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2)
“여보세요.”
“눈나, 뭐해요?”
백수희는 창현인 줄 알고 긴장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창현 씨인 줄 알고 목소리도 다듬고 긴장해서 받았는데 은우였잖아. 이 장난꾸러기.’
백수희가 말했다.
“깜짝이야. 은우 아버님인 줄 알았잖아.”
“지냔 버네 아뺘 전화로 전화한다고 해쨔나요. 눈나. 눈나. 뭐해요?”
순간 백수희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아빠한테 전화하려고 고민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뭐라고 둘러대지.’
백수희의 눈앞에 젤네일이 보였다.
“젤네일하고 있었어.”
“젤네이리 머예요? 눈나.”
“손톱에 색깔 칠하는 거야. 예쁘라고.”
“댜으메 냐도 해 주떼여. 눈나. 참, 눈나 우리 지베 놀러올래여?”
“집에?”
“넹, 놀러와요. 눈나. 레고 새로 사떠요. 무너 쟘슈햠 세트요. 머디께죠? 그리고 아빠량 갸치 요리도 할 거예요. 일요일 아침마댜 아뺘량 요리해요.”
“요리?”
백수희는 생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곳은 있다더니. 못 이기는 척 간다고 해야겠다. 간 김에 창현 씨한테 레시피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해야지.’
은우는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선 영탁과 창현이 함께 엑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빠, 머해요?”
“매출 정리.”
은우는 직감적으로 아빠가 바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래서 아빠가 연애를 못 한다니까. 아빠는 집에 와서도 일뿐이야. 매일 일만 하니까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거라고. 영화도 좀 보고 맛있는 것도 좀 먹으러 다니고 그래야 생기는데.’
은우가 창현에게 안겨 볼을 부비며 말했다.
“아빠, 백수희 눈나 초대해떠요. 내일 백수희 눈나 우리 지베 온대요. 신나죠?”
영탁이 은우의 말을 듣더니 창현의 등 뒤에서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창현은 은우의 말에 놀랐다.
‘백수희 씨가 우리 집에 온다니 맛있는 거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나. 은우가 좋아하니 말릴 순 없지만, 집에 오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한데.’
은우가 창현에게 뽀뽀하며 말했다.
“아빠, 나 백수희 눈나 조아해요. 눈나랑 이뜨면 재미꼬 신냐요. 그리고 백수희 눈나가 자꾸 보고시퍼요.”
영탁도 은우의 말에 동의했다.
“삼촌도 백수희 씨가 좋다. 이쁘고 친절하고 우리 은우한테도 잘 해주고.”
은우가 창현과 영탁에게 자랑했다.
“지난 버네 하부지 만나서 하부지한테 용돈도 바다떠요.”
창현은 갸우뚱했다.
“할아버지? 은우는 할아버지 없잖아.”
“백수희 눈나 아뺘요. 은우는 백수희 눈나도 조코 하부지도 조아요.”
창현은 마음이 복잡했다.
‘언제 백수희 씨 아버님까지 만난 거지? 은우가 엄마의 정을 모르고 자라서 백수희 씨가 은우에게 잘 대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한데 또 한편으론 백수희 씨가 결혼이라도 하면 은우가 상처받을 거 같기도 하고. 정말 어렵다.’
***
백수희는 도넛 세트를 들고 은우의 집 앞에서 벨을 눌렀다.
창현이 인터폰을 받았다.
“백수희예요.”
- 삐익.
현관문이 열리고 창현이 백수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누냐 와따. 눈나.”
은우가 백수희를 보자마자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겼다.
“은우야. 잘 잤어?”
백수희는 은우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났다.
‘내복 차림에 머리도 제멋대로고, 얼굴도 퉁퉁 부은 걸 보니 방금 일어났네. 우리 은우. 일어나자마자 봐도 너무 귀엽구나. 진짜 아가 같네.’
백수희의 손에 들린 도넛 세트를 보고 은우가 박수를 쳤다.
“와아, 역시 눈나는 내 마믈 잘 아랴. 아치멘 도너시지. 도너타면 초코갸 체고.”
은우가 도넛 상자를 열려고 하자 창현이 말했다.
“은우야 손 닦고 세수하고 먹어야지. 그리고 백수희 누나도 집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고.”
“아, 깜뺘케다.”
은우가 욕실로 뛰어갔다.
백수희는 창현의 안내를 받아 거실을 지나 부엌 식탁에 앉아있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뭐 좋아하세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백수희는 생각했다.
‘제가 요리를 못해서 그렇지 먹는 건 잘 먹어요. 먹는 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차라리 먹는 프로에 나갈 걸 그랬나.’
백수희의 한쪽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요리 프로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짜 좋아하는 거 없으세요? 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요.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피곤한 게 다 사라지거든요. 일요일 아침에는 은우랑 영탁이랑 다 같이 아침 식사를 만들어 먹거든요. 오늘은 특별히 백수희 씨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 드리려고 했거든요.”
백수희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요리를 좋아한다고? 피곤한 게 사라질 정도로? 진짜 신기하다. 난 요리를 하면 없던 피로도 쌓이던데. 아침 먹으면서 레시피 말해 봐야겠다.
은우는 진짜 천사라니까. 나를 집에 초대도 해주고 말이지.’
백수희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웃음이 실실 났다.
창현이 말했다.
“정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다 잘 먹어요. 진짜로요.”
창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아침은 간단한 브런치로 해드릴게요.”
은우가 욕실에서 나오자 창현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요리사 모자 써야지 브런치 만들게.”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은우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 요리사 모자를 썼다.
“아뺘. 눈나 건?”
창현이 서랍에서 하얀색 요리사 모자를 꺼냈다.
은우가 모자를 가지고 가더니 백수희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자아, 눈나도 떠요. 요리에 머리카라기 드러가면 앙대여.”
백수희는 은우의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은우 덕분에 이런 모자도 써 보네. 그런데 요리라는 게 정말 하기 싫고 귀찮은 걸로만 생각했는데, 은우가 요리사 모자 쓰는 걸 보니 재밌어 보여. 한번 해 볼까?’
창현이 와플 기계를 꺼내 크로아상을 넣으며 말했다.
“굽는 건 제가 할 테니 자르는 것만 해 주세요. 은우랑 같이요.”
“은우 안 위험할까요?”
“은우 건 어린이용으로 나온 안전 칼이라서요. 괜찮아요. 요즘은 애기들 물건이 정말 잘 나와서요.”
“진짜 신기하네요. 칼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대신 고기 같은 건 자르기 힘들고요. 과일이나 채소 같은 것만 잘라보라고 주고 있어요. 저 나이 때는 요리도 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리는 살면서 필요한 일이니까요. 어릴 때부터 놀이처럼 배우면 좋을 것 같아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도 다치면 어떻게 해요?”
“세상에 나온 이상 안 다칠 수는 없잖아요. 다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바라봐 주고 응원해주는 게 부모의 일이죠. 그리고 항상 지켜보고 있어서요. 제가 이래 봬도 눈이 등 뒤에도 달렸어요.”
백수희는 창현의 말을 듣고 창현이 달리 보였다.
‘은우가 똑똑한 건 창현 씨 때문인가. 생각하는 게 남다른 거 같아. 우리 아빠 같으면 위험하다고 손도 못 대게 했을 텐데. 필요하다면 어릴 때부터 하는 게 낫다니. 멋지다.’
창현이 양상추, 깻잎, 아보카도, 오이를 주며 말했다.
“백수희 씨는 이것 좀 씻어주세요. 은우는 아보카도, 오이를 좀 잘라볼까?”
창현은 와플 기계에서 구워진 크로아상을 꺼내고 두부를 깍두기 크기로 썰었다.
백수희는 양상추를 씻다 말고 창현이 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창현 씨가 하는 걸 유심히 살펴보면 다른 요리를 할 때도 도움이 되겠지. 근데 칼질 너무 잘한다. 두부를 어쩜 저렇게 예쁘게 썰지?
게다가 칼질할 때마다 움직이는 손목의 힘줄이 너무 멋있잖아.’
백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볼이 발그레해졌다.
은우가 조그마한 손으로 자른 아보카도와 오이를 접시에 담아 창현에게 가져갔다.
“아뺘. 쟐 해떠요? 길게 잘라떠요. 샐러드용은 길게!”
창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샐러드용은 길게. 잘 잘랐네.”
창현이 은우가 잘라온 아보카도를 접시에 놓고 가지런히 모양을 다듬더니 꽃 모양으로 배열해 놓았다.
백수희는 창현의 센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보카도가 꽃이 될 수도 있구나. 요리가 저렇게 대단한 거인 줄 몰랐어. 정말 예쁘다. 창현 씨가 만드는 음식.’
창현이 샐러드용 볼을 꺼내며 백수희에게 말했다.
“양상추 아직 멀었어요?”
백수희는 빠르게 양상추를 헹구며 대답했다.
“다 해 가요.”
창현은 백수희가 자른 양상추를 다시 적당한 크기로 잘라 구운 두부와 오이와 섞었다.
백수희는 계속해서 창현의 손놀림을 살펴보았다.
‘소스는 네 가지나 섞어서 넣은 것 같은데 종류를 알 수가 없네. 평소에 관심을 안 둬서 그런지 병만 봐서는 모르겠어. 있다 먹으면서 물어봐야겠다.’
창현은 완성한 샐러드를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했다.
냉장고에서 리코타 치즈를 꺼내 아이스크림처럼 동그랗게 모양을 잡아 놓았다.
크로아상 와플 옆에는 딸기잼과 블루베리잼을 꺼내 놓았다.
창현이 백수희에게 물었다.
“주스 드릴까요? 아님 커피? 차? 어떤 거요?”
백수희는 생각했다.
‘이 집은 말만 하면 이런 게 다 나오는 집인가 보네. 이런 걸 집에서 다 하리라고는. 그것도 남자가.’
은우가 말했다.
“아빠 냔 한라봉 쥬스.”
백수희가 말했다.
“저도 같은 걸로요.”
창현이 냉장고에서 한라봉을 꺼내 껍질을 벗겨내 착즙기에 넣었다.
백수희는 창현의 동작을 보고 감탄했다.
‘몸에 익은 일인 듯 동작이 정말 빨라. 동선도 중복되지 않게 움직이고 있어. 대단하다.’
창현이 완성된 쥬스를 백수희와 은우의 앞에 놓았다.
은우가 창현에게 물었다.
“잘 머게뜸니댜. 아빠. 아빤 쥬스 안 머거요?”
“아뺜 차 마시려고”
창현이 찻잔에 노란색 가루와 꿀, 레몬을 한 조각 넣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백수희가 물었다.
“그건 뭐예요?”
“강황차예요. 노화 방지와 노폐물 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죠. 피부에도 도움이 되구요.”
백수희는 피부에 좋다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저도 마셔볼래요.”
창현이 빠르게 강황차 한 잔을 만들어 백수희의 앞에 놓아주었다.
“구수한 맛이에요. 맛도 나쁘지 않지만, 전 건강 때문에 마셔요.”
백수희는 창현의 철저한 자기 관리에 놀랐다.
“창현 씨는 아직 젊은데 건강에 관심이 많네요.”
“은우 잘 키우려면 건강해야죠. 가끔 그런 생각 하거든요.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잘 안 해요.”
백수희는 창현의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오늘 만나보니 나보다 어리지만 절대 어리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 같아. 배울 점도 많고 생각도 깊은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은우를 참 많이 사랑하는구나. 책임감도 있고.’
***
핑크색과 하늘색. 온통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가게에 정지태는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진짜 동화 속 같네. 여긴. 아기들이 오면 좋아하겠다. 우리 명석이도 좋아할 텐데.’
창현이 정지태를 맞이하며 말했다.
“가게가 너무 유아틱한가요?”
“아니요. 너무 따뜻하고 예쁘고 그렇습니다.”
“저희 가게 주 고객이 아기와 젊은 여성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인테리어를 해 보았어요. 젤라또 맛보시겠어요?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전 잘 몰라서 아무 맛이나 주세요.”
창현이 컵에 홍시 젤라또를 담아서 정지태에게 건넸다.
“이번에 나온 신제품입니다.”
정지태는 젤라또를 먹기도 전에 마음이 설렜다.
‘이 알록달록한 색감 하며, 너무 예쁘다.’
젤라또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정지태의 입 안에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가득 퍼졌다.
‘맛있다. 정말 자극적인 단맛이 아닌데도 정말 맛있어. 홍시 맛인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홍시의 텁텁한 맛 대신 부드러운 맛이 들어간 게 정말 좋다.’
창현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지태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떡볶이, 햄버거, 커피숍. 다른 가게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고른 건 명석이 아버님이 따뜻하고 행복한 마음을 많이 느끼셨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다른 매장에 비해서 일이 덜 힘들기도 하고.
가끔 명석이가 놀러 와도 좋아할 거예요.
대부분 아기들이나 여자분들이 오니까 명석이가 있어도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