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1)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인 스텔라는 배달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뽑으며 스텔라는 생각했다.
‘아카데미 회원도 올해까지만 해야겠어. 요즘 들어 재미있는 영화가 없어. 삶도 무료한데 영화까지 무료하다니.’
스텔라는 상자를 열고 배달된 DVD의 목록을 보았다.
- 퀴즈쇼.
- 더 히어로.
- 션샤인 브릿지.
-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
‘네 개를 다 보면 하루가 다 가겠네. 어떤 것부터 봐야 할까.
퀴즈쇼는 인도영화고 더 히어로는 영국영화. 션샤인 브릿지는 미국영화. 위대한 목소리는 감독이랑 스텝들은 미국 사람인데 배우는 이탈리아 사람, 미국 사람, 동양인도 섞여 있네.’
스텔라는 멍하니 DVD의 표지를 보았다.
‘션샤인 브릿지의 릴리는 내가 아는 배우니까 이것부터 봐야겠다.’
스텔라는 뉴욕 경찰 시리즈를 찍으면서 만났던 릴리를 떠올렸다.
‘지독히도 잘난 체하는 여자였지. 인간적으론 너무도 싫었지만, 그 빛나는 연기는 같은 배우가 볼 때도 인정할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특히 그 범죄자로부터 자식을 잃고 절규하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어.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그 표정.’
스텔라는 한동안 릴리의 연기를 잊을 수 없었다.
‘나를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들었지. 릴리는. 결과적으론 그 열등감이 나를 더 발전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릴리와의 만남 이후 스텔라는 자신의 연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
‘과연 릴리는 어떤 모습일까?’
스텔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션샤인 브릿지의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틀었다.
‘중년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다는 건 좋은데. 스토리가 너무 진부해. 릴리는 그냥 요염하고 섹시한 여자로만 나오는군.
왜 저 역할을 저렇게 연기했지? 남편과 새로운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런 섬세한 감정들을 전혀 살리지 못했잖아.
릴리답지 않아. 전의 그 빛나던 그런 모습들이 모두 사라졌어.’
스텔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는 걸까? 션샤인 브릿지는 그녀의 흑역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군.’
션샤인 브릿지의 DVD를 꺼내고 위대한 목소리의 DVD를 넣었다.
‘이 영화라도 재밌어야 할 텐데. 올해의 영화는 왜 이렇게 다들 진부한 느낌이지.’
스텔라는 지난주에 보았던 8편의 영화 중에서도 투표할 만한 작품을 찾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3편의 DVD 중에서 투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영화가 시작되고 화면 안에는 너무도 귀여운 아기가 나왔다.
‘아기가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애절한데. 진짜 자기 아빠를 바라보는 것 같잖아. 어른들과 음악 대결을 하면서도 당당하게 무대를 지배하고 있어? 뭐지 저 아기는?’
스텔라는 점점 더 은우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
영탁은 프라이팬에 해물김치전을 부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미리 무쳐놓은 골뱅이무침이 있었다.
창현이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좋은 냄새 나네. 맛있겠다.”
“냉장고에 맥주 있으니까 맥주도 꺼내. 이거만 부치면 같이 먹자.”
“은우도 부를까?”
“오늘은 은우 없이 우리 둘이 마시자. 오랜만에 예전 추억 떠올리면서.”
“예전? 총각 때?”
“그래, 총각 때도 좋고, 고등학생 때도 좋고. 다 됐다.”
영탁이 해물김치전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내가 한 음식 오랜만이지? 그동안 네가 워낙 음식을 잘하니 해 주는 것만 얻어먹고.”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맛있고 즐거우면 됐지.”
“김마리아 수녀님께 얘기 들었어.”
창현은 대답 없이 맥주를 마셨다.
영탁도 맥주를 마시며 창현에게 말했다.
“야, 난 차라리 잘 됐더라. 연락도 안 되고, 사실 그동안 현경이 너한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잖아. 괜히 새 출발만 못 하게 하고.”
“그래도 너 사람한테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넌 어떤지 몰라도 나는 미웠어. 걔 나쁜 애야. 벌 받은 거라고.”
“그래도 은우 엄마야.”
“그래, 없는 게 나은 거 같은 그런 엄마. 현경이 얘기하라는 게 아니라 너도 누구 좀 만나라고. 우리 가게도 잘 되고, 너 아직 젊고 잘 생기고, 은우도 예쁘고. 그리고 너 아직 서류상은 총각이잖아. 결혼한 적이 없다고. 대체 왜 여자를 안 만나?”
“만날 시간도 없고. 난 그냥 은우를 잘 키우고 싶어. 내 목표는 좋은 아빠야.”
“니 맘도 이해해. 근데 은우한테도 엄마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너랑 내가 열심히 하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채워줄 수 있는 자리는 따로 있을지도 몰라. 너도 좋고 은우도 좋고. 더 시간 가기 전에 만나봐.”
창현은 생각했다.
‘나는 현경이 이후로 여자가 무서워. 자기 자식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여자인가 싶고. 현경이한테 대놓고 욕하진 못했지만, 은우 엄마라서 그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았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은우 하나 있으면 내 인생 이대로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괜히 여자 만나서 맘 다치고 은우도 상처받고 그런 거보다는 지금이 더 나은 거 같아.’
영탁은 말이 없는 창현을 보며 건배를 청했다.
“내 맘보단 니 맘이 더 복잡하겠지. 시간이 해결할 수도 있는 거고. 하긴, 뭐 나도 여자친구 없는데. 술이나 마시자. 오늘 진탕 취해보자.”
방에서 은우와 놀던 보리가 은우에게 말했다.
“멍멍(은우야 거실에서 맛있는 냄새 나는데 아빠랑 삼촌이 너 안 부르고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는 거 아니야?)”
“에이 설먀.”
“멍멍(이거 튀김 냄샌데 나가보자. 딱 봐도 맛있는 냄새야.)”
“티김? 내갸 조아하는”
은우의 눈이 커졌다.
은우는 보리와 함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서는 창현과 영탁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은우는 생각했다.
‘어, 아빠가 웬일로 술을 다 마시네? 아빠 술 마시는 날 별로 없는데.’
그때 영탁이 창현에게 말했다.
“근데 넌 어떤 여자가 좋냐? 은우 잘 봐주게 선생님 어때? 우리 가게 단골 중에 유치원 선생님 있는데 은우 잘 볼 거 같지 않냐?”
“가게 손님이랑 그러면 안 돼.”
“넌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러니까 니가 안 되는 거야. 그럼 백수희 씨는 어때? 은우도 백수희 씨 좋아하잖아.”
“백수희 씨는 유명한 배우인데 내가 어떻게 넘봐.”
“너도 유명하잖아. 은우 아빠로. 그리고 은우는 월드 스타잖아. 은우가 백수희 씨보다 해외 팬은 더 많은걸. 너 요새 연하남이 대세다. 이때다 싶을 때 해 봐.”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너 취했어.”
“나 안 취했다고.”
은우는 생각했다.
‘아빠가 여자를 만나려나? 기왕이면 백수희 누나가 좋겠는데. 아빠는 쑥스러워서 연애를 잘 못 하니까 내가 나서야겠어. 내 엄마는 내가 정한다. 좋아!’
***
명석이 아빠, 정지태는 컴퓨터 앞에 앉아 구인광고를 찾는 중이었다.
‘나이는 많고 경력은 끊어졌고. 갚아야 할 대출금을 생각하면 못해도 한 달에 사백만 원은 벌어야 할 텐데.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가 않네.’
100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을 본 곳은 한 곳뿐.
면접을 보러 간 택배회사에서는 다짜고짜 화물용 탑차를 사라는 말부터 했다.
‘탑차 가격이 중고여도 한 달에 35-40만 원이라고 했으니까 그거 빼고 기름값 빼고 하면 한 달에 얼마가 나오려나. 택배는 화물 분류가 중노동이라고 하던데 돈을 따로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일단 연락 온 곳이 여기뿐이니 여기라도 가야 할까?’
정지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택배 일을 시작하면 명석이 얼굴 보긴 힘들겠다. 새벽에 들어와서 새벽에 나가는 게 택배 기사라고 하던데. 그래도 우리 명석이 병원 다니려면 어쩔 수 없지.’
정지태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명석이 아버님. 저 은우 아빠, 이창현입니다.”
정지태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든 채로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은우 아버님. 병원비 너무 감사했어요.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아니에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명석이는 퇴원 잘했나요?”
“덕분에 잘했습니다. 요샌 밥도 잘 먹고 은우가 다녀간 이후 참 많이 밝아지고 씩씩해 졌어요. 의사 선생님도 명석이가 요샌 컨디션이 매우 좋은 것 같다고 관리 잘 해 보자고 하셨구요.”
“명석이 아버님, 혹시 저희 가게에서 일 해 보시지 않을래요?”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라도 하는 듯한 창현의 말에 정지태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저야 감사하죠. 언제부터 일하면 될까요?”
***
은우가 창현에게 조르고 있었다.
“아빠, 스마트폰 사 주떼여.”
“안 돼. 지금 있는 키즈폰 쓰면 되잖아. 위치 추적도 되고 아빠에게 전화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거의 길동이 형아랑 같이 있잖아.”
“냐도 칭구들한테 져나하고 시픈데.”
“친구들이 키즈폰을 쓰니까 괜찮아.”
은우는 시무룩해졌다.
‘스마트폰 생기면 백수희 누나랑 더 자주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랬는데. 안 통하네. 치이.’
은우의 시무룩한 표정에 마음이 아픈 창현이 말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사줄게. 그때 제일 좋은 걸로 알았지?”
창현은 생각했다.
‘요즘 음란물도 많고, 인터넷으로 보이스피싱 문자나 전화 같은 것도 많고. 아기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기 무서운 세상이니까.
교육적으로도 너무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쓰면 상상력이 사라진다고 하기도 하고.’
은우는 생각했다.
‘별수 없지. 다른 방법을 써서 아빠랑 백수희 누나를 친하게 만들어야겠다. 일단 오늘 내가 백수희 누나를 좀 만나고.’
은우가 창현에게 말했다.
“아뺘, 그러면 휴대폰 빌려져어.”
창현이 스마트폰을 꺼내 은우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금방 쓰고 아빠 방에 가져다 놔. 아빠 서류 정리할 게 좀 있어서.”
은우는 창현의 스마트폰에 백수희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내가 백수희 누나 번호는 잘 외우고 있지. 이름 쓰는 법도 알고 말이지.
내가 쓸 줄 아는 게 내 이름이랑 아빠 이름, 삼촌 이름, 보리 이름밖에 없는데.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 쓸 줄 아는 이름은 재롱이들이랑 백수희 누나 이름뿐이니까.’
은우는 저장한 백수희의 번호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백수히 눈나, 은우예요.”
백수희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받은 터였다.
“은우구나. 근데 이거 니 번호 아닌 거 같은데. 웬일이야?”
“아빠 번호예요. 우리 아빠 폰으로 가끔 젼하할 테니까. 이것도 져장해요. 눈나.”
“그래.”
은우의 의도를 모르는 백수희는 창현의 번호를 저장했다.
은우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수희 누나랑 아빠랑 친해지기 1단계.
일단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도록 한다. 완성!’
***
백수희는 예능 프로 ‘우리 집에 셰프가 왔다’ 대본을 두고 고민 중이었다.
‘여우주연상을 받고 나서 예능 출연 제의가 쏟아져서 받긴 했는데 어떻게 하지? 요즘 요리 프로가 인기라서 요리 프로만 3-4개가 출연 요청이 왔어. 다 거절할 순 없으니 여기서 하나는 받아야 할 텐데.
난 요리라곤 계란후라이 빼고는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만약 이 모습 그대로 나가면 팬들이 실망할 텐데.
음식은 그냥 시켜 먹는 거 아니었어? 재료 아깝게 왜 요리를 해 대체?’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백수희였다.
‘요리 학원에 등록을 할까? 학원에 등록해서 배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기도 하고. 대본을 좀 볼까? 이건 요리를 하나 만드는 거니까 요리를 하나 준비해서 외워 놓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이런 프로에선 어떤 요리를 해야 하는 거야?
보니까 다른 출연자가 만든 요리랑 경쟁을 하는 거네.’
갈수록 한숨만 나오는 백수희였다.
백수희는 몇 번이나 휴대폰의 창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전화를 해서 물어볼까? 그런데 창현 씨랑 단둘이 말해본 적이 없는데. 은우랑 얘기할 때는 편하고 좋은데. 창현 씨랑 말하려니 어색하네. 전화해서 뭐라고 말하지? 요리 좀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해야 하나? 무슨 여자가 요리도 못해?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때 백수희의 전화가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이창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창현 씨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한 거지? 마침 내가 전화하려는 차여서 다행이긴 한데. 모르는 척하고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