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월드스타를 향하여 (5)
길동은 실장급 매니저인 태현에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아니 실장님, 저 로드 매니저 아닙니다. 저 이제 팀장급이라고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저 걸그룹 매니저 시켜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월급 100만 원 나오는 로드 매니저 생활을 3년이나 버틴 게 다 걸그룹 때문이었다고요. 우리 회사에 걸그룹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요!”
태현이 길동을 달랬다.
“니가 걸그룹 걸그룹 노래를 부르는 거 내가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서 내가 강라온 대표님께도 잘 말씀을 드렸는데, 그랬는데도 니가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는데 난들 어쩌냐? 그치만서도 이게 나쁜 건 아닌 거야. 사장님이 은우를 캣걸스, 레이니에 이은 월드 스타로 키우고 싶어 한다는 건 이미 회사에 소문이 파다하니까.
넌 월드 스타의 매니저가 되는 거라고.”
“아니, 저는 영어도 못하는데 왜 저한테 그런 아기를 맡기냐고요. 저 아기 질색인 거 아시잖아요. 제 친구 말로는 네 살짜리 아기면 화장실도 같이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데. 아무리 남자 아기지만, 제가 화장실에 가서 똥까지 닦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발 좀 봐주세요. 형님.”
“은우는 그런 일반적인 아기가 아니고 영재라고 하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평범한 네 살짜리면 사장님이 너한테 그런 일을 맡기시겠어? 미국 갈 땐 영어 잘하는 로드 매니저도 붙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실장님 지인짜!”
태현은 생각했다.
‘길동아, 니가 걸그룹 걸그룹 하지만 걸그룹 수명이 얼마나 될 거 같나? 데뷔하는 걸그룹이 100팀이면 그중에 살아남는 걸그룹은 5-6개밖에 안 된다. 5-6개 걸그룹 중에 10년 후에도 활동하는 걸그룹이 있을 거 같나? 없다. 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시집이나 가겠지.
은우는 아직 어려서 롱런하기만 하면 너는 거의 연금처럼 매니저 일할 수도 있고. 나는 사장님 안목을 믿어. 사장님이 월드 스타 될 거라고 찍은 아이면 최소한 월드 스타는 못 돼도 국내 탑은 될 거란 말이다.
니가 오래 씨름 선수 하다가 매니저가 돼서 성품도 진득하고, 기운도 세고, 덩치도 좋고, 체력도 좋고, 위기상황 대처도 잘하고 그래서 내가 너를 이쁘게 봐줘서 추천한 거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야. 다 내가 너를 아껴서 준 기회지. 너 십 년 후에는 나한테 고맙다고 무릎이 닳도록 절하게 될걸.’
태현은 길동에게 강라온 사장에게 자신이 길동을 강력하게 추천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
길동은 벤을 타고 은우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은우를 데려다가 영어 선생님께 데려다줘라. 이거지? 그나저나 어떤 아기길래 겨울나라 2의 OST를 부르게 된 거야? 궁금하긴 하다.”
은우의 집에 도착한 길동은 벨을 누르고 긴장한 듯 차렷 자세로 기다렸다.
은우가 빼꼼히 나무로 된 대문을 열고 말했다.
“누구떼요.”
길동은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나는 아저씨, 아니 삼촌, 아니 네 매니저야.”
길동은 은우의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숨만 쉬어도 귀엽다는 게 이런 거구나. 너무 귀여워서 긴장되네.’
길동은 손에서 갑자기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다한증. 이것 때문에 연애도 늘 실패하곤 했었는데.’
은우가 신이 나서 길동의 다리에 안겼다.
“와, 걈샤함니다. 걈샤함니다.”
190센티미터, 100킬로 거구의 길동에게 105센티, 18킬로그램의 은우가 매달린 모습은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으음, 뭐지? 이런 격한 반응? 매니저 생겼다고 이렇게 좋아하진 않던데. 전에 맡았던 아이돌 ‘남자친구’는 처음에 날 보고 여자 매니저가 아니라고 똥 씹은 표정이었지.’
길동은 예상과 다른 환대에 매우 놀랐다.
‘그런데 귀여운 아기가 다리를 감싸니 땀이 더 나는구나. 하아. 하필이면 이런 때.’
그때 보리가 마당으로 나왔다.
‘응? 매니저라고? 드디어 은우에게 매니저가 생긴 것인가? 대체 어떤 사람이지?’
보리가 길동의 근처로 가 냄새를 맡았다.
‘킁킁. 고기 냄새가 나네. 나처럼 고기 좋아하나 보지. 그나저나 우리 은우한테 잘해줘야 할 텐데. 고기라도 한 점 사 줘야 하나.’
창현이 마당으로 나와 인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라온 대표님으로부터 전화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은우 아빠, 이창현입니다.”
길동은 창현의 잘생긴 외모에 깜짝 놀라 아직까지 다리에 매달려 있는 은우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이 아빠 얼굴 천재네. 그래서 아들이 이렇게 잘생겼나. 근데 은우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정말 잘생겼잖아.
깊고 그윽한 눈매랑 높은 코하며, 부분을 떼어놓고 보면 거의 어른 배우 뺨치는 얼굴인데. 볼이 너무 통통하고 피부가 좋아서 너무 귀여워.
화장발로 승부하던 ‘남자친구’랑은 다르네. 사실 남자 아이돌들도 화장 전후가 다른 경우가 많은데.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이 이렇게 잘생겼다니. 역시 어린 게 좋은 건가. 나도 어렸을 땐 피부라도 좋았었겠지?
그나저나 땀이 멈추질 않네.’
길동이 창현에게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길동은 화장실에서 손을 닦았다.
‘아, 진정. 진정. 마음을 좀 진정하고. 오늘의 임무는 그러니까 회사까지 은우를 태우고 가서 영어 선생님께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주 쉬운 거고 예전에도 백만 번쯤 했던 일이라고.’
길동이 문을 열고 나가서 은우에게 말했다.
“오늘 나랑 회사로 가서 영어 선생님을 만나게 될 거야.”
은우가 길동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횬아. 횬아가 이떠서 너뮤 조아요.”
길동의 손에서는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귀여움 오랜만이야. 걸그룹보다 더 귀여운데. 이제 손수건을 늘 가지고 다녀야 하나.’
***
인진의 손에는 ‘겨울 나라 2’의 OST 가사가 적혀 있었다.
“은우야. 지금부터 가사를 외우게 될 거야.
자, 일단 선생님이 읽으면 그대로 따라 해봐.”
은우는 생각했다.
‘영어는 처음인데 어려우면 어떻게 하지? 보리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끝나고 복습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인진이 가사를 읽기 시작했다.
“두 유 워나 메이크 어 스노우볼?
한 번 해볼래? 너무 긴가.”
“두 유 어나...”
은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역시 배우지 않은 나라의 말은 어려워. 아테나의 재능 중에 언어의 재능은 없을까? 있다 집에 가서 불러올 수 있는지 연습해 볼까?’
인진이 말했다.
“아, 너무 길구나. 그럼 우리 한 문장을 지금처럼 둘로 나눠서 외워 보자. 자, 지금 잘했어. 다시. 두 유 워나 메이크.”
“두 유 어나 메이크.”
“잘했어요.”
인진이 박수를 쳐주었다.
은우는 한편 혼란스러웠다.
‘확실히 이탈리아어보단 어렵구나. 다행히 라틴어와 조금 비슷하긴 하네. 파리넬리일 때 라틴어를 배운 적이 있어서 처음 배우는 것보단 낫지만. 아무래도 보리랑 복습을 하든지 재능을 불러오든지 무슨 수를 내야 할 것 같아.’
인진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강라온 대표 말로는 언어 천재 같다고 했는데. 물론 또래들보단 훨씬 뛰어난 건 맞지만, 언어 천재 같진 않은데. 대체 이탈리아어는 어떻게 그렇게 잘한 거지?’
은진은 은우를 만나기 전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 영화에서의 이탈리아어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는데. 그 나이 또래의 이탈리아 아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어.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실력이 떨어지다니? 아빠가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고도 모르는 척한 게 아닐까?’
은진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 가사를 우리말로 바꿔주면 ‘눈으로 된 공을 만들어 볼까요?’야. 은우 눈싸움해본 적 있어?”
“네, 눈따움 조아해요.”
“그럼 그 상상을 하면서 문장을 외워 보면 되겠다.”
“두 유 어너 뜨노우볼.”
“자, 잘했어. 그 사이에 다시 ‘메이크’가 필요한 거야.”
“떤생님, 쩰리 머그래요?”
“그으래.”
인진은 은우가 가져온 곰돌이 젤리를 함께 먹고 있었다.
‘내가 고작 네 살 난 아기에게 심했나? 아무래도 아기니까 집중력이 짧을 텐데. 강라온 대표님이 2주 후에 디즈니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다고 하셔서 급한 마음에 너무 빨리 나가려고 했나?’
은우는 은우대로 마음이 복잡했다.
‘자꾸 헷갈려. 이걸 다 어떻게 외우지?
보리랑 복습하는 거랑 재능을 불러오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아, 맞아. 멜로디가 있는 말은 외우기가 쉬운데. 다른 사람이 부른 샘플 곡이 있으면 듣고 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가사만 외우려니 죽을 맛이네.’
은우가 고민 끝에 인진에게 말했다.
“떤생님, 마리 너무 어려어서요. 노래를 듣꼬 시퍼요. 노래로 드를 슈 이써요?”
“노래?”
인진은 생각했다.
‘맞아. 전에 ‘레이니’도 그랬었지. 영어로 된 인터뷰 문장 같은 걸 암기시키면 정말 못했는데, 멜로디가 있는 노래 가사는 잘 외웠었어. ‘레이니’도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 있을 때 더 기억이 잘 난다고 했어.’
‘레이니’는 HO엔터에서 캣걸스 다음으로 미국에 진출시키려 했던 남자 솔로 가수였다.
여전히 국내 탑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런 그 역시도 미국에 가서는 눈길을 끌지 못했다.
인진은 급하게 강라온에게 전화를 했다.
“대표님, 혹시 겨울나라 2 OST 노래로 녹음된 파일 디즈니 측에서 보내줬나요?”
***
오늘은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가 관객 300만을 돌파한 날.
영화의 배급사인 KJ 엔터테인먼트의 홍보팀장은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의 흥행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개봉 1일 차 800관에서 개봉. 관객 5301명을 동원.
개봉 첫 주는 경쟁작인 ‘한반도의 좀비’에 개봉관과 관객 수 모두 밀림.
개봉 2주 차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이례적으로 상영관이 축소되지 않고 850관으로 확대.’
홍보팀장은 놀랐다.
‘이 영화 재밌네. ‘한반도의 좀비’면 내로라하는 국내 톱스타 송중국, 김혜리 등이 출연한 데다, CG 등 촬영비용만 해도 150억이 투자됐던 영화인데.
가만히 보자. ‘위대한 목소리 : 더 파리넬리’의 제작비는 얼마지? 30억? 5분의 일이잖아. 주연 배우도 크리스가 좀 인지도가 있는 배우긴 하지만, 국내 인지도가 매우 높은 배우도 아니고. 심지어 이은우라는 이 아기는 첫 영화출연이네.
그런데 관객 평을 보니까 이은우라는 이 아기에 대한 말이 가장 많잖아.’
홍보팀장은 초록창 영화란 밑에 달린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크리스 때문에 보러 갔다가 은우 팬으로 입덕하고 나오게 되는 영화입니다.’
‘은우가 비눗방울 만들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 보셨나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눗방울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제 인생 장면으로 꼽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왔는데도 은우가 부른 ‘도레미송’이 잊히지 않았어요. 집에 와서도 계속 흥얼거리고. 영화도 영화인데, 음악이 너무 좋아요. 다들 보세요.’
홍보팀장은 은우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대리. 여기 이은우라는 배우 필모그래피랑 소속사 여부 찾아서 나한테 좀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