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재능을 찾아서 (1)
은우는 달라진 백수희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와, 저래서 배우인가. 차림새가 달라지니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 ‘내일도 사랑해’ 찍을 때는 청바지 아니면 긴치마에 티셔츠만 입고, 화장도 거의 안 했었는데.
우리 엄마 맞아?’
백수희가 은우를 보고 아는 척을 하며 달려왔다.
“은우야, 은우야. 보고시펴뗘.”
“눈나. 이뻐요.”
백수희는 은우에게서 처음 듣는 칭찬에 놀랐다.
“우리 은우가 그런 말해 주니 심쿵하는데. 그치만 눈나는 은우 엄마 역할이 더 좋았어.”
은우는 백수희에게 안겼다.
‘백수희 누난 정말 좋아. 늘 나에게 따뜻하고 천사 같아.’
‘사이코는 하나다’의 인기 PD, 김명민 PD가 백수희에게 말을 걸었다.
“수희 씨, 이 아기가 은우인가?”
“네, PD님. 우리 은우 예쁘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지난번 ‘위대한 목소리’에 이어 이번 ‘겨울 나라 2’도 벌써부터 반응이 대단하던데. 우리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해 줘서 너무 고맙다, 은우야. 수희 씨도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배우를 소개해줘서.”
“은우야. 눈나가 벌써 네 덕에 고맙다는 소리를 다 듣는구나. 우리 은우 월드 스타야. 월드 스타.”
“백수희 씨, 촬영 시작합니다.”
백수희는 정장 차림의 오피스 우먼으로 변신해 있었다.
백수희가 맡은 역은 초엘리트 변호사.
백수희가 사무장에게 말했다.
“동물병원 의료소송 사건 어떻게 준비돼가고 있어요?”
“네, 변호사님. 상대편 동물병원에서 의료과실이 아니라 보호자의 관리 소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저희 측에서 좀 더 자료를 보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방흡입술 의료사고 건은요?”
“그 사건은 병원 측에서 환자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문제 삼으며 명예훼손죄를 걸어서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졌습니다.”
백수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예견했던 일이긴 하니까요.”
백수희는 생각했다.
‘오늘 이상해. 하루종일 일진이 좋지 않네. 아침에 나올 때 도로에서 다른 차가 접촉사고가 나는 바람에 재판 시작 오 분 전에 도착하질 않나.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재판에서 검찰 측이 생각지도 못한 증인을 불러내서 지질 않나.’
백수희는 자기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사무장이 백수희를 걱정하며 말했다.
“변호사님, 이번 주 내내 사무실에서 쪽잠만 자셨죠? 오늘은 재판 끝났으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 가셔서 푹 좀 주무세요. 젊음만 믿고 그러다가 몸 축나요.”
따뜻한 사무장의 말에 백수희가 누그러졌다.
“고마워요. 사무장님,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달려야죠.”
백수희는 차 키를 챙기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꺅!”
지하 주차장에 울리는 백수희의 비명.
누군가가 백수희의 차 유리창에 컬러 스프레이로 글씨를 써 놓은 것이다.
- 난, 항상 너를 보고 있다.
순간 다리가 풀린 백수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구를 불러야 할까?’
백수희는 멍한 상태로 고민을 하다가 휴대전화의 단축번호를 누른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
“눈냐. 눈냐.”
“응, 은우야.”
“눈냐. 냐 오늘 어린이지베셔 큐키 만드러능데 눈냐 쥬께요.”
“고마워.”
“눈냐, 슬펴여?”
“아니, 그냥 오늘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있어서,”
“눈냐, 거졍햐지 마요. 내가 인형 주께요.
큐키 머그려 와요.”
백수희는 택시를 탔다.
백수희가 내린 곳은 백수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하지만 백수희는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은우의 집으로 들어간다.
- 딩동, 딩동
“와아, 눈냐다.”
백수희가 들어오자마자, 은우가 달려나온다.
“은우야.”
은우를 보자마자 백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눈냐, 스프구냐. 기달료 바.”
은우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인형을 가져온다.
“눈냐, 얘는 샐리예요. 얘량 이쓰면 조은 일먄 생기 꺼예요.”
은우의 옆에 서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은우가 누나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거 아무한테도 안 주는 건데. 누나가 많이 걱정됐나 보네.
힘든 하루였나 봐요. 밥 차려 줄까요?”
할머니가 백수희를 위해 밥을 차린다.
“눈냐, 눈냐. 큐키.”
은우가 백수희에게 쿠키를 내민다.
“아고, 이뻐라.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눈냐, 힘내요.”
은우가 백수희의 볼에 뽀뽀를 해준다.
김명민 PD는 연기를 보며 놀랐다.
‘저렇게 힘들고 지친 날, 머피의 법칙이 따라다니는 날이라도 은우를 만난다면 힐링될 거 같아.
다들 은우, 은우 하는 게 이래서였구나.
저 어린 아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위로를 해주는데 마음을 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야.
하나뿐인 샐리인형을 양보하다니 너무 눈물 난다.’
카메라 감독 역시 은우의 연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귀여운 말투와 발음이 심장을 녹이는 거 같아.
샐리인형 양보하는 장면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저 어린 아기가 누나를 걱정하다니.
걱정 마. 은우야. 누나는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저 인형 안고 있으면 매일 밤 꿀잠 자겠다.’
촬영이 끝나고 은우는 백수희에게 말했다.
“눈냐, 연기갸 마니 느러떠요. 발음됴 죠아지구요.”
“그래, 은우야?”
백수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 은우에게 인정받다니 좋은데. 누나가 매일매일 열심히 연습했더니 늘더라고. 은우 그 말 들어봤어? 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잖아.”
“와, 멋찐 마리예요.”
은우는 생각했다.
‘백수희 누나에게 재능을 주지 못해서 고민했었는데, 백수희 누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했구나.
재능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안 되는 가보다.
나도 재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
은우는 자신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더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은우는 길동에게 말했다.
“횬아, 지베 가기 저네 가고픈 거시 이떠요.”
“아이스크림 가게?”
“녜니요.”
“녜니요는 뭐야? 은우야.”
“아슈크림 갸게는 늘 갸고 시픈 고디지만. 정다비 아니라서요.”
“그럼 어디 갈 건데.”
“도셔간.”
길동은 내비게이션으로 도서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근데, 은우야. 너처럼 어린 아기들도 도서관에 가니?”
“슈녀니미 그랬는데 드러갈 슈 이떼요.”
길동은 근처의 도서관으로 차를 몰았다.
“도서관이라니 이게 몇 년 만이냐? 진짜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처음 같은데.
대학교 시험 때도 도서관에서 자리 맡아놓고 놀다가 결국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집에 갔는데.”
은우가 길동의 이야기를 듣더니 놀렸다.
“횬아, 바부. 욜씨미 해야죠.”
“아, 은우야. 횬님이 공부랑은 좀 거리가 멀어서. 대신 운동을 잘했어. 씨름 선수였거든.”
“오, 횬아, 운둉 알려져요.”
“그래. 일단 오늘은 어서 빨리 도서관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갑시다. 그래야 횬아도 퇴근을 하지.”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은우가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사서가 물었다.
“무슨 책을 빌리러 왔니? 엄마랑 같이 왔어?”
“횬아랑요. 시네 대한 채글 빌리려고.”
“신?”
“음.... 혜퍄이툐스, 캴리오폐, 야프로디테.”
“그리스, 로마 신화?”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사서가 은우를 신화를 다룬 동화책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여기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단다.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표지나 그림이 있는지 찾아보렴.”
은우는 사서가 꺼내준 책들을 보았다.
‘아기용 책이라 그런지 그림이 자세하네. 그림체마다 느낌이 매우 다르구나. 이걸로 불러낼 수 있으려나.’
은우는 고민하다가 3권의 책을 챙겼다.
“요교 갸져갸게요. 다른 신들도 이떠요?”
“다른 신이라? 북유럽 신화가 있는지 모르겠네. 그건 검색을 해봐야겠다. 잠시만.”
사서가 검색대로 돌아가 검색을 하더니 돌아왔다.
“찾아보니 있긴 한데, 초등학생용 책으로 있구나. 동화가 아니라서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래도 빌려 갈래?”
“녜. 쟐 일글 쑤 이떠요.”
“맞다. 형아가 읽어주면 되겠네. 좋은 형아가 있으니.”
“우리 횬아는 굥뷰 시러한대요.”
길동은 은우가 무슨 책을 빌리는지 보려고 옆에 서 있다가 뻘쭘해졌다.
“아, 저기 그러니까. 그게. 허허허허. 은우야, 횬아가 동화책 많이 읽어주잖아. 그렇지? 그리고 횬아한테 운동도 배우고 싶다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 챰 내 졍신 죰 뱌. 횬아가 굥뷰 죠아한대요.”
사서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다며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형아한테 운동도 열심히 배우고 책도 많이 읽으렴.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책을 좋아하니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길동은 생각했다.
‘이분이 은우를 모르시다니 안타깝네. 은우는 이미 웬만한 어른보다도 더 유명한 아기인데. 은우 좀 알아보셨으면 좋겠다.’
그런 길동의 눈앞에 책꽂이에 꽂힌 ‘겨울나라 1’의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흥행한 영화라 그런지 동화책으로도 나왔구나.’
길동은 동화책을 들어 은우의 앞으로 가져갔다.
“은우야, 이 책 재밌었지? 그치?”
“아, 횬아. 이거 재미떠써요. 그때 OST 녹음햐기 저네 일거뗬는데.”
“그래, 이번에 ‘겨울나라 2’ OST 녹음하기 전에.”
길동은 일부러 ‘겨울 나라 2 OST’를 천천히 끊어서 힘주어 읽었다.
‘이쯤이면 알아봐야 하는데. 왜 아직도 반응이 없지.’
사서는 책을 가지고 입구의 바코트 스캐너 근처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그때 길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유 워너 메이크 스노우 볼?”
은우는 놀랐다.
‘횬아가 노래를 하다니. 처음인데. 그런데 너무 웃겨. 세상에 고음 불가잖아. 무슨 노래가 저렇게 계속 한 음이라니. 음정이 아예 없잖아.
아, 웃겨. 그치만 웃을 수도 없고.’
은우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사서도 웃음을 참고 있었다.
길동은 결국 어색해서 노래를 멈추었다.
“요새 유행하는 곡이라 한 번 불러봤어요.”
사서가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저도 그 노래 좋아해요. 저희 딸 아이가 좋아해서 벨소리로 지정했다니까요.”
길동은 은우의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하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은우를 못 알아보다니 별수 없다.’
길동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노래를 바로 이 아기가 불렀습니다.”
“네? 얘가 은우인가요? 그러고 보니.”
사서는 은우를 요리조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은우가 맞군요. 은우네요. ‘내일도 사랑해’ 때부터 팬이었는데 못 알아보다니. 미안하다, 은우야. 사인 한 장 부탁해도 될까?”
“어서 해 드리렴. 은우야. 그리고 저는 은우 매니저 김길동입니다.”
“아, 그 햄버거랑 스테이크 잘 드신다는 그 근육 돼지.”
“그, 그렇죠. 제가 그 별명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아하하하하하, 아 아니에요. 근육 미남으로 불리고 계세요. 우리 은우 매니저이신데. 당연히 근육 미남이시죠. 자, 빨리 사인을.”
은우는 길동과 사서의 사이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어서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