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4)
아카데미 집행 위원회는 남우조연상 후보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위원장인 노아가 말했다.
“회원들의 투표 결과, 정말 동양의 이 4살짜리 아기가 1위인 것 맞나요?”
위원인 스티븐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500표가 넘는 득표를 했습니다. 오십프로가 넘는 지지를 받았어요.”
위원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최종 후보 5명에 등록되겠군요. 그런데 이 아기는 전작이 없더군요. 이게 첫 작품이던데요.”
위원인 알렉스가 말했다.
“네 살에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도 네 살 때까진 한 편도 없었는데요. 찍은 영화가.”
알렉스는 웃었지만, 다른 위원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위원들 사이에 불안한 시선이 오고 갔다.
위원인 스테파니가 말했다.
“위원장님 생각처럼 여러 가지로 아카데미의 명성에 우려가 될 상황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원칙을 깨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문별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후보자를 선정하고 최종 후보를 선발해 왔습니다. 그것은 아카데미가 1929년부터 지켜온 원칙입니다.”
위원장인 노아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원칙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난 우리가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스테파니 위원의 말대로 회원들의 뜻을 무시할 수도 없죠.”
위원인 세라가 말했다.
“아직 걱정하시긴 일러요. 최종 후보에 등록되긴 하겠지만, 아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과거에도 최종 후보 등록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가 정작 수상하지 못하고 미끄러진 적도 많았고요. 최종 후보는 같은 배우 회원의 지지뿐 아니라 감독이나 작가, 음향감독 등 다른 부문의 회원에게서도 지지를 받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쉽지 않을 거예요.”
스티븐도 동의했다.
“맞아요. 모든 영화인들의 소원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한 번 받아보는 것입니다. 네 살에 후보에 오른 것만 해도 저 아기는 영광스러워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떨어지더라도 저 아기의 인생에 영광이 되겠죠.”
세라가 말했다.
“전 너무 다들 나쁘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저 영화를 보았는데 은우라는 아기의 연기는 정말로 대단했어요. 왜 다들 은우의 나이만 보고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우리 모두에게 네 살이란 시기가 있었어요. 네 살이 없이 갑자기 서른 살이 되고 오십 살이 되진 않죠? 네 살에만 할 수 있는 연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은우는 네 살의 파리넬리를 정말로 훌륭하게 연기했어요.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 저는 네 살 은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 축복이었어요.”
스테파니도 동의했다.
“정말로 연기를 잘했어요. 무엇보다 그 노래는 한 번 들으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죠. 저도 OST 음원을 구입했거든요. 제 인생에 몇 안 되는 영화음악으로 기억될 거예요. 위대한 목소리는요.
그리고 전 은우를 후보에 올리는 것이 우리 아카데미의 명예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카데미는 그동안 백인들의 잔치라는 오명을 받아왔어요. 실제로 수상자 중 유색인종의 비중이 10프로도 되지 않죠.
은우는 아카데미가 다른 인종에 배타적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위원장인 노아가 말했다.
“은우를 최종 후보에 넣도록 하세요.”
***
창현이 토치로 나무에 불을 붙였다.
백수희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나무에 불 피우는 거, 학교 다닐 때 캠프파이어 이후로 처음이에요. 초등학교 때였나?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도 했던 거 같네요. 이젠 가물가물해요.”
“저도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이에요.”
“따뜻하다. 운치도 있고 좋은데요.”
백수희가 불에 손을 쬐며 말했다.
창현은 준비해 온 고구마를 쿠킹호일에 말아서 불 위의 판 위에 올려놓았다.
“군고구마 맛있겠어요. 참, 구워 먹을 거 또 있는데.”
백수희가 가져온 과자 상자를 열더니 쫀드기를 꺼냈다.
창현이 쫀드기를 보자마자 외쳤다.
“쫀드기다.”
“창현 씨도 쫀드기 알아요?”
“저도 초등학교 때 많이 사 먹었어요. 학교 앞 문구점에서요.”
백수희가 과자 상자에서 호박꿀맛나와 옥수수맛 맛기차콘을 꺼냈다.
“이것도 구워 먹으면 맛있을 거예요.”
“수희 씨 덕분에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거 같아요.”
은우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머예요? 눈나?”
창현이 꿀맛나를 하나 입에 넣으며 말했다.
“불량식품이라는 건데 맛있어서 아빠도 좋아했었어. 아빠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빠갸 어려쓸 때요?”
은우는 창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아빠에게도 초등학생 시절이 있었다는 거지? 아빠는 어떤 아이였을까? 상상이 안 돼.’
은우는 창현이 자기처럼 작았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빤 늘 나에게 믿음직스런 사람이었으니까. 아빤 태어날 때부터 지금 이 모습이었을 것만 같아.’
어느새 창현과 백수희는 함께 불량식품을 열심히 굽고 있었다.
은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아빠랑 누나랑 많이 친해진 거 같은데. 내 계획대로 잘 돼가고 있어. 역시 사람은 자주 봐야 친해지지. 그래야 좋아지고. 그래야 연애도 하게 되는 거지. 아빠처럼 매일 일만 하면 평생 혼자 살게 된다니까.’
은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찍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야. 찍어두고 나중에 심심할 때 봐야지. 그런데 키즈폰은 카메라가 너무 안 좋아. 가만있어 봐라. 아빠 폰이 어딨지?’
은우가 간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창현의 스마트폰을 꺼내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역시 잘 나와. 폰은 역시 키즈폰보단 스마트폰이야.’
창현이 백수희에게 말했다.
“와, 이것도 있네요. 톡톡 터지는 사탕. 이거 이름이 뭐죠?”
“팝핑캔디래요. 재밌죠?”
“우리 때보다 모양이 예뻐졌네요. 곰모양이네. 우리 땐 그냥 동그란 모양만 있었던 거 같은데. 이거 은우한테 줘 볼까요?”
“은우가 놀라지 않을까요?”
백수희는 금세 은우를 걱정하는 표정이 되었다.
“은우는 장난꾸러기라 아마 재밌어할 거예요.”
창현이 팝핑캔디를 가져다가 은우 앞에 내밀었다.
“은우야 이거 맛있는 건데 먹어볼래?”
“우아, 사턍이다.”
은우는 신이 나서 사탕의 포장지를 벗겼다.
‘사탕에 가루가 많이 묻어 있네. 가루는 딸기 맛인가.’
은우가 사탕을 입에 넣었을 때 입안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이건 뭐지? 어어어어어어.
입안이 정신이 없어. 어어어어. 입 안에서 무언가 계속 터진다.
입에 전기가 통하나. 찌릿찌릿한데.’
은우는 몸이 고장 난 사람처럼 사탕을 문 채 가만히 있었다.
백수희는 은우가 걱정돼서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은우야, 괜찮아? 괜찮아? 이상하면 빨리 뱉어.”
은우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이거 많이 이상하네. 그런데 자꾸 톡톡 튀기는 게 재미있네. 이상한 만큼 재미있네. 입이 톡톡톡톡. 입 안에서 연주회가 시작된 거 같잖아. 너무 재밌어.
갑자기 조용해 졌다. 왜 그러지?’
은우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탕을 빼서 바라보았다.
‘아, 가루가 다 사라져서 그런가 보다. 그 가루는 어디 갔지? 가루가 없으면 소리가 안 나나?’
은우가 백수희에게 말했다.
“눈나, 소리 나는 갸루 더 엄떠요?”
창현이 웃으며 말했다.
“거봐요. 좋아할 거라고 그랬잖아요. 은우는 장난치는 거 좋아해요.”
백수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행이다. 걱정했어. 그 가루 봉지 안에 더 들어있어. 누나가 봉지 안 버리고 잘 뒀어.”
백수희가 사탕 봉지에 있는 가루를 더 묻혀 주었다.
은우가 사탕을 먹으며 말했다.
“톡툐기 사턍 재미떠. 가져가서 칭구들한테 자량해야지.”
신나 하는 은우였다.
창현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벌써 7시네. 더 늦게 먹으면 안 좋으니까 이제 고기를 구워야겠다.”
백수희는 생각했다.
‘촬영이 없는 날은 편한 시간에 식사를 하곤 했는데 창현 씨는 안 그런가 보네. 이것도 건강 때문인가? 하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하긴 하던데.’
백수희가 창현에게 물었다.
“전 더 늦게 먹기도 하는데. 정말 규칙적인 거 같아요. 생활 습관이요.”
“아기 때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 키도 잘 자라고 건강하다고 해서요. 이건 은우를 위해서예요.”
백수희는 창현의 말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았다.
‘아기를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아기에게 맞춰야 할 것들이 더 많아. 역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나도 은우에게 더 잘 해줘야겠다.’
백수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제가 상추라도 씻을까요?”
“다 씻어왔으니까 저기 상자에 든 거 놓아두시기만 하면 돼요. 반찬도 다 있어요.”
창현이 고기를 굽고 백수희가 나무 탁자 위에 반찬을 놓았다.
그 광경을 보며 은우는 생각했다.
‘너무 행복하다. 백수희 누나는 아빠랑 다른 느낌으로 나를 감싸주는 것 같아.
함께 하는 저녁 식사라니. 매일매일 이렇게 저녁을 먹었으면.’
창현이 구운 고기를 탁자 위로 가져왔다.
백수희가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밥 먹자.”
“네에. 엄마”
은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엄마라고 말해 버렸다.
순간 백수희와 창현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은우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눈나를 잘못 말해떠요. 헤헤.”
은우가 웃자 백수희와 창현도 따라서 웃었다.
“맛있게 먹어. 은우야.”
백수희가 은우의 밥 위에 구운 고기를 얹어 주었다.
“마디떠요.”
“창현 씨, 이 고기 어떻게 구웠어요? 맛이 다른 거 같은데.”
“미리 숙성시킨 고기예요. 미리 양념을 해서 숙성시켰어요. 지금이 딱 맛있을 시간이죠.”
“와아 그런 것도 있어요? 역시 맛집 사장님은 다르네요.”
“요리가 별 게 아니에요. 사람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게 있잖아요. 식재료도 서로 어울리는 게 있고 아닌 게 있고.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어울리는 식재료와 어울리지 않는 식재료를 알게 돼요.”
백수희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창현 씨, 제가 우리 집에 셰프가 왔다라는 프로에 나가게 됐는데요. 요리를 너무 못해서요.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요리 좀 가르쳐 주실래요?”
은우는 백수희의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이제부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될 것 같은데.’
창현이 백수희에게 대답했다.
“그럼요. 수희씬 똑똑해서 금방 배울 것 같은데요.”
백수희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다. 좋은 말을 해줘서.’
백수희가 말했다.
“이렇게 불 보고 멍하니 있는 것도 좋네요. 맛있는 밥 먹고 이야기도 하고요. 그리고 많이 웃고.”
“덕분에 저도 즐거웠어요. 추억 여행 온 기분이에요. 호빵도 그렇고 불량식품도 그렇고.”
백수희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울을 조금 벗어났는데도 이렇게 별이 잘 보이네요. 별이 참 많다.”
“별 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몇 년 동안은 바빠서 하늘 자체를 안 보고 산 거 같아요.”
백수희가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그랬던 날들이 있었어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어요.”
순간 창현은 백수희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은우는 생각했다.
‘역시 아빠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별이 뜨면 로맨틱해지지. 어쩔 수 없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 만들어보자.’
은우는 페가수스를 상상했다.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페가수스.
다시 나에게 와 주겠니?’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페가수스가 달려왔다.
은우가 페가수스에게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밤하늘의 별들을 반짝이게 해줄 수 있을까?”
페가수스가 대답했다.
“걱정 마. 친구들을 다시 불러올 테니.”
일곱 명의 아기 동자가 나타나 북쪽 하늘을 밝혔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안드로메다 공주는 페가수스의 옆에 서서 하늘을 밝혔다.
그러자 백수희가 소리쳤다.
“별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어요. 우리 말을 들은 걸까요?”
백수희가 신이 나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벌린 채 깡충깡충 뛰며 외쳤다.
“별님, 제 말이 들리시면요. 우리 은우 앞으로 더 큰 월드 스타가 되게 해달라고. 제 소원 들어주실 거죠?”
창현은 백수희의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별님, 제 말이 들리시면요. 백수희 씨한테 좋은 일만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은우랑 함께 셋이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