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카데미 시상식 (1)
“와아 이쁜 샤진 만탸.”
“멍멍(거봐. 신세계라니까.)”
“냐두 이쁜 샤진 마냐.”
은우는 창현의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다.
‘어, 이건 아빠랑 백수희 누나랑 같이 글램핑 갔을 때 갔던 사진이네.
이날 진짜 재밌었는데.
호빵도 먹고 백수희 누나가 가져온 과자도 잔뜩 먹고.
이날 처음으로 팝핑 캔디를 먹었지.
팝핑 캔디는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 상 줘야 한다니까.
백수희 누나는 정말 재밌어.
장난도 잘 치고. 날 위해 재밌는 것도 준비해 오고 말이지.’
어느새 은우는 그날을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아, 이건 내가 찍은 사진이네.
백수희 누나랑 아빠가 같이 앉아 있는 뒷모습.
역시 잘 나왔다니까.
별 사진도 생각보다 잘 나왔다.
역시 키즈폰이랑은 카메라가 비교가 안 된다니까.
이래서 내가 스마트폰이 필요한데 말이지. 아빠는 스마트폰도 안 사주고.
아빠, 제가 이래 봬도 인생 3회차예요.’
은우는 백수희와 창현이 함께 앉아 있는 사진을 보다가 실수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그때 창현이 은우를 불렀다.
“은우야, 아빠랑 같이 가방 확인해야지. 너 내일 출국하잖아.”
은우는 창현의 스마트폰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거실로 나갔다.
“뺘뺭. 비행기요”
“그래. 비행기. 짐 잘 챙겨야지.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는데.”
창현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은우를 바라보았다.
“넹. 아빠.”
창현이 은우의 공룡변신 로봇 캐리어를 열었다.
“속옷, 양말은 요기 밑에 투명 지퍼에 넣었어. 네가 좋아하는 캐릭터 잠옷이랑 티셔츠. 시상식 때 입을 턱시도는 길동이 형아가 가지고 있으니 걱정 말고. 여긴 은우가 좋아하는 팝핑 캔디랑 스키틀즈 신맛. 필요한 거 있음 길동이 형아한테 말하고 아파도 참지 말고 말해야 해. 지난번처럼 아프면 안 되니까.”
“니에 니에 니에 니에.”
***
백인수는 학익 미술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미술관 규모가 크네. 여기 있는 작품만 해도 족히 만 점은 넘을 거 같은데. 명함을 준 분이 대단한 분이신가 보네.’
백인수는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떴다.
‘아마 내가 들고 온 그림들을 보면 더 놀랄 거야. 내가 양복점 앞 쇼윈도에 걸어놓은 그림보다 오늘 들고 온 그림 속에 은우의 개성이 더 살아있으니까.
대가라면 이 그림을 못 알아볼 수가 없지.’
백인수는 입구에서 안내인에게 말했다.
“엄태훈 씨와 선약이 있어서 왔는데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관장님은 오 층 관장실에 계십니다. 제가 그리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안내해 드리죠.”
백인수는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관장실 앞까지 갔다.
-똑똑똑
백인수가 문을 두드리고 관장실로 들어갔다.
엄태훈이 백인수를 향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새로 들어온 좋은 보이차가 있는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커피를 좋아하시면 커피도 있습니다.”
“보이차 좋죠. 한 잔 부탁드립니다.”
엄태훈이 고풍스런 다기에 보이차를 따라 백인수의 앞에 놓았다.
백인수가 말했다.
“향이 참 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차라 대만에서 늘 가져와서 마시고 있습니다. 귀한 차인데 제 청을 잊지 않고 들어주셔서 감사의 의미로 대접하는 겁니다.”
“잘 마시겠습니다만, 저의 손자의 일이라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림이 아까워서요.”
백인수는 말을 아꼈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 그림을 나만 볼 수는 없다고. 이 감동을 나만 가질 수는 없다고.
하지만 아직 은우의 입장은 정해지지 않았어. 난 절대 그 점을 잊으면 안 돼.
은우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그때 은우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지.’
엄태훈이 말했다.
“부담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연배시니 아시겠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가슴 뛰는 일이 없어져요.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도 요즘은 습관적으로 보고 있질 않나 그런 생각이 들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우연히 양복점 앞에서 그림을 보았을 때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건 평론가로서가 아니라 그림을 좋아하는 한 명의 애호가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백인수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은우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잊고 있었던 설렘. 잊고 있었던 열정. 당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나 보군요.’
백인수가 말했다.
“제 손자는 아직 어려서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할아버지라서 그런지 손자의 그림을 자랑하고 싶군요.
오늘 이 자리는 그냥 할아버지가 손자의 그림을 자랑하러 온 개인적인 자리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엄태훈이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도 손자가 있습니다만 절 닮았는지 말은 잘하고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평생 평론계에 있으면서 화가들을 동경해 왔는데 그림 잘 그리는 손자를 두시다니 천하를 다 얻으신 것 같으시겠어요.”
엄태훈의 덕담에 백인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림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하고 외국어도 잘한답니다. 얼마나 귀엽고 착하고 예쁜지 몰라요.’
백인수가 가방을 열어 은우가 그린 그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엄태훈이 은우의 그림을 보물지도 들 듯 소중히 들었다.
“이 그림은 마치 이중섭 화백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군요. 가난한 화가가 도화지가 없어서 담배를 싼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풍선껌 종이 위의 강아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백인수가 말을 보탰다.
“여기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기들 그림도 보세요. 꽃게와 아기들을 그린 건데 아기들 표정이 얼마나 천진난만한지.”
엄태훈도 신이 나서 말했다.
“투박한 듯하지만, 이 선이 또 참 절묘하게 뻗어있죠? 이렇게 사물을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는 게 쉬운 듯 보여도 참 어려운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대가들은 이런 걸 잘했던 사람들이고요.”
백인수가 과자 상자에 그린 그림을 집으며 말했다.
“이건 과자 상자에 그린 건데 이 그림도 참 좋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털모자를 쓴 아기를 다른 아기가 업어주고 있는 그림이에요. 두 아기는 모두 작아 보이는데 말이죠. 이걸 보는데 왜 그렇게 울컥하던지.”
엄태훈이 말했다.
“어쩌면 이건 은유일 수도 있겠군요. 진짜 업었다기보단 친구를 위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어요. 완벽하게 계산된 선들이 아닌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네요.”
“제가 이 그림을 가져오기 전에 며칠 동안 방에 두고 보았는데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하고 깨끗해져요.”
“이런 그림을 만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사실 현대의 미술은 더 이상 발전시킬 기교가 없죠.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기교로 그린 그림보다 마음을 적시는 그런 그림을 만나고 싶더라구요. 혹시 손자분께서 그림을 전문적으로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저에게 찾아와서 그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탁입니다.”
백인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건 저에게도 기쁨이지요. 그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요. 가끔 이렇게 차나 마시면서 그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제 삶의 기쁨이 하나 더 늘었네요.”
***
여대생 이연주는 카톡 프로필을 바꾸기 위해 별스타를 검색하고 있었다.
‘백수희 언니가 내 워너비니까 백수희 언니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해야지.
내년엔 꼭 성형 수술을 해서 백수희 언니처럼 예뻐질 거야.
백수희 언니는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예쁘고 연기도 잘하고 돈도 많고.’
이연주는 백수희의 이름으로 뜬 사진 중 백수희와 창현이 함께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뭐지? 이 사진. 드라마 속 장면인가?
아니야. 내가 백수희 언니 팬이라서 백수희 언니가 나온 프로는 다 봤는데 이런 프로는 없었는데. 이 남잔 누구지? 잘 생겼다.
근데 설마 이거 백수희 언니 남자친구인 거야?’
이연주는 깜짝 놀라 백수희의 팬카페 ‘아이수희’에 접속했다.
이연주는 자신이 찾아낸 백수희와 창현의 사진을 올리면서 글을 썼다.
- 별스타에서 백수희 언니의 일상 사진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사진 속에 모르는 남자와 백수희 언니가 함께 웃고 있네요. 사진 보면 글램핑장 같은데 둘이 여행이라도 간 걸까요? 백수희 언니 그동안 스캔들 한 번 없었는데 이거 스캔들인 걸까요?
글이 올라가자마자 수많은 답글이 달렸다.
- 백수희 언니 스캔들이라고요? 세상에 언니가요?
- 백수희 씨도 스무 살이 아니라고요. 이제 서른이 넘었는데 스캔들도 날 수 있죠. 내일도 사랑해에서는 아기 엄마 역할도 맡았었잖아요. 그런 나이예요.
- 요새 만혼이 유행이라고요. 백수희 씨 아직 젊어요. 시집가지 마요. 백수희 씨보다 10살이나 많은 나도 아직 시집 못 갔는데.
- 아니 스캔들도 스캔들인데 우리한테 숨긴 거예요, 저걸? 지난번 팬미팅 때도 우리한테 남친 없다고 했단 말이에요. 이건 배신이야. 배신.
- 전 내일도 사랑해 재밌게 봐서 그런지 언니가 시집가서 은우처럼 예쁜 아기 낳는 것도 좋게 생각되는데. 은우랑 언니 케미가 정말 좋았잖아요. 왠지 언니 시집가서도 아기 잘 키울 거 같지 않아요?
- ‘베이비가 돌아왔다’ 나오면 재밌겠어요. 근데 왠지 백수희 언니는 은우랑 있는 게 너무 익숙해 보여서 은우 말고 다른 아기랑 서 있는 게 상상이 안 돼요. 맞다. 은우 슬프겠어요. 백수희 언니 진짜 좋아하는 거 같던데.
- 누나, 은우를 위해서라도 남자친구는 안 돼요. 누나 저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야죠. 저 이러다가 탈영할지도 몰라요.
- 윗분 진정하세요. 릴렉스. 릴렉스. 탈영은 안 돼요. 그러다 인생 망해요.
- 백수희 누나 남자친구라니. 잠이 안 와요. 꿈에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팬카페에는 다양한 반응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연예일보 기자 심유종은 인터넷 실검에 잡힌 백수희 남자친구라는 키워드를 보았다.
‘이건 뭐지? 백수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심유종은 생각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팬카페일 테니까 팬카페에서 읽은 정보를 종합해서 기사를 쓰는 게 좋겠어. 디스파치 쪽에서도 듣지 못했던 정보니 이건 팬카페 정보란 소리니까.
이럴 줄 알고 내가 미리 가입을 해뒀지.’
심유종은 오랜 연예 일보 기자 생활 덕에 연예인 팬카페 100개에 가입된 상태였다.
심유종이 로그인하여 백수희 팬카페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오호라. 이게 최초로 발견한 사람의 글이군. 별스타에서 찾아낸 정보긴 한데 이미 팬들이 사진 속 글램핑장이 어딘지까지 찾아냈군. 정말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발 빠르다니까. 정보력이 미국 CIA도 울고 갈 정도야.
사진 속 남자는 이창현? 은우 아빠라고?
이은우. 이번에 남우조연상 후보가 된 그 이은우.
이거 메가히트급 스캔들인데.
드라마가 현실이 되다. 드라마 속 엄마가 현실의 엄마로.
헤드라인도 쫙쫙 뽑히고.’
심유종은 이창현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언론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군. 열정 체인을 가지고 있는 데다 연 매출 50억을 달성한 청년 사업가. 기부도 많이 했고 여러 가지 선행 사실도 있고 취미는 노래. 노래 실력은 은우와 함께 전국노래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수준급. 영화배우 뺨치게 생긴 외모에. 가만있어 봐? 아기 아빤데 나이가 왜 이렇게 어려?
연하남. 연상녀 커플이네. 요즘 트렌드에도 딱 맞잖아.
대중이 원하는 커플이군.’
심유종이 웃음을 지으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올려진 이 사진 한 장뿐이니 이 사진을 쓰도록 하고 최대한 동선을 훑어볼까? 가만있어 봐. 혹시 모르니 디스파치 쪽에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있는지 물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