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83화 (83/257)

83화. 생일잔치 (4)

길동은 캘리그라피 일일 수업에 참여 중이었다.

‘여기는 온통 여자뿐이네. 은우 생일 선물 만들어주기 정말 험난하구나. 그냥 고기를 구워줄 걸 그랬나. 보니까 갈비뼈 통째로 사서 구워 먹는 게 인기던데.

하아. 캘리그라피는 나에게 너무 무리한 것이었나. 자꾸만 땀이 나네.’

길동은 책상 아래에 숨긴 손수건에 계속 땀을 닦고 있었다.

긴 머리를 올려 묶고 목선을 드러낸 니트를 입은 캘리그라피 선생님이 말했다.

“캘리그라피는 글자에 마음을 담는 거예요. 글자에도 표정이 있거든요. 문구 선정도 중요하지만, 글자 배치도 중요하고 어떤 색깔을 선택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맘에 드는 그림이나 사진 위에 캘리그라피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수업이 끝날 때쯤엔 각자 작품을 하나씩 들고 나가실 수 있으실 거예요.”

수강생들이 박수를 쳤다.

긴 원피스를 입은 20대의 여대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전 남자친구랑 백 일이라서 백 일 이벤트로 캘리그라피 할 건데요. 제가 똥손이라서, 잘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캘리그라피는 생각보다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서요. 많이 보고 자꾸 써보면 늘어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기뻐할 것 같은데요.”

옆에 있던 50대의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부럽네. 남자친구랑 백 일이라니. 난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해 보려고 왔는데.”

옆에 있던 30대의 새댁이 말을 이었다.

“전 우리 아들 생일 선물 해 주려고요. 도장도 파 주고 싶고 해서 요새 여러 개 배우고 있어요.”

길동이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생일 선물을 만드는 건데. 우리 은우 생일 선물이요.”

50대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있어서 입에 풀칠을 했나 그랬더니만 그래도 말을 하네. 긴장 풀어요. 총각.”

“하하하하하하하.”

수강생들이 다 같이 웃었다.

여대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방금 은우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까 어디선가 본 듯한데 혹시 이은우 매니저 아니세요? 그 근육 미남?”

30대의 새댁이 말했다.

“이번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이은우요? 이은우 매니저세요? 우리 애가 은우 너무 좋아하는데. 세상에나 이런 곳에서 유명한 분을 만나다니 영광이에요.”

50대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은우. 은우 알지! 백수희랑 드라마 나왔었잖아. 내일도 사랑해. 내가 그 드라마를 얼마나 재밌게 봤다고. 보다가 펑펑 울고 웃고. 준호 땜에 내가 주말 밤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래도 은우가 호적이 생겨서 참 다행이야. 근데 총각, 총각이 은우 매니저가 맞어?”

길동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에. 제가 은우 매니저 맞아요. 은우가 유명하지 제가 스타도 아닌데 유명하다고 해 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여대생이 말했다.

“근데 은우 생일이에요?”

길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 생일인데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어서 신청했어요. 저도 만들기는 영 꽝이라. 너투브 보고 따라 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돼서요. 학교 다닐 때도 미술을 그렇게 못 했는데. 너무 어려워요.”

30대의 새댁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하나씩 만들면 되지. 은우 생일인데 우리도 선물하고 싶어요. 매니저님이 잘 전달을 해 주시면 되겠네요.”

캘리그라피 선생님도 말했다.

“저도 은우 팬이에요. 은우 이번에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가 됐던데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4살짜리 남우조연상 후보는 없었을 거라구요. 우리 모두가 은우를 응원해요. 은우가 수상하길 응원하는 뜻에서 저도 하나 멋지게 만들어 드릴게요.”

50대의 아주머님도 웃으며 말했다.

“나는 두 개 만들어줄게. 치매 예방이니 좀 좋아. 은우가 남우조연상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 대한민국의 영광이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큰 배우가 나온다는 게 말이야.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그런 배우가 있으면 정말 좋겠어.”

여대생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늘 주인공은 백인들만 맡고 동양인 배우는 조연 아니면 설 데가 없잖아요. 동양인도 주연 맡았으면 좋겠어요. 은우 이번에 남우조연상 받고 몇 년 뒤엔 남우주연상 받아보자. 아자!”

30대 새댁이 말했다.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탑 보이즈도 빌보드에서 1위 했잖아요. 자랑스러운 한류.”

길동은 생각했다.

‘캘리그라피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좋은데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

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카데미 집행 위원회 사무실로 올라가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를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치만 변호사에게 미리 물어본 바로는 잘 피해 가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어. 그 파티에서 누군가 내 목소리를 녹음하지 않은 이상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

만약 책임을 묻는다면 나도 똑같이 맞소송을 해 줄 거야.

얼마 만에 오른 남우조연상 후보인데.’

폴은 어젯밤 받은 리디아의 전화를 떠올렸다.

리디아가 말했다.

“최악의 경우는 후보 박탈도 논의될 거야. 대니얼이 알렉스에게 물어서 대충 분위기를 알려줬는데 지금 위원장인 노아가 노발대발하고 있고 다른 위원들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고. 생각보다 사건이 너무 커져 버렸어. 이젠 언론에서까지 다루려고 하고 있다고.”

폴은 마음속으로는 지난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때 조니의 생일 파티에 가지 말 걸 그랬어. 괜한 질투심에. 하지만 이미 돌리기엔 늦었으니 끝까지 잡아떼야만 해.’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집행 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폴은 긴장한 마음을 숨긴 채 집행 위원회 사무실로 걸어갔다.

세라가 폴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폴. 우린 저쪽 사무실에서 대화를 하게 될 겁니다.”

세라가 폴을 복도 끝 사무실로 이끌었다.

“앉으세요.”

세라가 의자를 가리켰다.

폴은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 사무실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가 녹화되고 있겠지. 아마도 안 보이는 곳에 카메라가 있을 거야. 절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돼.’

세라가 물었다.

“이 주일 전 조니의 생일 파티에 리디아와 함께 갔었죠? 거기서 벤과 피터, 레너드, 제니, 클레어, 페니와 대화했구요.”

폴은 생각했다.

‘CCTV를 다 훑었네. 저렇게 정확하게 사람 이름을 줄줄 외는 걸 보면. 이미 그들의 증언도 다 받아놓았을 거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른다밖에 없어. 이제부턴 정말 연기를 해야겠어.’

세라가 물었다.

“당신이 파티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당신이 이은우 군과 은우 군의 소속사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어요. 사실인가요?”

폴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술이 많이 취해서 기억나지 않네요. 죄송해요.”

세라가 다시 물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우린 조니로부터 CCTV 테이프를 받았어요. 당신이 잡아뗀다고 해서 달라지기 힘들단 소리예요.”

폴이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술이 정말 약해요. 아버지가 저에게 물려주신 유전자 때문에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걸요. 근데 그날은 기분이 좋아서 맥주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아시겠지만 제가 영화제에서 후보에 올라간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고 있으시다면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아버진 유명한 배우셨는데 아들놈은 계속 무명이었으니까요. 제가 제대로 된 아들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아버진 곁에 안 계시니.

그날따라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폴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휴지를 찾아서 폴에게 건네고 있었다.

세라는 생각했다.

‘폴이 파티에서 만난 모든 사람의 증언이 일치해. 폴이 파티에서 이은우 군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트렸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런데 만약 폴이 정말로 술이 많이 취해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폴을 남우조연상 후보에서 제외시키는 건 지나친 일일지도 몰라.’

***

백수희는 은우의 손을 잡고 한옥으로 된 고깃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은우가 고깃집을 보며 소리 질렀다.

“와아, 궁젼 가타요.”

백인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우리 조상들의 궁전이 이런 모습이었을 거야. 은우 덕분에 좋은 곳도 와 보는구나.”

은우가 말했다.

“져 오늘 칭규들한테 왕관 바다떠요.”

백수희가 말했다.

“은우 좋았겠네. 친구들한테 왕관도 받고. 은우 이제 왕이 된 거야?”

“칭규드리 저보고 연기 왕쟈님 대라고 그래떠요.”

“멋지다. 연기 왕자님. 월드 스타에 이어 연기 왕자님 가나요? 새로운 애칭으로?”

백인수가 웃으며 말했다.

“연기 왕자님에 이어 그림 왕자님도 되겠네.”

백수희가 물었다.

“그림 왕자님요?”

백인수가 아차 싶은 듯 말했다.

“은우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세 사람은 한옥 방으로 안내돼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커다란 나무 상에 반찬이 놓이기 시작했다.

은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반챠니 너뮤 마냐요.”

백수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은우 생일이잖아. 생일엔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지. 눈나가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여기 온 거야.”

백수희가 한복을 입고 반찬을 내려놓고 있던 종업원에게 말했다.

“전화로 부탁드린 것도 가져다주세요.”

“네에.”

종업원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상 위에 놓인 20가지가 넘는 반찬에 정신을 잃었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고 저것도 맛있어 보이고 맛있어 보이는 게 너무 많아. 처음 보는 음식도 많네. 근데 나 결정 장애인데 뭐부터 먹지?’

은우가 망설이고 있을 때 종업원이 은우 앞에 소고기미역국과 아기용 포크와 수저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많이 먹어요.”

“네에.”

은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백수희가 말했다.

“은우 너 또 표정이 딱 뭐 먹어야 할지 모를 때 나오는 그 표정인데.”

은우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누나가 추천해 줄게. 여기 탕평채도 맛있고 식전 죽이라고 주는 삼계죽도 맛있어. 호박찜도 맛있고.”

은우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눈나 체고.”

은우는 먼저 탕평채의 맛을 보았다.

‘말랑말랑하고 물컹물컹한데 짭조름하면서 달달하네. 김도 묻어 있는데 너무 맛있잖아. 이래서 백수희 누나가 맛있다고 했구나.

근데 이거 미끌미끌해서 잘 안 집어지는데 칼국수처럼 돼 있어서 포크 사이로 자꾸 빠져나가.’

은우는 탕평채 접시에 얼굴을 대고 수저로 탕평채를 입 안으로 넣고 있었다.

백수희가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맛있어? 눈나가 도와줄게. 연기 왕자님이 그렇게 먹으면 어떻게 해?”

백수희가 수저로 탕평채를 떠서 은우의 입에 넣어주었다.

백인수는 은우의 먹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아기새처럼 작은 입을 잘도 벌리네. 은우 먹는 거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잘 먹으니 얼마나 예뻐.’

곧이어 종업원이 소갈비를 들고 왔다.

숯불 위에 소갈비가 구워지고 있었다.

“와아, 마디께따.”

은우가 탕평채를 입에 가득 넣은 채로 말했다.

백인수가 은우에게 말했다.

“친구들한테 생일 선물 뭐 받았어?”

“왕과니량. 색종이 모겨리량 트로피요.”

“멋진 친구들이구나. 우리 은우 상 받으라고 줬나 보네. 할아버지도 은우 생일 선물 준비했지.”

“하뷰지도요?”

은우가 음식을 씹다 말고 깜짝 놀라 물었다.

“은우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어.”

백인수가 쇼핑백에서 은우의 초상화를 꺼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