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춤생춤사 (3)
은우는 전용 탭으로 블루벨벳의 ‘노란맛’을 틀었다.
“오! 마이 베이베~ 마이 베이베.”
수천 번도 보았던 그 동작이 은우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살아나고 있었다.
‘와, 된다. 된다.’
옆에서 지켜보던 보리가 짖었다.
“멍멍!(진짜 잘 춘다. 걸그룹 같잖아. 디오니소스랑은 차원이 다른데.)”
창현이 방문을 열며 말했다.
“은우야, 연습실 갈 시간이야. 길동이 형아 왔어.”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창현은 생각했다.
‘기분이 아주 좋은가 보네. 요즘 들어 기분이 좋으면 저렇게 대답을 여러 번 한다니까.’
은우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길동이 차 문을 열었다.
“횬아, 빈나는 나립니다. 셔뮤리예요.”
은우가 웃으며 길동의 손안에 종이를 쥐여주었다.
‘이게 뭐지?’
길동이 손을 펴보니 손안에는 종이로 접어진 장수풍뎅이가 있다.
‘진짜 장수풍뎅이 같잖아.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 어려워 보이는데. 은우는 역시 천재구나.’
길동이 장수풍뎅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은우가 말했다.
“횬아, 뱌메 부를 끄고 쟈면 뮤섭쟈냐요? 그때 풍뎅이가 횬아가 외로찌 안케 칭구갸 대 줄거예요.”
길동은 은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마, 잠자리에서 무섭지 않게 지켜주고 그런 건가. 근데 난 이제 커서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운데. 야근은 무섭지만.’
길동은 고민하다 대답했다.
“고마워. 은우야.”
어느새 은우의 벤은 HO 엔터테인먼트 앞에 도착했다.
“댜녀오게뜸니다. 횬아.”
은우는 길동의 뺨에 뽀뽀를 하고 손을 흔들며 나아갔다.
길동은 놀랐다.
‘헉, 이게 뭐라고 애기가 뽀뽀할 때마다 떨린다니까. 어서 모태솔로를 탈출해야 하는데. 뽀뽀도 연습이 필요한 건가.’
은우는 신이 나서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떤생님, 안녕하떼요.”
이철은 은우를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과자나 좋아할 거 같은 저 어린 아기가 춤을 추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다니 예뻐 죽겠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워.’
은우는 큰소리로 외쳤다.
“떤생님, 은우 연슴 마니해떠요. 이제 쟈햘 수 이떠요.”
은우가 무반주로 웨이브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스 지혜의 여신 암기력 레벨 1 – 5/1000]
이철은 은우의 춤을 보고 놀랐다.
‘어제와 달라. 동작도 정확하고 박자도 정확해. 그런데 어제의 느낌이 사라졌어. 동작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자신만의 느낌이 있었는데 개성이 전부 사라졌어.
전혀 다른 두 명의 댄서의 춤을 보고 있는 느낌이야.
프로 댄서들도 스타일을 바꾸는 건 힘들어하는데. 얼마나 연습을 했길래 이렇게 달라진 거지?
은우는 정말 천재인 걸까?
지금까지 내가 가르쳤던 사람들과는 달라.
만날 때마다 내 예상을 뛰어넘네.’
이철은 은우를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의지에 불탔다.
“그럼 오늘은 팔 웨이브를 해 보자. 이건 지난 시간에 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거거든. 팔로 물결을 타듯이 천천히 움직이면 돼.”
은우는 이철이 보여주는 새로운 동작에 매료되었다.
‘21세기의 음악은 춤과 함께 하는 거구나. 춤이 없이 음악만 있었던 17세기와는 확실히 달라졌어.
파리넬리의 목소리만을 믿고 거만하게 굴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군.
만약 나에게 신이 빌려준 재능이 없었다면 나는 21세기의 스타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재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도록 체력단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어.’
***
창현과 영탁은 이사한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것 봐. 은우 어릴 때 입었던 옷 이거 기억나?”
“기억난다. 이 반짝이 자켓. 이 옷 입고 전국노래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탔었잖아. 지금 보니까 진짜 작다.”
“그러게. 참 많이 컸구나. 우리 은우.”
“은우가 크는 만큼 너도 잘돼서 다행이야.”
“은우한테 해 주고 싶은 게 많아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해.”
창현은 영탁에게 은우의 이야기를 하며 코끝이 찡했다.
‘은우는 재능이 많아. 못하는 게 없어. 미혼부의 아기라는 편견에 상처받지 않도록 열심히 키울 거야.
엄마 몫까지 열심히.’
영탁이 창현에게 물었다.
“루루 스테이크 계약 건은 잘 해결됐어?”
“계약이 잘 돼서 다음 주부터 매장 보러 다닐 거야. 인테리어 업자도 만나고, 마케팅 회사도 알아봐야 하고 바빠.”
“지난번 사아크 버거도 반응이 좋은데. 은우가 맛있어하는 거마다 대박이 나니, 은우 입맛이 대단한 거 같아.”
“날 닮아서 그래. 은우 소속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어. 통역도 그렇고 지난번 젤라또보다 훨씬 수월했어.”
“은우 덕분에 인생이 고속도로구나. 나도 이렇게 큰 집에 이사 오니 꿈만 같아.”
방 4개에 거실, 화장실 2개가 딸린 50평대 아파트가 은우와 창현, 영탁의 새집이었다.
“내일은 차도 계약하기로 했어.”
“이제 그 차도 추억이구나. 사람들이 다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고 했었는데.”
“오래 탔지 뭐. 그래도 가져온 뒤로 4년을 더 탄 거니까. 그래도 고마운 차야. 우릴 잘되게 해 주었잖아.”
“그래, 집도 그렇고. 김미자 할머니도 그렇고. 세상 모두에게 고맙다.”
“난 은우에게 가장 고마워.”
은우는 새로운 방을 돌아보며 어떻게 꾸밀지 생각 중이었다.
“멍멍!(내가 원하는 반려동물용 급수기랑 강아지용 침대 넓은 것도 넣어줘야 해.)”
“뽀이, 넌 거시레서 쟈도 대쟈나. 거시리 더 널븐대.”
“멍멍!(거실이 더 넓으면 뭐해. 내 말 알아듣는 사람은 너뿐이잖아. 그리고 이사 와서 네 방도 아주 넓어졌는데, 나랑 같이 자면 좋지 뭘 그래?)”
은우는 고민하다가 보리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랴떠.”
은우는 방문을 열고 창현에게로 갔다.
“아빠, 방 그리미예요.”
창현이 은우가 그린 방 그림을 찬찬히 보면서 말했다.
“침대랑 책상, 그리고 인디언 텐트. 그런데 이 옆에 그린 거 이거 설마? 운동기구야?”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창현은 생각했다.
‘사범님이 은우가 태권도를 너무 열심히 한다고 하시더니 정말 운동을 좋아하나. 그래도 그렇지 고작 4살짜리 아기방이 운동기구 천지라니. 러닝머신에, 철봉에 이게 웬일이야?’
창현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운동이 재미있어?”
“녜.”
창현은 생각했다.
‘이상하네. 딱 한 번만 한다는 건 많이 좋아한다는 게 아닌데. 이렇게 잔뜩 운동기구를 방에 채워 넣겠다고 하면서. 뭐, 사내아이가 운동을 많이 해서 나쁠 건 없지. 그렇지만 난 로봇이나 공룡이 가득 채워진 방을 상상했었는데. 이건 너무 아기방 같진 않다.’
***
백수희, 창현, 길동, 은우는 용산의 한 극장 앞에 서 있었다.
백수희가 말했다.
“은우가 부른 OST 덕분에 생긴 초대권이라니 멋지다.”
길동이 백수희의 말을 이었다.
“게다가 4D고요. 저 4D 영화 보는 거 처음이라구요.”
길동은 생각했다.
‘사실 모솔이라 극장에 온 지 3년도 넘었다고요. 혼자 극장 오기가 너무 눈치 보여서. 오랜만에 이렇게 좋은 극장에 오다니, 은우보다 제가 더 신나요.’
은우가 말했다.
“횬아, 잼께 뱌요. 퍕쿈 며그까요?”
길동은 생각했다.
‘은우야, 사실 내 로망이 극장 와서 여자친구랑 팝콘 먹는 거였어. 내 로망을 너와 함께 하는구나. 흑 내 새꾸. 아니 내 연예인.’
길동이 팝콘을 주문하고 있었다.
“팝콘 콤보 두 개랑 핫도그 두 개, 우유 하나, 주스 하나.”
그때 은우가 작은 발꿈치를 들어서 계산대 위로 고개를 들려고 했다.
“횬아, 져 퍕콘통 굘랴도 대요?”
“맙소사, 얘 은우예요?”
은우를 알아본 알바생이 깜짝 놀랐다.
“혹시 겨울나라 2 보러 오셨어요? 기사에서 읽었어요. 은우가 OST 불렀다고.”
“네에.”
길동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알바생은 자신도 모르게 은우의 눈높이에 맞춰 질문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굘랴듀 대죠. 어떤 결로 쥬까요?”
“뵤랴색 굥듀, 애냐요.”
알바생이 은우에게 겨울나라 2의 피규어가 붙어있는 팝콘 통을 건넸다.
“뎌기, 뎌, 인증샷 햔 번먄 찌겨듀 대요?”
알바생은 은우가 귀여워서 은우의 말투를 따라 했다.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은우와 함께 인증샷을 찍으려고 할 때 알바생이 은우의 옆에 서 있는 백수희를 보았다.
“헉, 백수희 누나세요? 사이코는 하나다의?”
“네.”
백수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기 혹시 같이 찍어주실 수 있나요? 은우랑 저랑요. 너무 영광입니다. 실물이 너무 예쁘세요.”
은우는 백수희와 알바생 사이에서 귀여운 두 손을 브이를 만들어 머리 위에 붙였다.
“꼬먀김치~ 치즈~ 김뺩~”
은우만의 구호에 빵 터진 백수희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알바생이 신이 나서 정신이 없었다.
“은우야, 대체 그 구호는 뭐야? 처음 들어 그런 거.”
창현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몇 달 전부터 은우가 사진 찍을 때마다 하는 말인데. 저렇게 말하면 사진이 잘 나오긴 하더라구요.”
“넘 귀여워요. 근데 이제야 할 것 같네요. 왜 강라온 대표님이 매니저님이랑 꼭 같이 가라고 했는지.”
“왜요?”
“은우도 유명하고 저도 유명하니, 함께 있으면 스캔들 날까 봐서요. 오늘처럼.”
백수희가 신이 나서 막 웃었다.
“헤헤헤헤.”
은우도 따라서 웃었다.
길동이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빨리 가서 앉아요. 시간 됐어요. 화장실 위치도 잘 기억해 둬야 혹시 은우가 영화보다 화장실 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거든요.”
네 사람은 빠르게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은우가 말했다.
“떨려요.”
백수희가 은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떨지 말아요. 월드 스타. 보나마나 잘했겠지. 누나도 못 한 외국 영화에 출연도 하신 분이.”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오, 불 꺼진다. 이제 영화가 시작하려나 봐.”
은우는 생각한다.
‘내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할 때랑 OST를 부른 영화가 개봉할 때는 다른 느낌이구나.
이번 영화는 애니메이션 위에 목소리를 입힌 거니까 또 다른 느낌인 거 같아. 내가 부른 노래가 영화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은우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
“그 노래 너무 좋더라.”
“맞아. 애나랑 클라라가 눈사람 만들 때 나왔던 노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기억나. 그 노래 목소리 엄청 깨끗하고 맑더라. 나도 어린 시절에 눈싸움하던 게 생각나서 혼났어.”
“나도 갑자기 눈싸움하고 싶어졌어. 어렸을 땐 눈만 와도 행복했었는데.”
“맞아. 그랬었지. 그때가 참 좋았었는데. 그 노래 너무 좋더라. 나 그거 벨소리 할래. 파인애플 어플에 있나 찾아볼까?”
“나도, 나도 벨소리 할래.”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나오면서 이야기하는 소리에 은우의 어깨가 으쓱으쓱하였다.
백수희가 은우를 칭찬했다.
“은우야, 노래 정말 잘했더라. 저 학생들처럼 누나도 어린 시절이 막 생각나고 그랬어. 그래서 가슴이 뭉클했어.”
“우리 땐 가끔 눈싸움할 때 그 속에다 연탄이나 돌멩이 넣는 애들도 있었다니까. 그래서 내가 눈을 한 대 맞았는데 눈땡이가 파래진 거야. 그래서 내가 그놈을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때려주려고.”
길동은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말을 하다가 자신에게 향해있는 세 사람의 눈동자를 보았다.
‘앗, 내가 은우 앞에서 하면 안 될 말을 했나.’
길동은 급하게 말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친구를 찾아가서 ‘친구 사이에 그러면 안 된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낼 거지? 친하게 지내자’ 하면서 화를 꾹꾹 참고 집으로 잘 돌아왔다는 이야기예요.”
옆에 서 있던 백수희가 막 웃었다.
“은우야, 그러니까 친구랑은 사이좋게 지내야 해. 우리 은우는 잘하겠지만. 매니저 횬아도 잘했다고 하잖아. 그치?”
은우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결말은 아닌 거 같지만, 내가 속아주는 척해야지 길동이 횬아 마음을 생각해서.’
은우가 대답했다.
“니에. 니에. 니에. 니에. 니에.”
길동이 말했다.
“은우 덕분에 4D 영화 처음 봤는데 대단하네요. 아까 눈이 오는 장면에서 바람 불어서 깜짝 놀랐어요.”
백수희가 대답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의자 밑에서 바람이 나오다니. 사실 전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흔들리고 바람 불고 이런 거 안 좋아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은우 덕분에 처음 왔네요. 4D 영화관에. 은우는 어땠어?”
은우가 양손 엄지를 치켜들며 쌍따봉을 만들며 말했다.
“체고여떠요. 또 오고 시퍼요.”
백수희가 귀엽다는 듯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참, 은우야. 잊어버릴 뻔했는데, 요새 누나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본 적 있어?”
“샤이쿄는 햐냐댜.”
“괜찮으면 카메오로 출연해 줄래? 이번에 ‘겨울나라 2’도 개봉해서 서로 홍보도 되고 시너지 효과가 날 거라고 PD님이 특별히 부탁하셔서. 누나가 대본도 봤는데 은우가 연기하면 정말 귀여울 거야.”
길동이 말했다.
“백수희 누님이 은우와 친하신 건 알지만, 이렇게 친분을 이용해서 계약을 맺으시면 곤란합니다. 은우 매니저도 있고 소속사도 있어요. 아시잖습니까?”
“같은 소속사잖아. 인정머리 없이.”
백수희가 길동에게 심통을 부렸다.
그때 창현이 물었다.
“근데 백수희 씨가 누나예요? 전 길동 씨가 오빠인 줄 알았는데.”
“제가 노안이어서 그렇지 나이는 어려요. 누나가 맞아요.”
길동은 속으로 씁쓸했다.
‘대체 이 소리를 몇 년 듣고 살았나. 지겹다. 그나저나 난 언제 장가가서 은우처럼 이쁜 아들 낳지? 은우 아빠는 좋겠다. 은우 매니저는 하면 할수록 결혼하고 싶고 아기 낳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
그치만 현실은 모태솔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