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재능을 지휘하다 (2)
은우는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레벨업을 하게 될 것 같은데.
오늘은 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와의 대결이야.
역시 노래를 잘 불러야만 하는 씬이야.
또 재능을 불러와야만 하겠군.’
[전쟁의 신 아레스의 체력 레벨 1 – 820 /1000]
재능창을 보는 은우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재능을 쓰게 된다니까. 편하기도 하고 효과도 좋으니까.
크루아상 먹을 때 생동감을 안 썼으면 지금 재능창의 숫자가 40은 낮았을 텐데.
하긴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지 뭐.’
은우는 순간 이 고민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리가 있었으면 딱인데. 보리는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겐 말을 할 수도 없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인가.
신이 내게 주는 다음 재능이 아레스의 체력 레벨 2이기를 바라는 거.
근데 그럴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은우는 심각해졌다.
‘오늘 레벨업을 하고 만약 아레스의 체력 레벨 2가 되더라도 그건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일 뿐이야.
물론 1000보다는 10000이 시간상으로 훨씬 여유가 있긴 하지만.’
은우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만난 듯 머리가 복잡했다.
***
오늘의 촬영은 어제에 이어 안드레아와의 대결장면.
안드레아가 G선만으로 연주를 하는 대신 파리넬리에게도 일종의 패널티를 주겠다고 말하는 장면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안드레아가 패널티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노래 중에 5옥타브 반을 불러보시오.”
안드레아가 내건 조건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5옥타브 반이라니? 그건 여성 가수들도 내기 힘든 소리잖아.”
“안드레아가 너무 하는군.”
“파리넬리를 이겨서 자신의 명성을 쌓고 싶은 거 아닐까.”
그때 은우가 대답했다.
“됴져네 응햐게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파리넬리.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마. 지금껏 성공한 가수가 없었어.”
“안드레아 치사해. 아무리 G선만으로 연주를 한다고 해도 그렇지.”
“혹시 안드레아가 파리넬리를 이긴다고 해도 난 파리넬리의 팬으로 남겠어.”
“하지만 파리넬리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다양했다.
술집 주인이 순서를 정하기 위해 말했다.
“자, 누가 먼저 부르겠소.”
용호상박.
바이올린의 G음만으로 이루어진 연주와 5옥타브 반까지 올라가는 노래.
술집 안의 사람들은 일렁이기 시작했다.
“와, 오늘 운이 좋은데. 술 마시러 왔다가 이런 걸 보게 되다니.”
“지난번 광장에서도 그렇고, 요즘 재밌는 볼거리가 넘쳐나는군.”
“그러니까. 우리 같은 농민들에게도 좋은 노래를 들을 기회가 많아져야지.”
“여기 와인 추가요.”
“난 맥주.”
신이 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술을 시키는 통에 술집 주인도 신이 났다.
“자, 순서는 누가 먼저 할 테요?”
은우가 대답했다.
“제일 굥평햔 갸이, 뱌이, 뵤요.”
술집 안의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중요한 대결인데 순서가 공정해야지.”
“맞아. 심판 잘 보쇼.”
심판은 술집 주인이 보기로 하고 세기의 가위, 바위, 보가 펼쳐졌다.
은우는 어린이집에서 갈고 닦은 가위, 바위, 보 기술을 펼쳐 보리라 생각했다.
‘일단 상대가 나의 패를 읽을 수 없도록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해야지.’
안드레아는 은우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당황했다.
‘대체 무얼 내야 하지?’
술집 주인이 시작을 알렸다.
“가위, 바위, 보.”
은우가 보를.
안드레아가 가위를 냈다.
“안드레아, 늦게 내면 안 돼요.
다음에도 이렇게 내면 파리넬리가 이기는 겁니다.”
안드레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피를 말리는 세기의 가위, 바위, 보.
‘안드레아가 당황했어. 가위, 바위, 보는 심리전이야. 이걸 잘 밀고 나가야 해.’
은우는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을 통해 주먹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위, 바위, 보.”
긴장한 안드레아는 늦지 않기 위해 서두르다가 아무거나 내고 말았다.
“안드레아 가위,
파리넬리 바위. 파리넬리 승. 자, 먼저 하겠습니까? 나중에 하겠습니까?”
은우는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을 보면서 인간의 기억력이 얼마나 짧은지에 대해 깨달았다.
‘만화 영화도 말이지. 핑크 사자를 보여주고 파란 펭귄을 보여주면 파란 펭귄이 재밌다고 하고, 파란 펭귄을 보여주고 핑크 사자를 보여주면 핑크 사자가 재밌다고 하는 게 아이들이니까.’
은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끄테 햐게뜸니다.”
“자, 그러면 안드레아부터 연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드레아가 G선만 남은 바이올린을 들고 섰다.
안드레아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고, 바이올린이 천천히 낮은 소리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술집 안의 사람들은 어느덧 숙연해져 안드레아의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G선만으로 이런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곡인데 이걸 즉흥적으로 연주하다니. 안드레아도 정말 놀라운 천재로군.’
‘지금까지 들어본 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야. 이 곡을 한 번 더 들어보고 싶군.’
안드레아는 비치카토(끊는 음, 피아노의 스타카토와 유사)를 통해 첫사랑의 설렘을, 비브라토(떨림음)를 통해 이별의 슬픔을 나타냈다.
그리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격정의 멜로디.
안드레아의 연주가 끝나자 술집 안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안드레아의 명성이 헛되지 않군. 바이올린으로 이런 연주를 하다니.’
‘술집 안의 공기를 바꿔놨어.’
‘난 오늘부터 안드레아의 팬이 될 거야.’
‘비브라토를 할 때의 떨림이 놀라울 정도야. 정말 바이올린이 울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음악이란 건 다양한 음계를 사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풍부하게 감정을 전달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군.’
은우 역시 안드레아의 재능이 뛰어남을 인정했다.
‘대단한 연주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이길 자가 없겠군. 하지만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줄 거야. 인간의 목소리야말로 가장 훌륭한 악기니까.’
은우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나갔다. 지난번 대결 이후, 이제 장미는 은우의 상징이 되었다. 술집 안의 사람들도 빨간색 장미를 흔들며 은우를 응원했다.
“아이 귀여워.”
“노래 부르지 않을 때의 파리넬리는 너무 사랑스럽다니까.”
“하지만 노래를 시작하면 절대 아기처럼 생각되지 않지.”
술집 안의 사람들이 은우에게 찬사를 보냈다.
‘어떤 곡을 불러야 5옥타브 반의 고음이 인위적이거나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질까. 내가 이렇게 높은음을 낼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이 곡의 진행과 감정선에 꼭 필요한 노래여야 한다.’
은우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결정했다는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명은 냐를 비껴갸찌만 냐는 굴하지 아냐.
이 기릐 끄테서 댜시 기를 챠즐거야.”
은우가 불러낸 것은 동화 속의 왕자. 마녀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탑 안에 갇히고만 왕자.
“윤명은 졍해진 게 아니야. 냐는 거뷰햐겨야. 뷰디치 겨야.”
은우가 영혼을 실어 부르는 노래.
“탸바네 갸치지 말고 탸블 부셔 버려. 턉븐 너를 갸둘 슈 업떠.”
노래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은우의 목소리가 5옥타브 레까지 올라갔다.
“아아아아아.”
어떤 이는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고, 어떤 이는 입을 떡 벌린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서 있었다.
[그리스 음악의 여신 칼리오페의 감동. 레벨 2]
술집 안의 사람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내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내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게 뭐였지?’
‘나를 정말 가두고 있었던 것은 내 생각이었구나.’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노래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각자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 번져나갔다.
‘인간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내 평생 오늘 이 순간을 기억할 거야.’
‘안드레아의 연주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군.’
‘감동이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서 오는 것 같아.’
‘이렇게 자연스러운 고음을 듣게 되다니.’
은우의 노래가 끝나자, 은우의 앞에는 붉은 장미가 수북이 쌓였다.
안드레아가 은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 부르다니.”
은우가 안드레아의 손을 잡았다.
“진졍햔 걈도은 마드러내지 아냐도 대요.”
안드레아는 은우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래, 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이올린을 잘 켜느냐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아. 그것보단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더 소중한 건데. 나도 이제부턴 내 재주를 자랑하기보단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연주를 하겠어.”
***
촬영이 끝나고 은우는 호텔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 이탈리아의 와인은 최고라니까.’
창현은 감독인 크리스토퍼와 와인을 한잔하더니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빠가 잠이 들다니. 이런 횡재가.’
은우는 재능창을 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체력 레벨 1 – 999 /1000]
‘지금 당장이라도 내 손에서 떠나가 버릴 것만 같네. 오늘 촬영을 무사히 마쳐서 다행이긴 한데. 아기의 몸을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은 내가 지금껏 만났던 재능 중 가장 최고였어.
아기의 몸은 너무 불편해. 귀엽긴 하지만 노래도 예전처럼 긴 시간 부를 수도 없고 말이지.’
은우는 전생에 파리넬리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땐 몇 시간씩 노래를 불러도 끄떡없었는데, 지금은 30분도 쭉 부르는 건 힘이 드니까. 뮤지컬을 할 때도 그랬었지.’
은우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그래, 생각해보면 전생에 나는 매일매일 노래 부르는 연습을 했었어.
아기의 몸이라 불편한 것도 있지만, 연습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울림통이 작은 건 극복하기 어렵지만, 그건 성장하면서 저절로 극복이 될 테고.
우선 노래 연습을 해야겠다. 매일매일.’
작은 해결책이나마 찾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은우였다.
***
크리스토퍼는 새로운 영화의 홍보 방법을 연구 중이었다.
“모두가 웃고 즐길만한 홍보 방법이 없을까?”
“은우가 귀여우니까 은우를 찍어서 올려보는 게 어때? 너무 딱딱한 거 말고, 쉬는 시간의 은우를 찍는다든지?”
에릭이 의견을 제시했다.
“나쁘진 않은데, 이미 그런 영상들은 많이 있어서 식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일 중요한 건 영상의 질이지. 일단 찍고 편집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되잖아.”
“그래도 뭔가 참신한 게 필요한데.”
그때 옆자리의 스태프가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이 메신저 써보셨어요? 랄톡이라는 메신저인데, 메신저 시작할 때 30초 정도 짧은 영상을 올릴 수 있어요. 요새 10대들 사이에서 이게 유행이라는데. 여기 올려보면 어때요?”
“그거 참신한데.”
“에디. 쉬는 시간에 은우 좀 자연스럽게 찍어줘요. 촬영하는 것처럼 티 내지 말고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의 느낌으로 부탁해요.”
“릴리. 에디 영상 받아서 편집하고 나에게 넘겨요. 내가 랄톡에 올리기 전에 최종점검할 테니까.”
카메라맨 에디는 쉬는 시간이 되자 자연스러운 은우의 영상을 찍기 위해 은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은우는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베르토 아저씨가 사 주신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 됐어.’
매일 다른 맛의 젤라또를 먹는 것이 은우의 큰 즐거움이었다.
“피스탸지오, 양그리먀, 리쬬(쌀).”
창현이 은우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자, 은우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슈크림 챠챠, 아슈크림 챠챠.”
젤라또 컵을 들고 앙증맞게 뱅글뱅글 도는 아슈크림 댄스.
“먀디떠더 챠챠.”
작은 수저로 한 입 맛보고는
“햄보케셔 챠챠.”
젤라또 컵으로 물결을 만들며 다시 한 번 빙그르.
“야슈크림 챠챠, 야슈크림 챠챠.”
조용히 찍고 있던 에디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젤라또를 이렇게 귀엽게 먹을 수 있다니. 분명히 이건 큰 히트를 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