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세상이여, 내가 간다 (3)
은우의 공연을 본 기자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신의 목소리. 대한민국의 어떤 뮤지컬 배우도 이와 같은 감동을 선사한 적은 없었다.
- 꼭 한 번 봐야만 하는 인생 공연. 아기 뮤지컬이지만 전 연령대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공연.
- 은우는 우리 마음속에 잊고 있던 용기, 꿈을 일깨워준다. 사랑스러움과 열정 모든 것을 보여준 무대.
- 돈이 아깝지 않은 무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은우가 당신에게 선사할 것이다.
뮤지컬 업계의 반응도 대단했다.
“축하해요, 셀린 씨. 지난번 ‘여자의 자격’ 예능 출연 뒤부터 계속 홈런이네.”
“고마워요. 근데 이번 건 나보다는 은우가 잘 해줘서 그런 거라.”
“은우 같은 대단한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참, 그런데 혹시 은우 또 뮤지컬 할 생각 없대요? 우리 작품에도 좀 출연해 줬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요즘 아마 온갖 대본이 다 몰려들고 있는 것 같던데. 제가 캐스팅할 때도 그랬었거든요. 아마 지금은 그때보다 더하겠죠?”
“그렇겠네요. 아마 몸값도 많이 올랐겠다. 괜찮은 배우는 계약을 하기가 힘들고, 작품성만으로 승부하자니 홍보가 힘들고. 진퇴양난이네.”
“잘 되겠죠. 아니면 제2, 제3의 은우를 찾아봐도 좋을 거 같고요.”
“맞다. 아기 뮤지컬 배우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것 같아요. 오디션이라도 열어볼까요? 혹시 알아요? 재능 있는 누군가가 올지.”
“그래요. 찾아봅시다.”
은우의 팬들 사이에서는 ‘별을 사랑하는 마법사’의 티켓을 구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은우가 나오는 공연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야 해.’
‘은우 공연 2번 더 예매해야지.’
***
에릭은 은우를 만나기 위해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도 크고, 어디서나 와이파이도 팡팡 터지고. 생각보다 멋진 곳인데.’
에릭은 은우만큼이나 은우가 살고 있는 나라와 도시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준비된 리무진을 타고 ‘열정 떡볶이’로 향했다.
열정 떡볶이는 한창 손님맞이로 바쁠 시간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금발의 백인이 열정 떡볶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창현은 그가 에릭임을 눈치챘다.
“Nice to meet you.”
창현이 할 수 있는 영어는 딱 거기까지였다. 다행히 창현의 옆에는 통역을 해 줄 최지은의 친구 전교 1등 전미나가 함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은우와 은우 아버님을 대신해 통역을 맡을 전미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 아기가 은우인가요?”
에릭은 첫눈에 은우를 알아보았다. 통통하고 뽀얀 피부. 작고 오뚝한 콧날. 크고 맑은 눈망울.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가 에릭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양적이라고 하기엔 서양적이고, 서양적이라고 하기엔 동양적인 외모군. 머리 색만 바꿔도 충분히 파리넬리의 아역으로 통할 거야.’
에릭은 은우를 보면서 어느새 꼬마 파리넬리를 연상해 보고 있었다.
한편, 은우는 에릭을 보면서 생각했다.
‘작곡가라고 했던가. 그 음악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느껴보고 싶군.’
은우는 에릭이 들려줄 음악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자신의 전생을 다시 영화화한다고 하니 그 생각이 기특하기도 했고.
‘만약 내가 전생의 파리넬리라는 것을 안다면 나에게 사인이라도 받고 싶어 하겠지.’
에릭은 은우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서 가장 걱정해 왔던 이탈리아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여긴 너무 시끄러운데, 근처에 조용한 곳이 있다면 장소를 옮길 수 있을까요?”
“네, 근처에 조용한 커피숍이 있습니다.”
마침 창현은 근처의 한 커피숍을 열정 분식집 5호점으로 점찍어놓은 상태였다. 현재는 장사가 잘되지 않는 가게라 손님이 많지 않으니, 에릭과 만나기에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미리 연락을 취해둔 상태였다.
에릭과 은우, 창현, 최지은, 전미나는 함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우의 노래를 듣자마자 은우가 파리넬리의 어린 시절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확신했어요. 유일한 걱정은 은우가 어리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어느 정도까지 소화할 수 있을지가 캐스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은우를 보러 온 것은 그것 때문이에요.”
에릭은 설명을 마치고 휴대폰에서 음악을 틀었다.
“La scia ch'io pian ga, la du ra sorte 라 시야 키오 피안 가 라 두 라 소르테
e che so spiri la liberta 에 케 소 스피리 라 리베르타”
은우는 노래를 듣자마자 울컥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백만 번도 넘겨 울려 퍼졌던 그 음악. ‘울게 하소서’였다.
그 음악이 끝났을 때, 커피숍 안에는 이번 세기에 한 번도 울려 퍼진 적 없던 진짜 ‘울게 하소서’가 은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La scia ch'io pian ga, la du ra sorte 라 시야 키오 피안 가 라 두 라 소르테
e che so spiri la liberta 에 케 소 스피리 라 리베르타”
은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울게 하소서’를 듣고 에릭은 매우 놀랐다.
‘분명 같은 악보를 불렀는데 창법이 달랐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창법이었어. 전설 속의 파리넬리가 살아서 온다면 저렇게 불렀을 거야.’
7-8살의 어린 남자아이를 거세하여 남성에게 여성과 같은 고음을 내도록 만들었던 카스트라토는 19세기 이후 법으로 양성이 금지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로는 그 발성법 역시 사라진 상황이었다.
‘지금까지의 노래도 훌륭했지만, 방금 들은 이 곡은 마치 은우가 파리넬리 역을 연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야. 게다가 이태리어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을 텐데. 발음이 너무도 훌륭했어.’
에릭이 말했다.
“잘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어를 걱정했는데, 은우가 너무도 훌륭하게 불러주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네요. 혹시. 다른 언어도 잘하나요? 영어라든지.”
“시켜본 적은 없지만, 갓난아기일 때부터 들은 노래를 곧잘 따라 했어요. 말로는 하지 못하는 단어도 노래 가사로는 부르곤 해서. 아무래도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그런 듯해요. 이탈리아어는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창현의 입가에는 은우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표현하는 미소가 묻어났다.
“은우는 여러 가지로 천재 같아요. 축복받은 재능이네요.”
에릭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음악에 대한 집념으로 걸어온 35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났던 많은 음악인들. 그 속에서도 은우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에릭은 은우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크리스토퍼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토퍼. 우리 영화 대박 날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은우를 만나러 간다더니?”
“은우가 이탈리아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해. 게다가 노래 실력이 너투브로 들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아. 은우를 만나고 나니 악상이 안 떠올라서 고민하던 메인 곡도 여기서 작곡할 수 있을 것 같아. 촬영 준비는 잘 돼가고 있어?”
“그럼. 모두 차질없이 잘 돼가고 있어. 에릭이 극찬할 정도라면 더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이탈리아에서 만나자.”
에릭은 크리스토퍼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작곡을 시작했다. 은우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은 ‘위대한 목소리’의 메인 곡 ‘세상을 움직이는 음악가’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에릭은 창현, 은우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은우는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발달했다니. 파드와일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렇게 다른 세상이 있을 줄 몰랐어.
이렇게 높은 하늘 위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그런데 식사를 가져다주는 스튜어디스 누나들은 하나같이 천사처럼 예쁘네.’
스튜어디스가 은우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머, 은우다. 어, 은우 맞죠? 그쵸?”
“내일도 사랑해 잘 봤어요. 별을 사랑하는 마법사 뮤지컬도 2번이나 봤는데. 은우가 우리 비행기에 타다니 영광이야.”
스튜어디스와 스튜어드 사이에서 은우의 탑승은 단연 화제가 되었다.
은우는 옆자리에 앉은 아기가 요거트 과자를 먹는 것을 보았다.
“아빠, 은우는 과자 없어요?”
창현은 고민했다.
‘은우가 요즘 들어 과자만 찾고 밥을 잘 안 먹어서 큰일이야. 한창 커야 할 시기인데. 엄마들 말로는 과자를 많이 먹으면 아토피에 걸리기도 한다던데.’
창현이 말했다.
“은우야, 요새 너무 군것질을 많이 해서 안 돼. 그리고 조금 있으면 비행기에서 식사가 나오니까 그때 밥을 먹자.”
은우는 아빠에게 서운했다.
‘다른 엄마는 과자도 챙겨오는데. 나도 요거트 과자 먹고 싶은데. 저거 너무 맛있는데.’
결국, 은우는 화가 났다.
“아빠, 너! 그러면 은우갸 슬프자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은우의 표정에 창현의 마음이 흔들렸다.
‘은우가 저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는데 내가 좀 너무했나. 잘 먹이고 싶은데. 잘되진 않고 참 어렵다 어려워. 아기 키우는 거.’
그때 옆자리의 아기 엄마가 말을 건넸다.
“혹시 은우 아니에요? 아기들은 외국에 나가도 먹던 과자를 더 좋아해서 제가 좀 넉넉히 챙겨왔어요. 이거 주세요.”
아기 엄마가 창현에게 요거트 과자 한 통을 주었다.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비싼 것도 아닌데요. 저희 가족도 은우 팬인걸요. 은우가 먹어주면 좋죠.”
그렇게 얼떨결에 요거트 과자 한 통이 생겼다.
창현은 결국 요거트 과자를 열어 은우에게 주었다.
“아빠가 졌다. 먹으렴.”
은우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내갸 아빠를 그러케 죠아해.”
창현은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네가 좋다면야. 아빤 네가 좋기만 하면 행복해.
근데 요즘 들어 ‘그렇게’라는 단어 자주 쓰네. ‘그렇게’를 강조의 의미라고 생각하나 보다, 은우는.’
***
은우의 숙소는 피렌체의 한 호텔이었다. 배가 나온 쉰 살 정도 되는 인자한 할아버지 호텔리어가 창현에게서 캐리어를 받아들자, 자연스럽게 은우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라치에(고마워요).”
호텔리어가 은우의 인사에 방긋 웃었다.
‘혹시, 은우가 언어 천재는 아닐까.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학원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똑똑한 은우가 교육에 관심 없는 아빠를 만나 뒤처지는 건 아니겠지.’
자신을 대신해서 인사를 하는 은우가 대견하면서도 생각이 복잡해지는 창현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은우를 배려하여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예약해 주었다.
오랜 비행 탓에 은우는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은우는 시차 때문에 몸이 피곤했지만, 곧 다시 정신을 차렸다.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해선, 대본을 외워야 해. 이건 한국에서 찍었던 드라마와는 달라. 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
은우가 대본을 쥐었을 때 투구를 쓰고 창을 든 건장한 새로운 신이 모습을 나타냈다.
남성미가 넘치는 신의 목소리는 세상 어떤 소리보다도 힘찼다.
“나의 축복을 받는 자여, 너는 강철보다 단단한 심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체력 레벨 1 – 0 / 1000
당신의 체력이 당신이 원하는 만큼 늘어납니다.]
은우는 때마침 나타난 아레스의 재능에 감사를 표했다.
‘아기의 몸이 체력적인 면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은우는 정신을 차리고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대본은 영어와 이탈리아어 두 가지로 준비돼 있었는데, 은우는 이탈리아어 대본을 보았다. 한글 대본은 창현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탈리아어 대본은 혼자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좋구나.’
은우는 자신에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힌두교의 신, 마하 칼리가 고마웠다.
마하 칼리의 선물은 2번의 전생을 기억하는 것.
한 번의 전생은 파드와의 기억.
두 번째의 전생은 파리넬리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