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남우조연상 후보가 되다 (1)
은우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보리가 옆에서 물었다.
“멍멍(오랜만에 그림 그리게?)”
“응, 하부지에게 션물하려고.”
은우가 보리에게 말했다.
“보이야, 검색해 뱌. 해밀튼 양장졈. 백인슈.”
“멍멍(아라떠)”
보리가 검색한 내용을 은우에게 보여주었다.
“이걸료 해야게따.”
은우가 백인수의 사진을 옆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스 그림의 여신 에우테르페의 모방 23/1000]
“멍멍(진짜 똑같다. 다시 봐도 이 재능은 참 엄청나.)”
은우가 그림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하부지가 조아하게찌?”
“멍멍(나도 그려준다고 했잖아. 내 그림은?)”
“아라떠. 너도 그려주께.”
은우는 백인수를 다 그린 뒤에 보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멍멍(맘에 든다. 이걸 내 집 앞에 걸어둬야지.)”
“마메 든댜니 다행이다.”
은우는 스케치북의 새 장을 펼쳤다.
“멍멍(뭘 또 그리려고?)”
“하부지가 어떤 오슬 입꼬 십냐고 해서. 좀 그려서 가려고. 내갸 생각한 게 이떠.”
은우는 파리넬리였던 시절에 입었던 의상과 비슷한 의상을 입고 싶었다.
‘그려지지가 않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런가. 그런데 그 사진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에우테르페의 재능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그릴 수 있구나.
레벨업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혼자서 1000이라는 숫자를 다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려야 하지?’
은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최대한 검색을 해서 비슷한 의상을 찾아봐야지.’
***
은우는 백수희의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리는 공룡 변신 로봇.
햐늘가 땅을 지켜 지구를 지켜
우리는 할 뚜 이떠.
잘할 뚜 이떠.
피웅피웅피웅.
슉슉슉슉”
백수희는 은우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은우야, 그 노랜 무슨 노래야?”
“이버네 광교 찌그면서 제갸 만드러떠요.”
“노래를 만들었어? 우리 은우 천재네. 노래를 어떻게 그렇게 금방 만들어?”
“시니 나서 만드러떠여. 시니 나면 막 떠올라요.”
“우리 은우 아카데미 남우조연상도 받고 나중에 작곡도 해서 주제가상도 받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헤헤헤헤.”
은우는 생각했다.
‘백수희 누나랑 있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 나를 많이 챙겨주고 아껴주고 늘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 내가 부르는 노래 제목도 궁금해하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 주고. 누나가 너무 좋아.’
백수희가 말했다.
“근데 은우야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을 옷을 아빠 양복점에서 맞추기로 한 건 누구 생각이야?”
“제갸 생가캐떠요. 지냔버네 눈나랑 가치 입어떤 오시 너뮤 마메 드러서요.”
“고맙네. 은우가 입어주면 아마 세계적인 옷이 될 텐데.”
“하부지 솜씨갸 너무 조아요.”
차가 양복점 앞에 도착하고 은우는 백수희와 함께 내렸다.
은우가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부지.”
“은우 왔구나.”
백인수가 반갑게 은우를 맞이해 주었다.
“보고 시퍼떠요.”
은우가 백인수에게 안겼다.
백인수는 은우를 안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아직 손자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이런 기분인가. 따뜻하고 귀엽고 뭔가 뭉클한 그런 기분? 보고 싶었다는 말은 들어본 지가 언제지.’
은우가 공룡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하부지. 션무리 이떠요.”
은우는 자신이 그린 백인수를 펼쳐 놓았다.
백인수는 그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 그림을 은우가 그렸다고?
나와 너무 똑같은데. 이건 거의 사진과 유사한 그림이잖아.
어떻게 이걸? 혹시 은우는 그림 천재이기도 한 건가?’
백인수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지.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으면 나도 화가가 되었을 텐데.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께서 내가 화가가 아니라 양복점에 취직한다고 했을 때 많이 말리셨는데.
가끔 지나간 꿈이 아쉬워서 그림 전시회에도 가곤 하지만 그 아쉬움을 달랠 수는 없었어. 날 닮았는지 수희도 그림을 잘 그렸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백인수는 은우의 그림 실력이 마치 자신을 닮은 것만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은우야 너무 잘 그렸구나. 고마워.”
“헤헤, 다행이에요. 져도 기부니 조아요.”
은우가 밝게 웃었다.
백인수가 은우에게 물었다.
“혹시 학원 같은 거 다니니?”
백수희가 백인수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빠, 은우는 그냥 천재라고요. 학원 같은 거 안 다녀도 다 잘한다니까요. 연기도 혼자서 했는데 잘하고, 아까 오는 차 안에서는 노래도 불렀는데 노래도 자기가 신이 나서 지은 거라고 하더라구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서 한다니까요.
다니는 학원은 태권도장뿐이라고요.”
은우는 순간 뜨끔했다.
‘장미나 선생님이 나한테 미술을 가르쳐 주긴 했는데. 그건 그냥 정식 그림보단 아기 미술 같은 거긴 했지만. 근데 이 분위기에서 그 말을 했다간 백수희 누나가 난처해지겠지?’
백인수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난 그냥 신기해서. 누가 보면 은우가 니 아들인 줄 알겠다. 은우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자랑을 해대니.”
백수희가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그, 그건 누가 봐도 은우가 대단하니까 그런 거죠. 누가 저 나이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가 되겠느냐고요.”
은우는 생각했다.
‘백수희 누나가 난처하지 않게 빨리 화제를 바꿔야겠어.’
은우는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넘기며 말했다.
“하부지, 제가 의샹 그려떠요.”
백인수는 은우가 그린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은우가 그린 그림에는 마네킹이 그려져 있었다.
‘마네킹의 부분을 확대해서 입고 싶은 의상을 그렸구나.
목에는 화려한 레이스를 그렸고 소매에는 프릴이 있네.
남자 의상치고 상당히 화려한 게 마치 로코코 시대의 옷 같은데.’
백인수는 은우의 그림을 보며 물었다.
“은우야, 이렇게 의상을 그린 이유가 있니?”
“쥬인공이 사라떤 시대를 알려주고 시퍼서요.”
백인수는 은우의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네 살짜리 아기가 로코코 시대에 대해 찾아봤단 말인가? 배우의 기본은 자기가 연기한 인물을 제대로 아는 거긴 하지만. 의상에 대한 것까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 줄이야.
넌 정말 내 맘에 쏙 든다.’
백인수는 은우가 너무나도 이뻐 보였다.
“할아버지가 네가 그린 그림대로 열심히 만들어 줄게. 아카데미에 가서 미국 배우들에게 기죽지 않도록 이 백인수 이름 석 자를 걸고 영혼을 갈아 넣어 보마.”
백인수는 결심했다.
‘양복쟁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옷도 예술이다. 내가 비록 미술을 접고 양복을 만들고 있지만, 예술에 대한 내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어.
은우가 입고 이 옷을 입고 아카데미에 나간다면 내 옷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알려질 기회를 얻는다는 거지.
꼭 잘 만들고 말 거야.’
백수희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 의욕이 없어 보이셔서 갱년기인가 하고 생각하며 걱정했었는데. 오늘 보니 아빠 의욕이 넘치시네. 역시 아빠는 일할 때가 멋있으셔.
은우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 줘야겠네. 아빠가 저렇게 기뻐하시니.’
백수희가 백인수와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가 원하는 의상 방향도 알려줬으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어디로 갈까요?”
백인수가 말했다.
“은우가 먹고 싶다고 하는 거 먹으러 가자. 저기 앞에 돈까스집 있는데 아기 있는 젊은 부모들이 많이 가더라.”
백수희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 언제 그런 것도 보셨어요?”
백인수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생각했다.
‘지난번 은우가 다녀간 뒤로는 이상하게 아기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생각이 나서 식당도 보고 아기들이 쓰는 장난감도 살펴보고 그랬지. 자꾸 눈이 가더라.’
백수희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돈까스 먹으러 갈래?”
“네에.”
은우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
백인수와 백수희, 은우는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백수희가 종업원에게 말했다.
“치즈 돈까스 두 개랑 왕 돈까스 하나요.”
은우가 백인수를 보고 웃었다.
“하뷰지.”
백인수와 백수희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가 작은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백인수에게 날렸다.
“따량해요.”
백인수는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 애교는 뭐지? 대체? 미워할 수가 없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데 너무 귀엽잖아.’
백수희가 말했다.
“은우야, 눈나한테는 사랑한다고 안 하고 하뷰지만 사랑해? 눈나 서운하다. 엉엉.”
백수희가 우는 흉내를 냈다.
“아니, 아니, 눈나도 따랑해요.”
은우가 백수희에게도 손하트를 날렸다.
백수희가 우는 흉내를 멈추고 고개를 들으며 웃었다.
“안 울었지롱?”
“아이, 눈나. 아가를 놀리면 어떠케 해요.”
“미안해요. 눈나도 사랑한다는 말 한번 듣고 싶어서 그랬지?”
은우가 머리 위로 두 팔을 뻗어 큰 하트를 만들어 백수희에게 날려주었다.
“눈나, 하늘만큼 땅만큼 따랑해요.”
“아악, 내 심장. 눈나 죽는다.”
백수희가 쓰러지는 흉내를 냈다.
백인수는 그런 백수희를 보며 생각했다.
‘예민한 구석도 있고 늘 조용하기만 해서 걱정했는데 우리 수희가 이렇게 밝은 아이였나. 은우랑 같이 있더니 많이 웃고 성격도 많이 변한 것 같네.
은우를 보니 친구들이 손주 자랑하는 게 이해가 가네.
매일 손주 보러 간다기에 무슨 재미인가 했는데 바로 이 재미를 말하는 거였어.’
은우를 보며 생각이 많아지는 백인수였다.
“돈까스 나왔습니다.”
알바생이 돈까스를 내려다 주었다.
백수희가 은우의 돈까스를 자르면서 알바생에게 말했다.
“앞접시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백수희는 자른 돈까스를 은우의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많이 드세요. 월드 스타님.”
은우가 잘린 돈까스를 포크로 집어서 입 안에 넣으며 말했다.
“눈나가 짤라주니까 더 마디떠요.”
백수희가 은우의 볼은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디떠서 다행이예요.”
백인수가 자신의 돈까스를 잘게 잘라 은우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그건 치즈 돈까스고 이건 왕돈까스니까 왕돈까스도 맛 좀 보렴.”
은우가 빵빵해진 볼에 백인수가 잘라준 왕돈까스를 하나 더 넣으며 말했다.
“왕돈까스도 마디떠요. 하뷰지.”
은우는 생각했다.
‘지난번에 백수희 누나랑 아빠랑 글램핑 갔을 때도 좋았지만, 이렇게 백수희 누나랑 할아버지랑 같이 밥 먹는 건 또 다른 느낌이네.
할아버지도 자주 보면 좋겠다.’
***
은우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의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은 대한민국 영화계를 뒤집어 놓았다.
영화 배급사인 KJ 엔터테인먼트는 난리가 났다.
홍보팀장이 말했다.
“우리 영화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어.”
사원 김길우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전 은우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요.”
사원 김혜란도 맞장구쳤다.
“은우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다고요. 저는 파리넬리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요.”
이 대리도 맞장구쳤다.
“이번에 나온 겨울나라 2 OST는 들어보셨어요? 팀장님. 은우는 어딜 가든 블루칩입니다. 무엇이든 살릴 수 있어요. 흥행 보증 수표.”
홍보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말하다 보면 나만 나쁜 사람 된 것 같다니까. 나도 좋아한다고 은우를. 내가 맡은 직책이 이렇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가서 그렇지. 나도 은우 좋아해.”
이 대리가 과장된 몸짓으로 안경을 뺏다 다시 끼며 말했다.
“팀장님이 좋아하는 배우가 있으셨어요? 생각도 못 했네요. 늘 그렇게 객관적으로 데이터만 강조하셔서 말이죠.”
홍보팀장이 부끄럽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보니까 아카데미 심사위원들도 은우에게 넘어간 거 같은데. 그건 그렇고 은우가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 넥플릭스 측에 위대한 목소리 프로모션 넣어 달라고 요청해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김혜란이 동의했다.
“프로모션뿐이겠어요. 온 나라가 들썩들썩할걸요. 기억하십니까? 우리나라가 월드컵 8강에 올랐을 때, 박태환 선수가 수영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전 국민은 함께 그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은우가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온 국민이 응원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