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71화 (71/257)
  • 71화.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3)

    정지태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은 오랜만이야. 그동안 아픈 명석이 걱정하느라, 돈 걱정하느라, 일자리 걱정하느라 편한 날이 없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 거 같기도 하고.’

    창현은 말없이 정지태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정지태가 휴지를 받아들며 말했다.

    “아,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네요. 사장님. 정말 맛있네요. 사장님, 제 평생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이네요.”

    창현이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집에 가실 때 명석이랑 부인 것도 가져다주세요. 저희 매장 출근 시간은 9시이고 퇴근 시간은 10시입니다. 주말이 바쁜데 주말에는 알바생 한 명이 더 나오기로 돼 있어요.

    내일부터 이 가게의 지점장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제가 있다가 주문받는 법이랑 아이스크림 푸는 법, 포장하는 법도 조금 알려드릴게요.”

    정지태가 깜짝 놀라 창현을 바라보았다.

    “지점장이라고요?”

    “네, 사실 직원이 한 명뿐이다 보니 직함만 거창한 걸 수도 있어요. 월급은 처음 3달은 400만 원이고, 3달이 지나면 올려서 450만 원으로 드리도록 할게요.

    근로계약서는 책상에 두고 갈 테니 읽어보시고, 물어보고 싶으신 점이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사, 사백만 원요?”

    정지태는 생각보다 많은 월급의 액수에 놀랐다.

    ‘정확히 내가 필요한 그만큼의 금액이잖아. 게다가 명석이도 자주 볼 수 있을 거 같으니 이만한 일자리가 내게는 없어.’

    정지태가 고개 숙여 깊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사장님은 제게 은인이세요.”

    “대신 쉬는 날이 없어요. 주말과 공휴일은 더 바쁘고. 아이스크림 가게라는 게 보기랑은 다르게 진이 빠지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지태는 결심했다.

    ‘내게 이런 기회를 주신 사장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돼. 내 가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전엔 병원비 때문에 중국집 배달과 대리운전, 세차장 아르바이트까지 쓰리잡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거에 비하면 이건 정말 꿀이지. 암.’

    ***

    스텔라는 ‘위대한 목소리’의 DVD를 다시 보고 있었다.

    ‘3번째 다시 보고 있는데도 질리지가 않아, 저 은우라는 아기의 연기.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파리넬리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잖아. 감정표현이 어쩜 저럴 수가 있지?

    노래도 노래지만, 놀라울 정도의 연기야.

    저 아기는 노래를 정말 사랑하고 있어. 노래를 부를 때의 환희에 찬 표정.

    전에 ‘불명의 작곡가’란 영화를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 영화에서 베토벤 역을 맡았던 배우의 연기는 정말 끔찍했지. 고뇌를 짊어진 그 표정을 지어내는 꼴이라니. 그 배우는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러면서 예술가의 고통을 흉내는 꼴이라니.

    매일 수천 자를 썼다 지우는 고통을 알아?

    창작의 고통을.’

    각본가이자 배우인 스텔라는 자신이 겪고 있는 창작의 고통 때문에 베토벤 역을 연기한 배우의 연기가 더욱더 역겹게 느껴졌다.

    ‘나도 매일 새벽이면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들 수 있는걸.

    예술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우울증 약을 달고 살지.

    인생도 쉽지 않고 예술은 더더욱 쉽지 않아.’

    스텔라는 자신이 겪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갈망과 집착, 슬픔과 환희를 모두 다 표현하는 듯한 은우의 연기가 좋았다.

    ‘은우는 나의 인생 배우. 위대한 목소리는 나의 인생작이야.’

    스텔라는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용지를 보았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라니. 크리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군. 그래, 남우조연상을 받을 정도면 다른 영화의 주연보다도 뛰어나고 자기 영화의 주연보다도 뛰어나야지.’

    스텔라는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용지의 남우조연상 칸에 은우의 이름을 적었다.

    ***

    은우는 창현이 샤워하러 간 사이 창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백수희 누나한테 전화해야지.’

    은우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백수희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 0

    ‘언젠가 백수희 누나가 진짜로 아빠의 영 번이 될 거야.’

    은우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여보떼요.”

    “아, 공룡변신 로봇인가요?”

    백수희가 은우를 알아보고 장난쳤다.

    “네, 져는 티라노사우루스임니댜.”

    “네, 져는 트리케라톱스입니다.”

    “비밀변효갸 먼갸요?”

    “비밀번호는 0000입니다.”

    “네, 졍담임니댜.”

    은우는 생각했다.

    ‘백수희 누나는 역시 좋아. 내가 좋아하는 공룡 이름도 다 알고, 나랑 같이 장난도 잘 쳐주고. 같이 놀면 진짜 재미있단 말이지.’

    은우가 말했다.

    “눈나, 이료레 아빠량 가치 글램핑 갸요. 눈나도 갸치 가요.”

    백수희는 생각했다.

    ‘글램핑이 요새 유행이라고 하긴 하던데. 재밌으려나? 근데 난 집이 아닌 곳에 가면 잠을 잘 못 자는데. 자고 오려나?’

    백수희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거야?”

    “아니요. 아뺘갸 가게 시면 안 대서 나제 가따가 고기만 구어먹고 놀댜 와요.”

    백수희는 잠시 고민했다.

    ‘잠을 자지 않고 오는 건 다행이네. 이번에도 요리를 배울 수 있으려나? 부탁을 하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말하는 게 쉽지가 않아. 이제 촬영까진 2주일이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요리학원에 등록해야 하나.’

    백수희가 말했다.

    “그래, 누나도 같이 가자.”

    “아빠갸 머글 건 다 준비한댜고 몸먄 오래요. 눈나.”

    백수희는 전화를 끊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글램핑은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떤 걸 가져가면 좋을까? 그래도 알아보고 가는 게 재밌겠지.’

    ***

    은우는 창현의 차를 타고 백수희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던 은우가 창현에게 물었다.

    “아빠아~, 아빠아~.”

    은우가 운전을 하고 있는 창현을 불렀다.

    “왜, 은우야?”

    “개구리 뱌챠능 어떤 마시예요?”

    창현은 은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개구리 반찬?”

    “뱡금 노래에서 나와떠요. 뮤슨 반챤. 개구리 뱐찬. 무슨 마시예요? 아빠는 개구리 머거봐떠요?”

    창현은 고민이 되었다.

    ‘요즘 들어 질문이 많아져서 힘든데 이건 정말 어렵네. 근데 그게 정말 개구리를 반찬으로 먹었다는 말인가? 여우는 육식동물이니 먹을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창현이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는 개구리 먹어보고 싶어?”

    은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대답했다.

    “개구리가 슬플 거 가타서 안 먹고 시퍼요. 엄마 개구리를 머그면 애기 개구리갸 울고 애기 개구리를 머그면 엄마 개구리가 슬프쟈냐요.”

    창현은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개구리 반찬은 정말 개구리로 만든 반찬이 아니라 개구리 색깔 반찬을 말하는 거야. 왜 오이랑 시금치랑은 개구리 색깔이잖아. 그치?”

    “네에.”

    은우는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동요를 따라서 부르기 시작했다.

    창현은 생각했다.

    ‘어떤 게 진짜인지 아빠도 모르지만, 은우야 아빠는 은우가 지금의 따스하고 예쁜 마음을 오래오래 가졌으면 좋겠어.’

    차는 어느새 백수희의 집에 도착해 가고 있었다.

    창현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백수희 누나한테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하렴.”

    “니에 니에 니에.”

    은우는 크게 대답하더니 창현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아빠 휴대폰은 왜?”

    “아빠갸 스마트폰 안 사져서 아빠 휴대폰에 백수희 눈나 번효 저장해 놔떠요.”

    창현은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수희 씨 번호가 저장된 건가. 은우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휴대폰으로 뭘 한 거지?’

    은우가 백수희에게 전화했다.

    “눈나, 우리 다 와떠요. 어서 나와요.”

    “누나 주차장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오세요. 월드 스타님.”

    “아랴떠요. 아뺘 백수희 눈나 주차장에 이떼요.”

    창현의 차가 백수희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청바지에 하얀색 패딩을 입은 백수희가 창현과 은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창현이 내려서 차 문을 열어 주려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백수희 씨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요?”

    “별거 아니에요. 같이 먹으려고 과자 종합세트도 주문하고 또 호빵도 들고 와서 그래요.”

    “제가 먹을 건 다 준비했는데.”

    “과자는 남으면 들고 가셔도 돼요. 글램핑은 먹는 재미라고 하더라구요.”

    백수희가 차에 탔다.

    “눈나.”

    은우가 백수희를 보자마자 안겨서 백수희에게 뺨을 부볐다.

    백수희가 은우에게 호빵을 내밀었다.

    “와아, 먀딛는 냄새. 이게 머예요?”

    “은우, 이거 처음 보는구나. 호빵이라는 건데 누나가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간식. 요샌 맛이 많아져서 다양한 맛이 있더라고. 어떤 거 줄까? 피자 호빵, 야채 호빵, 팥 호빵.”

    은우는 생각이 많아져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맛을 골라야 하지? 아 또 결정장애네. 다 먹어보고 싶은데. 근데 아빠가 있다가 글램핑 가서 고기 굽는다고 했는데. 고기도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백수희가 은우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우리 은우, 표정이 딱 그때 피자집에서 피자 고를 때랑 똑같은 표정인데. 다 먹어보고 싶은 표정이구나. 그럼 우리 셋이 이거 삼등분으로 잘라서 조금씩 다 먹어보자.”

    은우는 깜짝 놀랐다.

    ‘백수희 누나는 정말 대단해. 내 맘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정말 멋진 누나야.’

    은우는 백수희가 삼등분으로 잘라준 피자 호빵을 먹으며 말했다.

    “마디떠요. 눈나. 행보케요.”

    백수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눈나도 은우가 행복하니까 행복하다.”

    창현이 말했다.

    “저도 어렸을 때 호빵 좋아했어요.”

    백수희가 말을 이었다.

    “전 호빵이랑 귤 때문에 겨울을 제일 좋아했어요. 추운 건 너무 싫은데 호빵이랑 귤이 너무 좋아서. 겨울마다 귤을 상자로 사다 놓고 손바닥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곤 했어요. 겨울엔 온수매트 키고 귤 까먹고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요.”

    창현은 생각했다.

    ‘탑여배우라서 화려한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박하다. 온수매트 켜고 귤 까먹는 걸 좋아한다니. 나랑 다를 게 없이 느껴져. 은우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백수희 씨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아.’

    ***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헐리우드의 유명한 배우인 톰은 배달된 DVD를 보았다.

    - 퀴즈쇼.

    - 더 히어로.

    - 션샤인 브릿지.

    -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

    ‘이번엔 어떤 영화부터 볼까? 내가 좋아하는 액션 영화는 한 편도 없네. 인도영화는 악센트가 맘에 들지 않으니까 가장 마지막에 보고. 미국 영화인 션샤인 브릿지부터 봐야겠다.’

    톰은 션샤인 브릿지의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틀었다.

    ‘주연인 남자 배우 알버트의 섬세한 연기가 매우 좋네.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설렘을 잘 표현했어. 그에 반해 여자 배우 릴리의 연기는 좀 지루하군. 게다가 포인트가 잘못됐어.

    중년의 사랑이란 게 얼마나 복잡한 감정인 건데.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울 수도 있는 거. 그런 게 중년의 사랑이라고.’

    톰은 션샤인 브릿지를 껐다.

    ‘지난주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지 못했는데 이번 주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도 만나지 못하는 걸까? 좀 있으면 심사 기간도 끝나는데 다음 주까지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중에 제일 괜찮은 것을 골라 적어야겠지.’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를 앞둔 사람처럼 톰은 찜찜한 기분으로 다음 DVD를 재생시켰다.

    화면 속에서는 작은 아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굉장히 귀여운 아기군. 아기의 웃음은 모두를 기분 좋게 하지. 목소리도 외모만큼이나 귀엽고 말이야. 나도 파리넬리의 오페라를 좋아하는데 과연 저 아기는 어떻게 소화할지 궁금하네.’

    영화는 어느덧 파리넬리가 알베르토와 대결을 하는 장면에 접어들었다.

    ‘저 장면은 나도 읽은 기억이 나. 워낙 유명한 일화지. 실제로도 파리넬리는 악기 연주자들과의 대결에서 이길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건 역사 속의 기록이고. 그걸 어떻게 영화로 재현할 수 있을까.

    파리넬리의 목소리는 역사 속의 기록일 뿐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영화 속에서 은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명은 냐를 비껴갸찌만 냐는 굴하지 아냐.

    이 기릐 끄테서 댜시 기를 챠즐거야.”

    톰은 은우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파리넬리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저런 모습일 거야. 노래까지 완벽해. 신이 내린 목소리. 누가 저 목소리를 거부할 수 있겠어?’

    톰은 휴대폰을 열어 파리넬리 OST의 음원을 결제 완료했다.

    ‘매일 듣고 싶은 목소리야.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되겠군.’

    톰은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용지의 남우 조연상 칸에 은우의 이름을 적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