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미술 재능 (1)
선생님은 가방에서 물감과 스케치북을 꺼냈다.
‘어린이집에서는 주로 크레파스와 색연필, 사인펜으로만 그림을 그렸었는데. 물감은 처음이네.’
은우는 새로운 미술도구에 눈이 갔다.
“자, 오늘은 선생님이랑 같이 은우가 좋아하는 걸 그려볼 거야. 은우는 어떤 게 좋아?”
“아, 저는 보이랑 아빠랑 삼촌이랑 여냐, 준쑤, 지오, 헤리니, 시우. 그리고 또또.”
“좋아하는 게 너무 많구나. 은우는.”
“너무 마나요.”
“그걸 그려볼까?”
좋아하는 걸 그리라는 장미나의 말에 은우는 한동안 연필을 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신부님과 수녀님, 이셀린 음악 감독님, 크리스토퍼 감독님, 카를루초 할아버지. 아, 너무 많은데.’
은우는 스케치북 한쪽에 보리의 얼굴을 그리다가 잘 안 되는지 지웠다 그렸다를 반복했다.
‘아, 너무 어려워. 강아지가 이렇게 그리기 힘든 거였나. 도와달라고 해볼까.’
은우는 그림이 너무 안 그려져서 고민을 하였다.
‘아니야, 그래도 내 힘으로 그려야 할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할까.’
은우는 다시 종이 위에 아빠와 영탁이 삼촌의 얼굴을 그렸다.
‘4살 아이의 손으로 그리고 2번의 전생을 살아낸 눈으로 보자니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네. 역시 아이의 손은 너무 힘이 없다니까.’
은우는 잠시 아레스가 준 체력을 불러올까 생각했다.
‘아레스의 체력이라면 노래 부를 때 호흡이 길어졌던 것처럼 손의 힘도 키워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재능이 언제 다시 날 찾아올지 알 수가 없으니.
아기의 몸은 여러 가지로 불편해.’
은우는 고민을 하다가 다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얼까 고민했다.
‘최지은 누나랑 나를 좋아해 주는 팬분들도 내가 꼭 그려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내 팬들은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아서 얼굴을 다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장미나는 자꾸만 도화지 앞에서 그렸다 지웠다는 반복하는 은우를 보았다.
‘너무 완벽한 성향을 타고난 아기들이 저러기도 하는데. 보통 아기들과는 다르네.’
장미나는 은우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은우야, 잘 그리지 않아도 돼. 그냥 은우가 그리고 싶은 거 그려.”
“네, 이제 그릴게요.”
은우는 고민을 끝내고 동그랗고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리고는 물감을 꺼내서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원. 이건 뭐지?’
장미나는 은우가 그린 그림의 정체를 알기가 어려웠다.
“은우야, 이건 무얼 그린 거야?”
“지구.”
보통 4살짜리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그리라고 하면 엄마나 아빠 혹은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을 그리곤 한다.
‘지구를 그린 아이는 처음이네. 설마 이 아이, 어른처럼 환경을 걱정하는 그런 생각일까.’
장미나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은우야. 지구는 왜 그렸어? 은우는 지구를 좋아해?”
“샤럄들. 내 노래를 조아해 쥬는 샤럄들. 행보케 하는 샤럄들. 그걸 댜 그리고 시픈데 어려어요.”
장미나는 은우의 생각이 너무 놀라웠다.
‘4살짜리 아기가 자신의 팬에 대해 생각한 건가. 그래서 지구를 그린 건가. 어쩌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 전부를 팬으로 만들고 싶은 걸까. 은우는 정말 생각조차 슈퍼스타답구나.’
***
은우는 집에서 혼자 태권도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태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배꼽 근처에서 기운이 모이는 게 느껴져. 노래만 부를 때랑은 다른 기분이야. 집중력도 더 올라가는 것 같고.
다른 재능을 불러올 수 있는지 실험해 볼까?’
은우는 방 안에 있는 화분이 시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만 보자. 불러와 볼까?’
[그리스의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생동감 레벨 1]
시들었던 화분의 잎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지속 시간이 중요해. 지난번에도 살짝 불러왔었지만, 길게 부르지 못했으니까.
현재 시각 7시 15분.’
은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잎을 다시 생생하게 만드는 거야.’
시들었던 잎이 펴지더니 다시 초록빛을 되찾았다.
은우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목표는 이루었어. 현재 시각 7시 32분. 17분간 지속했구나. 점점 더 시간을 늘려봐야지.’
***
은우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놀 생각에 신났다.
이태석 신부님이 천사들의 집 아기들을 위해 마련한 여름 방학 휴가 계획 2탄은 슬라임 카페였다. 천사들의 집 아기들은 엄마나 아빠가 바빠서 휴가를 못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부님이 다양한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다.
‘슬라임 카페는 처음이라 기대되는데 재밌겠지. 지난번 갔던 모래 놀이 카페보다 재밌으려나.’
은우는 지난번에 다녀온 모래 놀이 카페가 너무나 재밌었기 때문에 또 그곳에 가고 싶기도 하였지만, 혜린이와 연아가 너무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슬라임 카페에 가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유년 시절의 추억을 쌓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난 이미 인생 3회차라서 알고 있는걸. 나이가 들어서 사귀는 친구들은 어린 시절에 만난 친구들처럼 순수하지가 못하니까.’
어쨌거나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쌓으리라 다짐하는 은우였다.
“와, 뜰라이미다.”
연아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자, 천천히 다 같이 해야지.”
김 마리아 수녀님이 연아를 진정시키는 사이, 슬라임 카페의 사장님이 오셔서 사용법을 설명해 주셨다.
“자, 먼저 여기서 슬라임을 고를 건데 아직 어리니까 완제품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통을 열면 다양한 색깔과 촉감의 슬라임이 있으니, 맘에 드는 걸로 골라요.”
“네.”
아기들은 신이 나서 슬라임 통을 열고서 맘에 드는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이, 챠거.”
“츄츄캐. 느끼미 이땅해.”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눌러보는 아기들이었다.
“난 두 개 하꺼야.”
평소에 슬라임에 관심이 많던 혜린이는 핑크색 슬라임과 하늘색 슬라임을 두 통이나 골랐다.
“자, 다 골랐으면 다른 통을 들고 와서 여기 있는 파츠를 고르세요. 파츠는 통에 담아 자리로 가져가면 돼요.”
아기들은 화려한 모양의 파츠 앞에서 말문을 잃은 채, 이것저것 통에 담기만 했다.
‘아, 이걸 고르자니 저게 이쁘고, 저걸 고르자니 다른 게 이쁘고. 그렇다고 다 가져가자니 친구들이 못 할 거 같아서 미안해서 못 하겠고. 어쩌지? 선택 장애인가.’
은우는 돌고래 모양 파츠와 별 모양 파츠, 사탕과 초콜릿 모양 파츠 중에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은 자리로 가 슬라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혜린이는 여러 번 해봐서 그런지, 알려주지 않아도 뻑뻑해지면 넣는 용액, 묽을 때 넣는 용액을 부어가며 잘 놀고 있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놀던 초등학생이 혜린이 옆에 오더니 갑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너네 슬라임으로 바닥 풍선 만들 수 있어? 자, 이거 봐라.”
초등학생은 슬라임을 넓게 펴더니 바닥에 빠르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공기가 슬라임 안에 갇혀서 풍선처럼 되었다.
“이게 바닥 풍선이야. 멋지지? 자, 파츠 줘 봐.”
초등학생은 혜린이의 파츠를 가져가더니, 그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바닥 풍선을 만들어 덮었다.
“너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멋지지?”
자리로 돌아온 은우는 초등학생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멋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게 너무 으스대는 것 같은데. 혜린이 누나 표정 좀 봐.’
은우는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하던 혜린이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 초등학생은 자리로 돌아가고, 혜린이는 울상이 되어 잘 가지고 놀던 슬라임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저게 더 이쁘쟈냐.”
연아는 바닥 풍선을 만들려고 시도 중이었다.
“아, 안 댄다.”
몇 번이나 다시 반죽을 뭉쳤지만, 바닥 풍선이 되지 않고 슬라임이 옷에 붙어 버려서 옷만 못 쓰게 돼 버렸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겠군. 내가 나서야겠어.
정신을 집중하고.
그런데 이 상황이면 어떤 재능을 불러와야 할까?
화술? 생동감? 염화미소? 아우라?
전부 다 아닌데.
만들기 재능이면 헤파이스토스인데.
헤파이스토스가 내게 준 것은 황금비율이었어.
헤파이스토스의 다른 재능이 필요해.’
은우는 전에 보았던 헤파이스토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쪽 발을 절고 있고, 한 손에는 망치, 한 손에는 집게를 든 헤파이스토스.
배꼽 근처에 기운을 모아서 집중을 하고.’
숨이 막 차오를 때쯤 헤파이스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들의 가호를 받는 아이야.
너는 나의 권능을 이어받아
모든 물건이 만들어진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투시력 레벨 1. - 0/1000
당신은 당신이 본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과정을 알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
은우는 초등학생이 만든 슬라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초등학생의 손동작이 매우 느리게 천천히 움직이면서 어떻게 바닥 풍선을 만드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이거구나. 몇 번만 해 보면 되겠어.’
이미 준수, 지호, 시우가 열심히 바닥 풍선을 만들고 있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왜 안대지? 응?”
“힘들댜.”
준수와 지호가 패배 선언을 하고 시우만이 홀로 시도하고 있었다.
‘자, 이렇게 최대한 넓게 펴서 빠르게 바람을 덮는다.’
은우는 두세 번의 시도 끝에 바닥 풍선을 만들어냈다.
“와와, 댄댜. 댄댜.”
혜린이가 옆에 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머시뗘.”
연아도 박수를 쳤다.
“파이티! 파이티!”
덩달아 준수, 지호, 시우도 신이 났다.
“자, 이쁘게 해보께.”
은우가 파츠를 골랐다.
“내 꺼도 내 꺼도.”
혜린이가 자신이 원하는 파츠를 넣었다.
“냐듀, 냐듀.”
연아도 파츠를 넣었다.
준수, 지호, 시우도 조용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파츠를 밀어놓았다.
“묘듀 하께!”
은우가 아기들이 내놓은 파츠를 모두 모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바닥 풍선을 만들어 놓았다.
“짜잔!”
“완떵!.”
은우가 바닥 풍선을 만들자 아기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와와와아!!! 꾸미 궁저니야.”
“와아! 너무 머시떠.”
은우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묘듀 하께해써.”
이 장면을 바라보던 이태석 신부는 생각했다.
‘은우가 친구들을 위하는 마음이 대단하구나. 어딜 가든 크게 될 녀석이다, 은우는. 우리 천사들의 집도 그렇고 은우 덕택에 큰 복을 받고 있어.’
이태석 신부는 은우가 바닥 풍선을 만드는 영상을 녹화하여 창현에게 보냈다.
창현은 바닥 풍선 만드는 영상을 받아보았다.
“이야, 우리 은우 손재주 있네. 날 닮아서 그러나.”
“만들기까지 잘하다니 놀라운데. 너도 만들기 잘해?”
“아니, 난 사실. 가끔은 은우가 날 닮았나 놀라울 때가 있어. 난 못하는 것들 투성이었는데 은우는 모두 다 잘하기만 해서. 그래서 가끔은 은우가 태어난 게 꿈 같기도 해. 저렇게 똑똑하고 이쁜 아들이 내 아들이라는 게.”
“그래, 넌 학교 다닐 때 공부 못 했었는데. 물론 나도 그랬지만. 아직 학교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은우는 학교 가서도 공부 잘할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은우를 생각하면 뭐든지 다 해 주고 싶다. 혹시라도 내가 부족해서 은우에게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싶고 말이야.”
“그런 괜한 걱정은 하지 마. 어서 영상이나 업로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