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카데미 시상식 (4)
미선은 생각이 많아졌다.
‘백수희 씨 아빠신데. 은우가 매우 좋아하는 분이고. 해밀튼 양장점이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곳이긴 한데 나도 거기 옷을 입어본 적은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미선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아주 오랫동안 옷을 만드셨어요. 이번에 은우가 입고 오는 옷은 은우가 도식화를 그리는 데 참여했거든요. 은우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된 옷이에요.”
“역시 은우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에요. 오늘 입은 옷도 너무 멋져요. 내가 처음 구찌에 호랑이, 꿀벌, 뱀을 모티브로 끌어오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다 부정적인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난 우리가 잊고 있던 원시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생명력 말이에요.
은우의 티셔츠에서도 생명력이 넘쳐요. 게다가 공룡은 인간이 살지 않았던 시대에 지구를 지배했었죠. 사람들은 누구나 공룡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요.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히트 친 것만 봐도 알죠.
은우 손등에 저 문신은 뭔가요? 너무나 예술적이에요.”
미선은 생각했다.
‘저건 오백원짜리 풍선껌에 들어있는 스티커인데. 저것도 다 은우가 해서 멋있어 보이는 거지. 아마 이탈리아에도 찾아보면 저런 스티커 붙이고 다니는 아기들이 있을 텐데.’
미선이 말했다.
“은우가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은우는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서요. 본 만화영화를 보고 또 보고 그러거든요. 하루 종일 만화영화 주제가도 부르고요.”
니콜라스가 물었다.
“저 예쁜 노란색 반지는 뭔가요? 어디 브랜드죠? 색깔이 매우 잘 어울리네요. 티셔츠는 파란색, 손등 위엔 보라색, 그리고 반지는 노란색.”
미선은 생각했다.
‘저거 학교 앞 문방구에서 오백 원 하는 반지인데요. 아가들이 다 쪽쪽 빨고 다니는데. 이탈리아엔 사탕 반지가 없나?
이 기회에 공실업이 과자 회사도 인수해서 세계적으로 과자를 만들어서 여기저기 납품하면 좋겠다. 그럼 은우가 좋아하는 공룡변신 로봇이 세계적인 회사가 될 텐데.’
미선이 말했다.
“노란 반지는 바나나 맛 사탕이에요. 사탕 반지는 반지 색깔에 따라 다른 맛 사탕이 들어있거든요. 궁금하시면 먹어보실래요? 은우가 좋아해서 제 주머니엔 늘 사탕 반지가 있어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선이 니콜라스에게 사탕 반지의 포장을 벗겨서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니콜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로맨틱한 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미선도 사탕 반지 하나를 꺼내 손가락에 끼었다.
“전 딸기 맛 사탕이구요. 니콜라스는 은우랑 같은 바나나 맛 사탕이에요.”
니콜라스가 사탕을 먹으며 말했다.
“전 시칠리아라는 섬에서 태어났어요. 매일 바닷가를 뛰어다녔죠. 이 사탕을 먹고 있으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전 강원도에서 태어났어요. 감자를 매일매일 먹었죠. 그래서 지금도 감자는 안 먹어요.”
두 사람은 사탕을 빨며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
백인수는 신문에 난 백수희와 창현의 스캔들 기사를 보았다.
- 드라마가 현실로. 톱스타 백수희 스캔들 하루 만에 소속사 공식적으로 열애 인정.
백수희(33)이 이창현 씨와의 열애를 인정했다. 백수희 측은 이창현 씨와는 ‘내일도 사랑해’ 촬영 당시부터 은우 군의 아버지로 친분을 쌓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급격히 친해진 것은 두 달쯤 전으로 ‘우리 집에 셰프가 왔다’ 촬영 당시 요리를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차 요식업 종사자인 이창현 씨가 레시피 구성 등에 큰 도움을 주며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은우 군을 매개로 지속적인 연락을 하게 되었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만남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을 백수희 씨와 이은우 군의 팬들 역시 응원하는 분위기. 이미 백수희 씨는 ‘내일도 사랑해’ 촬영 당시부터 국민 엄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케미가 현실이 되었으면 하고 팬들도 바라고 있다.
백인수는 기사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랑스럽게 손주 그림이라고 자랑해도 되겠구만. 이전까진 조금 찔렸었는데 말이야.’
***
아카데미 시상식 날의 아침이 밝았다.
은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 풀기 노래를 빨리 다 하고 마카롱을 먹을 거야. 미선이 누나가 마카롱 사 온다고 했는데.’
은우가 노래를 시작했다.
“겹쟁이 마캬룡.
나는야 마캬룡이 조아요.
나는야 마캬롱이 마디떠요.
나는야 마캬롱 마캬롱.”
길동은 잠결에 은우의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몸은 조그만데 먹는 건 정말 좋아한단 말이지.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저런 식으로 노래 가사가 제 맘대로 바뀌지만. 은우의 아침 노래는 사실 그날의 메뉴 선정 노래 같다니까.’
은우의 목 풀기 노래가 끝날 때쯤 미선이 마카롱을 들고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이야. 마캬롱이댜.”
은우가 마카롱을 보고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실컷 먹어. 30개나 샀으니까. 근데 은우야 오늘 아카데미 시상식 끝나고 나면 또 파티가 있어서. 거기 마카롱도 있고 스테이크랑 맛있는 거 많이 있을 텐데.”
“또 머글 슈 이떠요.”
“그래, 또 먹으렴. 살은 안 쪄서 다행이다. 요즘은 보이그룹들도 다이어트 하느라 난리인데 우리 은우는 아가라 다이어트가 없네. 많이 먹어.”
은우는 볼이 미어지게 마카롱을 입 안에 넣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마카롱을 매일 먹어야지. 길동이 형아랑 백수희 누나한테 마카롱 맛집을 알아놓으라고 해야겠어.’
마카롱을 10개 먹었을 때 은우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다.
-끄윽.
은우가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미선이 웃었다.
“많이 먹더라니. 있다가 밥도 먹어야지. 매일 마카롱만 먹으면 안 돼. 은우야.”
길동이 잠에서 깨어 욕실로 가면서 말했다.
“은우 식탐은 날 닮았어. 은우야 식탐은 나쁜 게 아니야. 좋은 거야. 삶의 낙이라니까. 인생이 얼마나 즐겁다고. 내일은 내일의 메뉴!”
은우가 웃었다.
“마자요. 횬아.”
***
은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LA의 돌비극장에 도착했다.
은우는 백인수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리무진에서 내렸다.
은우는 레드카펫을 밟고 걸어가 포토존에 섰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포토존 앞에서 은우는 양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머리 옆에 붙였다.
“꼬먀김치~ 치즈~ 김뺩~”
사진을 찍던 기자들은 생각했다.
‘저건 무슨 구호지. 발음이 굉장히 특이하네. 한국어인가?’
‘포즈가 너무 귀엽다. 토끼 같기도 하고. 표정은 딱 강아지인데.’
‘너무 해맑아. 저렇게 귀여운 아기 스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지.’
‘전 세계의 팬들에게 은우를 알리는 날이 될 거 같은데.’
구찌의 디자이너 니콜라스는 은우의 옷을 보며 감동하고 있었다.
‘로코코 양식을 잘도 재현했네. 화려한 프릴과 레이스를 달았으면서도 기품 있어 보여. 또 그게 은우의 귀여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파리넬리는 신이 내린 목소리란 칭호를 받았던 사람. 순수함과 성스러움이 아우라처럼 퍼진다.
옷이 날개라더니 잘도 만들었네. 미선이 저 옷의 도식화는 은우가 그린 거라던데 대체 저 아기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고 나온 턱시도 중에 저렇게 등장인물을 잘 표현하면서도 배우 특유의 개성을 잘 살려준 옷은 없었어.
저 옷을 만든 사람도 대단한 솜씨의 소유자임이 분명해.
프릴과 레이스의 원단이 각각 달라. 턱시도와의 어울림을 생각했단 증거지.
누굴까? 저 옷을 만든 한국의 디자이너는?’
백인수는 티비로 은우를 보고 있었다.
“잘한다. 우리 은우.”
은우가 레드카펫 위에서 포즈를 잡자 백인수는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아무도 없는 양복점 안에 백인수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인수는 은우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기 위해 가게 밖에는 금일 휴업 팻말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은우가 입으니까 정말 멋지구나. 은우 덕에 이 백인수가 만든 양복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구나.”
백인수는 이 순간 자신의 인생이 전과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탓에 돈을 버는 일로만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위해 옷을 만든다는 것도 가슴 설레는 일임이 틀림없어. 저 옷 은우에게 정말 잘 어울려. 오늘 은우는 정말 꼬마 파리넬리구나.’
은우가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 에릭과 크리스토퍼도 차에서 내렸다.
기자들이 외쳤다.
“세 사람 다 이번 아카데미 후보자가 되셨으니 포즈 한 번 부탁드립니다.”
거리에 서 있던 팬이 외쳤다.
“위대한 목소리 팬이에요. 위대한 목소리 아카데미 3관왕 갑시다.”
에릭이 은우를 안았다. 크리스토퍼가 은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었다.
은우는 볼 옆에 브이자를 대고 밝게 웃었다.
“파리넬리 대뱍.”
사진을 찍던 기자들은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의 은우도 너무 귀여운걸.
근데 저 브이 표시를 계속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서 보여주는데 저건 대체 무슨 포즈지. 한국 사람들만 하는 포즈인가.
사진 찍을 때 했던 구호도 바꿨는데 한국 사람들은 사진 찍을 때 다양한 구호를 넣는 걸 좋아하는 걸까.’
레드카펫을 벗어나 은우와 에릭, 크리스토퍼가 나란히 걸었다.
크리스토퍼가 에릭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너랑 은우는 오늘 상을 받을 거 같아.”
“자네도 작품상 후보잖아. 감독으로서 가장 큰 명예인데.”
“그치. 하지만 난 그닥 기대하지 않거든. 다른 감독들이 워낙 쟁쟁해서. 주제가상이나 남우조연상은 우리 영화가 받을 거 같은데 말이야.”
“난 자네도 받을 거라고 생각하네.”
은우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소감을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말하지?
이거 참 어렵네. 전 세계 사람들이 날 본다고 생각하니.
그레고리가 받을 거 같긴 하지만.
근데 만약 그레고리가 받으면 그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야.’
에릭이 크리스토퍼에게 물었다.
“만약 작품상을 받으면 수상소감은 뭐라고 할 텐가?”
“수상소감을 고민할 필요나 있나? 주어지는 시간이 45초뿐인데. 게다가 사람들은 지겨워할 거라고. 길게 수상소감을 말해봤자. 난 전 술을 마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이렇게 말할 거야.”
“자네다운 말이군. 정말로 자넨 내일 아침까지 술을 실컷 마실 수 있을 것 같아.”
“자넨 뭐라고 할 건가?”
에릭이 근심에 잠겼다.
‘만약 받게 된다면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감사할 사람도 너무 많고 45초라니 너무 가혹해.’
에릭이 크리스토퍼에게 물었다.
“꼭 45초 안에 모든 걸 말해야 하나?”
“뭐 4분 동안 말한 사람도 있긴 하지. 그 입 큰 여자 배우 줄리아가 그랬는데 자긴 티브이 수신료를 내고 있으니 정당하게 말해도 된다면서 4분 동안 얘기했어. 근데 사실 별말 한 건 없었다니까. 절반은 웃고 절반은 울고 이러다가 끝났어.”
“그렇군.”
“에릭, 만약 4분 동안 말하고 싶다면 말이야. 줄리아처럼 어떤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야.”
은우는 고민했다.
‘45초 동안 뭐라고 말하지? 게다가 난 생각에 비해 말로 표현하는 게 서툰데. 말도 느리고.’
은우가 물었다.
“에릭, 크리스토퍼. 한규긴 수샹자가 이떠떠요?”
크리스토퍼가 대답했다.
“남우조연상 후보로는 처음이고. 한국인 배우 중에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사람은 없어. 작년에 감독상을 받은 박만대 감독이 있었지. 근데 그 박만대 감독도 이미 칸 영화제 후보로 오른 적도 있고 세계적으로 입지가 꽤나 대단한 감독이었거든. 너처럼 첫 작품으로 후보에 오른 일은 진짜 드물어.”
은우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상을 받게 된다면 꼭 한국어로 말할 거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들려주고 싶어. 우리 나라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지 말야. 린다와 함께 올라가면 린다가 통역을 해 주겠지?
근데 어렵다. 45초 동안의 수상소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