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재능을 찾아서 (2)
은우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었다.
‘물의 신 히드로스와 땅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태어났어요.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태어나자마자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아버지인 히드로스는 화가 났어요.
히드로스가 친 장난 때문에 사람들의 나이가 뒤죽박죽이 돼 버렸거든요.
아기들이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져서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할아버지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은우는 동화책을 넘기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할아버지에게 반말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내가 전생에서 산 나이를 모두 합하면 파드와 8살, 파리넬리 77살이니 어떤 할아버지보단 더 세상을 오래 살았을 수도 있는데.
그치만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나에게 끊이지 않는 질문을 해대겠지?
세 번째로 환생한 기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등등.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근데 너무 재밌다. 세상에 이런 신도 있구나.
가만있어봐. 그런데 시간의 신을 불러올 수 있을까?
그러면 나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은우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단 신을 불러오려면 시간의 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니까, 외모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동화책 속의 크로노스는 건장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낫을 들고 있었는데 얼굴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시간의 신이라.
일단, 이 모습 그대로 불러와야지.’
은우는 동화책 속에서 본 시간의 신을 모습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상하다. 왜 안 되지?’
시간이 흘러도 나오지 않는 시간의 신의 모습에 은우는 답답했다.
‘아무리 봐도 동화책 그림이 틀린 것 같아. 가만있어봐. 누가 그린 거야? 대체? 이소희? 이 사람은 크로노스를 만난 적이 없어.’
은우는 화가 나서 동화책을 던지고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창현과 영탁은 달고나 라떼를 마시고 있었고, 보리는 신나게 껌을 뜯는 중이었다.
“멍멍!(은우야, 표정이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내 개껌이라도 한 입 할래? 새로 산 건데 맛이 아주 좋아.)”
“죰 피견해.”
은우는 영탁과 창현이 마시고 있는 달고나 라떼에 눈이 갔다.
‘한 잔만 마시면 집중이 잘 되고 머리도 맑아질 것만 같은데.’
은우가 말했다.
“아뺘, 땸톤, 냐도 한 입먄.”
영탁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은우야, 그런 표정으로 삼촌 보지 마. 아빠가 보나 마나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카페인 때문에 안 돼. 커피는.”
창현이 말을 보탰다.
“은우야, 카페인은 성장을 멈추게 해. 은우 아빠보다 더 키 많이 커야 멋진 스타가 되지. 어렸을 때만 이쁘고 커서는 미워질 거야?
그리고 뇌세포도 성장을 멈춘단 말야.”
은우는 충격을 먹었다.
‘파리넬리일 때는 16살 때부터 커피를 매일매일 마셨는데. 내가 유명해진 직후였지. 수입도 안정되기 시작했고 18세기엔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곧 상류층이라는 표시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마셨었지.
그치만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니 참아야겠는데……’
은우는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영탁이 은우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은우야, 성장기 끝나면 마실 수 있어. 너무 슬퍼하지 마.”
그때, 길동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탁이 길동에게 커피를 주며 주었다.
길동이 커피를 마시자마자 눈이 커지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맛있네요.”
“아, 그거 우리 열정 커피의 달고나 라떼라는 메뉴인데. 은우가 개발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실수긴 했지만.”
“와, 대단한데요. 은우. 참, 은우 이번에 BBS 연말 연기대상에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올라갔어요. 뭐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라고 대표님이 그러시네요.”
“와아, 은우가요?”
창현과 영탁이 놀라서 되물었다.
“네, 만약 수상자로 뽑히면 최연소 기록이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그거보다 더 대박인 게 있어요. 은우가 시상식 축하 무대에 설 거라는 거예요.”
“축하 무대요?”
“네, 그것 때문에 지금 대표님이 완전 신나셨어요. 이제 연기자 이은우가 아니라 가수 이은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죠. 노래도 하고 춤도 잘 추는 이은우요.”
은우는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진짜 기회가 왔구나.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선생님께 먼저 여쭤봐야겠지.’
길동이 말을 이었다.
“걸그룹이나 보이그룹과 합동 무대를 할 가능성도 있어요. 마침 그날이 가요대상 시상식도 함께 열리는 날이라서요. 누구와 하는 게 가장 은우를 알리기에 좋은지 대표님이 고민 중이세요.”
창현이 말했다.
“난 블루벨벳이 좋던데.”
“난 ‘걸스온더탑’을 부른 ‘놀이공원’이 좋던데.”
은우가 말했다.
“뾰이 그룹도 조을 거 가테요.”
모두들 예상과는 다른 은우의 대답에 놀랐다.
길동이 물었다.
“왜?”
“츔 때무네요. 걸그룹 츔보다는 뾰이그룹 츔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조을 거 갸탸요.”
은우는 무대에 설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
은우는 슈퍼보이즈의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잘 안 돼.’
은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두 가지 재능을 따로따로 쓸 수는 있는데, 함께 쓰는 것은 안 되네. 왜 이럴까? 최고의 춤꾼이 되려면 두 재능을 꼭 합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리스 지혜의 여신 암기력 레벨 1]
[그리스의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흥 레벨 1 ]
은우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휴우, 슈퍼보이즈는 참 대단한 그룹이야. 유난히 이 곡엔 느낌을 잘 살려야 하는 춤과 절제해야 하는 춤들이 섞여 있어. 두 가지 재능을 빠르게 바꾸고 동시에 불러와야지만 연말 시상식 무대를 성공시킬 수 있어.’
이철이 박자를 맞추며 은우의 동작을 체크했다.
“뺘뺘뺨 뺨뺨.”
이철은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며칠 사이에 많이 늘었어 그래도. 지금 이 정도면 춤을 잘 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비슷하게 춘다고는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슈퍼보이즈와 동시에 함께 춘다면 너무나도 비교가 되겠지. 슈퍼보이즈는 워낙 춤을 잘 추니까.
은우도 참. 걸그룹 중에 쉬운 안무를 추는 그룹들도 있는데 하필 슈퍼보이즈랑 하고 싶다고 해서는.
걸그룹과 함께 하면서 귀여운 꽃게춤이나 고기춤 같은 거 조금 섞어 넣으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은우 성격을 알 것도 같다.
뭐든지 최고가 되고 싶은 거야. 은우는.’
이미 은우의 몸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철이 말했다.
“은우야, 벌써 3시간 30분째야.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야 해.
너 아까 낮에도 2시간이나 연습했잖아.”
은우가 대답했다.
“죠금먄. 죠금먄 더요.”
“그래, 그러면 딱 10분 만이야. 10분 후엔 집에 가야 해.”
“네.”
***
은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차에 탔다.
‘손가락까지도 힘이 하나도 없어. 아, 그런데 왜 두 가지 재능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거지? 연말 시상식에서 멋있는 무대를 보여줘야 하는데.’
은우는 힘도 없었지만 속상한 마음이 더 컸다.
길동은 아무 말도 없는 은우가 걱정이 됐다.
‘평소 같았으면 조잘조잘 차 안이 은우 목소리로 가득 찼었을 텐데 속상한 일이 있나?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걸까?’
길동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오늘은 춤 연습 잘됐어?”
“열띠미 핸는데 쟐 모르껟떠요.”
길동은 생각했다.
‘역시 춤이네. 내가 대신 춰 줄 수도 없고. 우리 은우를 속상하게 하다니. 나쁜 춤.’
길동은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뱀이 불에 타면 뭐가 될까?”
“아, 배미 뷸레 타면 뷸샹해. 죽쟎아요. 횬아.”
길동은 생각했다.
‘뱀이 불에 타면 뱀파이어인데. 이게 재밌지 않고 무서웠나. 음, 그럼 다음 것으로 패스.’
길동이 말했다.
“그럼, 영어로 된 반성문은 뭐라고 할까?”
은우는 생각했다.
‘이탈리아어로는 riflessione인데, 영어로는 뭐지?’
은우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글로벌이야. 웃기지 않니?”
길동은 혼자서 마구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은우는 웃을 수가 없었다.
길동은 생각했다.
‘은우는 아재 개그 안 좋아하는구나. 별수 없지. 뭐.
오늘은 조용히 집까지 데려다줘야겠다.’
차가 은우의 집에 도착했다.
“교먐뜸니댜, 횬아. 피견해서 그런 거니꺄 걱정하지 마요.”
길동이 차에서 은우를 내려주려고 안자, 은우가 길동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이래서 내가 널 안 사랑할 수가 없지. 어서 힘을 좀 내. 은우야.
그깟 춤이 뭐라고. 형이 진짜 니가 기운이 없으면 너무 속상하다.’
길동이 은우 대신 벨을 눌렀다.
창현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 은우가 기운이 좀 없어요. 춤 연습이 힘들었나 봐요. 잘 보살펴 주세요.”
창현이 말없이 은우를 받아서 안았다.
***
“멍멍”
새벽 2시, 보리의 짖는 소리가 조용한 동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에서 깬 창현은 은우의 방으로 갔다.
보리가 은우의 옆에서 은우를 핥고 있었다.
“멍멍(열이 불덩이에요. 빨리 은우 좀 깨워봐요. 내가 아무리 핥아도 일어나지를 않아. 우리 은우 많이 아픈가 봐요.)”
보리는 은우가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창현은 반사적으로 은우의 이마를 만졌다.
“몸이 불덩이야. 체온계 어딨지? 체온계.”
잠에서 깬 영탁도 은우의 방으로 왔다.
“무슨 일이야?”
“은우가 열이 불덩이야. 체온계로 체온 좀 재봐. 난 일단 차에 시동을 걸어야겠어.”
“근데 이 시간에 아무 병원이나 가도 되는 걸까? 응급실이 열린 병원이 어디지? 일단 전화를 해봐야겠다.”
영탁이 황급하게 전화기를 찾고, 창현은 옷을 챙겨입고 차 키를 가지러 나갔다.
“멍멍!(그러니까 빨리 은우 좀 응급실로 데려가라고. 이럴 땐 진짜 내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강아지는 왜 손이 없는 거야.)”
영탁이 전화를 했다.
“다산 콜센터죠? 아기가 아파서 그러는데 지금 문이 열린 가장 가까운 응급실이 어딘가요?”
“네네, 지금 전화 주신 용산구에서 가장 가까운 소아병원 응급실은 강북삼성병원입니다.”
영탁이 은우를 안아서 차로 데려갔다.
“창현아, 강북 삼성 응급실로 가. 어서 빨리.”
창현은 차를 강북 삼성 응급실로 몰면서 생각했다.
‘어제 춤 연습이 너무 힘들었던 걸까. 은우야, 아프면 안 돼.
니가 얼마나 소중한 아기인데. 아빤 너 없으면 못 살아.
아빠가 어제 널 더 유심히 살펴볼걸.
아빠 잘못 같구나. 아파서 어떻게 하니.’
새벽이라 도로는 뻥 뚫려 있었고 차는 금세 강북 삼성병원 앞에 도착했다.
창현은 소아병동 응급실에 은우를 접수했다.
간호사가 창현의 이름을 불렀다.
“이창현님. 들어오세요.”
피곤해 보이는 의사가 은우의 체온을 측정했다.
“열이 40도. 기침이나 다른 증상 동반은 없었나요?”
“네, 어제 조금 피곤해하긴 했지만, 감기라든지 다른 증상은 없었어요.”
“그럼 목을 좀 볼게요. 아, 해볼래?”
은우가 입을 벌렸다.
“목이 좀 부었네요. 아마도 감기몸살인 것 같은데. 요즘 아기가 피곤한 일이 있었나요?”
“그게 요새 춤 연습을 많이 해서. 시상식 연습을 하느라.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어린이집 재롱잔치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죠. 며칠은 쉬는 게 좋겠어요.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 한 3-4일 동안은 지속적으로 체온을 잘 살펴보셔야 해요. 고열도 위험하지만, 저체온도 위험하거든요.”
창현은 생각했다.
‘아마 저 의사는 은우가 연기대상 시상식에 나간다는 걸 모르고 한 말이겠지. 하긴 보통의 네 살이 무대에 선다고 4시간씩 계속 춤 연습을 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은우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려야 하나.
아프니까 걱정이 되네.’
창현은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