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5)
미국 LA의 사무엘 골드윈 극장은 이른 시간부터 영화 관계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영화 신문 기자인 루시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올해의 아카데미상 최종 후보는 누가 될까?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은 누가 받게 될까?’
루시는 두 눈을 반짝이며 아카데미 집행 위원회의 위원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위원장 노아가 후보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나왔다.
“올해도 우리 영화계는 풍성했습니다. 여기 제가 든 종이에 적힌 이름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죠. 먼저 작품상 후보입니다.”
루시는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킨 채 작품상 후보를 받아적고 있었다.
‘맨하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홀리데이즈, 진주만 공습, 일병을 구하라.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네.’
작품상에 이어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후보 발표가 끝나고 남우조연상 후보를 발표할 때였다.
‘위대한 목소리 이은우? 이 배우는 누구지? 동양인인가?
사실 바쁘다 보니 올해 나온 모든 영화를 찾아보진 못했는데.
동양인이라면 후보엔 오를 수 있어도 최종수상자가 되기는 힘들 거야.’
루시는 이름을 적기만 하고 흘려넘겼다.
할리우드의 남자 배우 그레고리는 방금 노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었다.
‘드디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군.’
그레고리는 머릿속에서 자신의 30년 연기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역스타로 7살 때 이미 세상의 모든 부와 명성을 다 거머쥐었던 그였다.
‘크리스마스에 만난 도둑 산타는 정말 대단한 인기였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그 영화가 나오곤 하니까. 아역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중 그렇게 많은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후의 그레고리의 삶은 온통 내리막길이었다.
‘너무 많은 돈이 화근이었지. 내가 갑자기 많은 돈을 벌게 되자 부모님은 직장을 그만두셨고, 서로 더 많은 돈을 가지겠다고 싸우다가 결국 이혼하셨지.
사춘기 시절 너무 외로웠던 나는 마약을 시작했고 내 인생을 돌릴 수가 없었어.
마약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만 10년의 인생을 허비해야 했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던 20대 후반, 그러나 연기 경력이 끊긴 그를 다시 써주려는 감독은 없었다.
‘다들 날 부담스러워했지. 대중에겐 내가 여전히 크리스마스에 만난 도둑 산타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면서.
게다가 그 후에 만들어진 마약 중독자 이미지 역시 내가 연기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됐고.’
그레고리는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는 파파라치들이 미웠다.
‘다시 단역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올 때까지 정말 힘들었다.’
그레고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됐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니. 이번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그레고리는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너무 늦게 마음을 열어 죄송했어요. 살아계실 땐 그렇게 원망만 했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그리워요. 그런데 그 뒤론 꿈에도 잘 나타나시지 않네요. 혹시 이번에 상을 받게 되면 나타나 주실까요?’
***
길동은 태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길동아, 너 미국 갈 일 생겼다.”
“미국이요? 또요?”
길동은 깜짝 놀랐다.
‘머리털 나고 은우 덕분에 처음 가본 미국에 또 갈 수 있다는 것인가? 역시 은우 매니저 하길 잘했지. 우리 월드 스타 클래스는 참.’
길동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형님, 또 어디서 우리 은우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연락이라도 왔나요?”
“아니, 그거보다 훨씬 좋은 거. 너 나한테 무조건 밥 사야 돼.”
“밥이요? 아니 형님이 저보다 훨씬 연봉도 세신데 왜 제가 밥을 사야 하나요? 형님이 사셔야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니가 은우 매니저 된 거 대표님께 내가 너 추천해서 된 거거든. 내가 추천 안 했으면 미국도 못 갔을 테니까 말이야.”
“형님, 저한텐 그런 말 안 하셨으면서. 그럼 제가 걸그룹 매니저 못 된 게 형님이 저를 추천하셔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래. 그래서 이렇게 지금 아카데미 시상식도 가 보잖니?”
“아카데미 시상식요? 은우가요?”
길동은 아카데미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아카데미라니. 할리우드 진출 정도가 아니라 아카데미라니. 4살에 아카데미에 가는 우리 은우. 은우야 정말 내가 널 만난 건 천운이야.’
길동이 말했다.
“밥 사드릴게요. 형님. 상만 받으면 밥 매일 사드릴게요.”
“오버하긴. 한 번이면 됐다. 매일 얻어먹을 것까진 아니고. 은우가 위대한 목소리 영화로 남우조연상 후보가 됐어. 상을 받을지 아닐진 모르지만, 사실 후보에 오른 것도 한국 배우 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미 커다란 의미가 있을 거라고 대표님이 그러셨어.”
“그럼요. 그럼요. 남우조연상이라니? 근데 아역상이 아니라 남우조연상요?”
“아역상은 1960년 이후 아카데미에서 폐지된 상이야. 아카데미에는 아역상이 없어.”
“그럼 우리 은우가 그 쟁쟁한 어른 배우들과 겨뤄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그래. 매우 드문 일이고. 만약 받게 된다면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되는 거지?”
“이얏호!”
길동은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아흑.”
태현은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깜짝 놀랐다.
“너 무슨 일 있냐? 김길동? 김길동.”
길동은 신이 나서 너무 높이 뛰는 바람에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 죽을 것같이 아프다. 죽을 것 같이 기쁘다가 죽을 것같이 아프네.’
길동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너무 높이 뛰어서 천장에 부딪혔어요. 제 몸은 무쇠인데 천장에 구멍 안 난 게 다행이죠.”
“하하하하하. 기쁠 일이긴 하지. 대한민국의 어떤 매니저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보겠어. 나도 너 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은우 매니저 할 걸 그랬어. 너 추천하지 말고.”
“밥은 매일 사드릴게요. 팀장님. 전 그럼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보겠습니다.”
길동은 운전석에 앉아서도 룰루랄라였다.
‘은우가 상을 타면 어린이집 친구들한테 선물을 돌리고, 태권도장 친구들한테도 선물을 돌리고, 명석이한테도 선물을 보내야 하고. 소아암 병동 친구들 중 그때 만난 친구들은 연락처를 모르니 현재 입원해 있는 친구들에게라도 선물을 보내야 하나.
아, 선물값 많이 나오겠다.
그러면 어때? 아카데미라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 따라가면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아, 그 섹시한 여배우 샤를로즈도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친구들한테 자랑하면 다들 사인받고 싶다, 사진 한 장만 찍어 와라 난리겠지?’
여러 가지로 꿈에 부풀어 있는 길동이었다.
벨이 울렸다.
‘누구지?’
은우가 인터폰 근처로 갔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아이 안 닿네. 가만있어 봐. 의자가 어디 있지?’
창현이 인터폰을 누르고 말했다.
“길동이네. 어서 와.”
“와아, 길동이 횬아다.”
길동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우가 길동의 다리에 매달렸다.
“잘 있었어? 우리 월드 스타님. 오늘 형아가 좋은 소식 가지고 왔다.”
길동은 은우를 안아 목마를 태웠다.
“은우는 세계 최고.”
“하하, 횬아 어지러어요. 진짜 높다.”
190센티의 길동 위에 있자 은우는 2미터 높이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천장에 부디치거 가타요.”
길동이 은우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영탁과 창현이 길동을 맞아 주었다.
“형님, 식사 중이셨습니까?”
“식사했어?”
“저야 먹었어도 늘 또 먹을 수 있는 거 아시잖습니까? 제 위는 위대합니다.”
“밥만 푸면 되니까 이리 앉아.”
길동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역시 맛집 사장님들 식탁이라 다르네요. 고등어 김치찜 냄새가 예술입니다. 잘 먹겠습니다.”
길동이 젓가락을 들고 전투적으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영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요리 당번이어서. 치즈 계란말이는 은우가 다 먹어서 새로 만들어 줄게.”
“고등어 김치찜. 비린내도 안 나고 딱 좋은데요. 형님. 영탁이 형님도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창현이 젓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영탁이도 요리 잘해. 예전엔 주로 영탁이가 요리를 해줬었는데. 내가 요리를 못해서 말이야.”
길동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창현이 형님이 요리를 못할 때도 있었습니까? 전 태어나서부터 요리를 잘하신 줄 알았습니다.”
“원래 못 했었는데 은우가 태어난 뒤로부터 잘하게 된 것 같아.”
영탁이 부침개를 뒤집으며 말을 보탰다.
“맞아. 좀 이상하긴 해. 분명히 요리를 못했었는데 말이지. 은우가 태어난 뒤부터 잘하게 됐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도깨비시장에서 물건 팔 때, 그때부터 잘하더라구.”
길동이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로 은우가 복덩이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먹느라 깜빡했네요. 오늘 제가 온 게 은우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걸 알려드리려고 온 건데.”
영탁은 깜짝 놀라 계란말이 하려던 계란을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다.
창현은 젓가락을 식탁 위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아카데미?”
“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최연소후보입니다. 우리 은우가요.”
길동이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영탁이 그제서야 그릇 대신 쓰레기통에 넣은 계란을 발견했다.
“내 계란.”
영탁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깝지만 버려야겠지. 하아, 은우 얘기에 너무 놀라서.”
은우는 생각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라. 좋은 기회네. 백수희 누나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
은우는 백인수의 양복점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다.
“멍멍(내가 전화번호 검색했어. 487-197○이야. 어서 걸어봐.)”
“아라떠.”
은우가 집 전화기로 백인수의 전화번호를 눌렸다.
“해밀튼 양장점입니다.”
“하부지. 저예요. 은우.”
백인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놀랐다.
“은우라고?”
백인수는 생각했다.
‘네 살밖에 안 됐다던데 혼자 전화도 걸고 대단하네. 은우가 나에게 전화를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은우가 말을 이었다.
“하부지. 제갸 이버네 아카데미에 가서요. 상 바드려요. 그때 하부지 양보글 입고 시퍼서요. 이버네 시샹식 때 이버떤 게 너뮤 맘에 드러떠요.”
“아카데미 시상식이라고?”
백인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에 간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카데미라고? 내가 맞게 들은 거 맞나? 은우가 거짓말할 애는 아니지만, 너무 어마어마해서.’
백인수가 말했다.
“옷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치수는 지난번에 재서 알고 있으니 어떤 스타일로 입고 싶은지 생각해 보겠니?”
“네. 하뷰지.”
백인수는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범상치 않은 아이야. 인사성도 밝고, 똑똑하고. 게다가 아카데미라니. 그건 재능만으론 안 되는 거 같은데. 하늘에서 내린 아이인 걸까.
우리 수희가 참 예뻐하더니 보통 아이가 아니야.’
은우는 전화를 끊고 창현의 휴대폰으로 백수희에게 전화했다.
“눈나, 저 오늘 하부지 양복져메 가기로 핸는데 가치 걀래요?”
“양복점에?”
“아카데미 시상시게서 이블 옫 맞추려고요.”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샹 후보예요.”
“남우조연상이라고?”
백수희는 깜짝 놀랐다.
‘모두가 꿈꾸는 꿈의 무대에 한국 배우 최초로 은우가 간다고? 출연한 영화도 딱 한 편뿐인데?’
백수희는 너무도 놀랐다.
“은우야 정말 네가 후보가 됐어?”
“길동이 횬아가 그랜는데, 남우조연샹 후보라고.”
“축하해. 축하해. 은우야. 우리 은우 정말 대단하다. 양복은 누나가 맞춰줄게.”
“아직 바든 거또 아니예요. 눈나.”
“후보에 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누나가 더 분발해야겠다. 누나는 아카데미 근처에도 못 갔는데.”
“누나는 연기대상에서 여우주연상 받았잖아요.”
“그치, 은우 덕분에. 사실 그것도 대단한 일이긴 해. 전엔 내가 연기를 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얼굴만 예쁘기만 한 배우라는 말에 자격지심도 생겼었는데. 너랑 내일도 사랑해 찍으면서 많이 바뀐 거 같아. 내 일을 정말 사랑하게 됐어.”
백수희는 생각했다.
‘가끔 은우랑 얘기하다 보면 이렇게 이상하게 내 맘속의 말들을 너무 많이 터놓게 된다니까. 아기라서 그런지 사람을 무장해제 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