라면 내 마음속 어떤 비밀이라도 들어주지 않을까.’
‘저 아름다운 목소리 정말 파리넬리가 살아서 왔군. 은우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파리넬리 같아.’
‘복장까지 저렇게 입고 노래를 부르니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파리넬리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야. 아마 파리넬리도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했을 거야.’
‘이건 아카데미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야.’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순수해. 은우의 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잖아.’
‘노래가 백 마디 말보다 낫군.’
은우의 노래가 끝나고 관객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브라보.”
“브라보. 은우.”
“아카데미여 영원하라.”
“이게 아카데미의 정신이지. 우린 영화를 즐기는 거지. 경쟁하러 온 게 아니잖아.”
***
한국에서도 채널 GGV를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중계되고 있었다.
백인수는 양복점에서 은우의 수상장면을 보고 있었다.
“저게 누구 손자야? 아이구. 장해라. 아이구. 장해. 누구 손자가 다섯 살에 세계 최고의 연기상을 받느냔 말야.”
백수희는 창현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에서 은우의 수상장면을 보고 있었다.
백수희가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면서 외쳤다.
“와, 우리 은우가 해냈다. 우리 은우가 남우조연상이다.”
창현은 너무 기뻐 백수희를 안으며 외쳤다.
“남우조연상. 기립박수.”
두 사람이 신이 나서 안고 뱅뱅 돌았다.
백수희는 생각했다.
‘엇 근데 이건 처음 하는 포옹인데.’
창현도 당황했다.
‘얼결에 너무 기뻐서 안고 말았네. 수희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재롱이들은 채팅방에서 난리가 났다.
- [with] : 방금 보셨어요? 우리 은우 상 탄 거요?
- [광묵] : 상뿐인가요? 노래는 어떻고요? 역시 우리 은우 마음씨가 비단이야.
- [sylv] : 그쳐? 그 노래 폴을 향한 노래 맞죠? 어른 같았으면 미워했을 텐데 자신을 모함한 사람까지도 안아주려고 하는 우리 은우. 진짜 큰 사람이야.
- [에티우] : 저라면 그럴 수 없었을 거 같아요. 그냥 미웠을 거 같은데.
- [인형] :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치만 그게 종교인들도 쉽지 않은 거긴 해요.
- [아가캣] : 어른들이 은우에게 배울 게 진짜 많아요.
- [sug] : 관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쳤어요. 기립박수는 정말 드문 건데. 감동적이네요.
- [까치리] :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어린이집 친구들도 난리가 났다.
혜린이가 외쳤다.
“연기 왕쟈님.”
연아도 혜린이를 따라 외쳤다. 시우, 준수, 지호도 외쳤다.
“멋진 연기 왕쟈님.”
시우가 티비 앞으로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은우 노래 잘햔다.”
지호도 티비 속 은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칭규.”
김마리아 수녀님이 은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장하다. 우리 은우. 감사해요. 하느님. 앞으로도 우리 아가들이랑 행복하고 웃을 일이 많은 거겠죠?’
청와대 민정수석 손경찬도 은우의 수상장면을 보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수상했어. 중간에 폴이 사건을 하나 터트려준 게 은우에게 정말로 유리하게 작용했지. 게다가 은우는 저걸 저렇게 드라마로 만들다니 대단해.
사람들이 원하는 감동이 있는 드라마 말야. 친구의 잘못을 안아주는 그런 이야기.
동화 속에서 잘 등장하는 이야기지.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홈런일 수도 있겠는데.’
손경찬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비서관을 호출했다.
“이은우 군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기념 청와대 초청 만찬 행사를 진행하려고 하니 브리핑하게 피피티 좀 만들어. 자료 준비 철저히 하고.”
다음 날 대통령 주재의 수석, 보좌관 회의가 열렸다.
손경찬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어제 이은우 군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우리 영화계에서는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일 뿐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는 최연소 수상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 축하하는 의미에서 박수 한 번 치고 시작할까요?”
굳어있던 보좌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 짝짝짝짝.
회의실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 경제는 유례없는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무역적자 폭이 늘어나고 있어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에 끼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요.
이럴 때 은우 군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국민에게 준 것 같아 매우 기뻤습니다.”
손경찬이 말했다.
“저도 대통령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제가 은우 군에 대해 잠시 조사를 해 본 결과 은우 군은 미혼부의 아들로 태어나 드라마를 찍으며 호적을 얻었습니다. 호적을 얻는 과정에서 청와대로 국민청원이 들어오기도 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파리넬리 영화를 촬영했고 미국에서 겨울나라 2의 OST를 녹음했죠. 그리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고요. 고작 다섯 살에 말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부활동도 하고 있었습니다. 너투브 수익의 일부를 미혼모와 미혼부를 위해 후원하고 있었고 이번엔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기부도 진행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감명을 받은 듯 말했다.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었군요. 재능 못지않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네요.”
손경찬이 동의했다.
“아마 그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그래서 대통령님께 이은우 군을 초청한 만찬을 건의합니다.”
“만찬이요?”
“친근한 이미지도 가질 수 있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만국 공통이지 않습니까? 대통령님.”
“좋은 생각이에요. 추진해 보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