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내가 하면 뜬다 (4)
노련한 백수원은 무쇠 가마솥 아래의 불길을 살려냈다. 프로다운 칼질을 보여주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은우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수원의 칼질이 빚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화음 같아.’
은우는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어 놓고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또옥똑(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탁탁탁(도마 위 칼질 소리).”
“퉁퉁퉁(은우가 손바닥으로 프라이팬 바닥을 쳐서 박자를 맞추는 소리).”
은우의 행동을 본 정후석의 눈동자가 커졌다.
‘은우는 분명 음악 신동일 거야. 이런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소리를 찾아내다니.’
요리를 하는 데 정신이 팔렸던 백수원은 은우의 페트병 소리를 듣고 빈 도마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요놈 봐라. 특이한데. 내가 좀 도와주지.’
순간 은우가 페트병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더 다양한 소리가 필요해.’
백수원은 칼질을 멈추고 은우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은우는 요리를 하려고 꺼내놓았던 유리그릇과 컵을 가지고 와 생수통에 있던 물을 따랐다. 물 높이는 각자 달랐다. 옆에 있던 쇠젓가락을 집어서 한 번씩 음을 쳐보았다. 그리고 물 높이를 다시 조절했다.
‘자, 이제 준비가 됐어.’
은우가 백수원에게 눈짓을 했다. 백수원이 다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똑똑똑(가림막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탁탁탁(도마 위 칼질 소리).”
“따따따 따따(유리컵이 만들어 내는 멜로디).”
PD는 은우가 만들어내는 멜로디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비 온 이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차 시청률은 은우가 다 올려주는구나. 게다가 유리컵으로도 저렇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니. 교육방송 EBD도 아닌데 이렇게 교육적이라니.
내 PD 인생 10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야.’
백수원은 은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난 단지 규칙적으로 칼질을 할 뿐인데, 그 리듬에 맞춰 다른 소리들을 배열하고 있어.
색깔이 없는 칼질 소리에 다른 소리를 배합해서 새로운 빛깔을 만들어내다니.
내가 요리의 장인이듯이 은우는 소리의 장인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은우의 앞날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빛날 것이다.’
은우의 음악 소리를 들은 새들이 촬영을 하고 있는 작은 농가 주택의 마당 안으로 모여들었다. 새들은 가림막 아래에 앉아 은우가 만들어내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짹짹짹(참새).”
“따옥 따옥 따옥(따오기).”
“까까까(까치).”
서로 다른 종류의 새들이 사이좋게 앉아 만들어내는 화음에 촬영장 안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예능일까? 콘서트일까?’
‘내 평생 들었던 어떤 음악보다도 훌륭한데.’
‘사람이 만들어내는 음악도 아름답지만,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다니. 이건 정말 레전드야.’
***
크리스토퍼는 에릭이 보낸 은우의 영상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천상의 목소리라 일컬어지는 파리넬리의 아역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은우의 목소리는 빼어났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의문이 남았다.
‘이 작은 동양의 아기가 과연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에릭의 생각과는 다르게 크리스토퍼는 파리넬리의 아역을 맡을 배우를 선정할 때 노래 실력보다는 연기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5여 년 전 만들어진 영화 ‘파리넬리’에서도 파리넬리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가 없어 파리넬리의 노래는 여성 소프라노와 남성 카운터테너의 목소리를 컴퓨터로 합성하여 넣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파리넬리의 목소리는 전설로만 남아있었다.
아름답지만, 누구도 실체를 알 수 없는.
크리스토퍼는 에릭에게 메신저로 말했다.
- 노래는 정말 잘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을까? 동양에서 태어난 데다 나이가 너무 어려.
- 나도 그 부분이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할 거 같아. 우리 영화는 뮤지컬 영화니까 노래가 정말 중요하단 말이야.
- 시간 낭비일 것 같아. 확률적으로 생각해 봤어? 저 나이의 아기는 자기 나라 말도 간신히 할 텐데.
- 난 저 아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만약 파리넬리가 살아있었다면 저런 목소리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 안되면 목소리를 따와서 컴퓨터 작업을 해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에릭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크리스토퍼는 파리넬리의 삶을 영화화하는 이번 ‘위대한 목소리’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로 에릭을 꼽고 있었다. 파리넬리의 삶은 이미 25년 전에 ‘파리넬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호평을 받았었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 여러 국제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고, 관객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영화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크리스토퍼와 에릭 역시 ‘파리넬리’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파리넬리’ 영화는 파리넬리의 거세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지. 그의 삶이, 그의 운명이 비극적이기만 했을까. 나는 파리넬리의 삶을 다른 관점으로 다뤄보고 싶어.’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만났던 영화동아리에서 에릭은 크리스토퍼의 생각에 가장 크게 공감해 준 친구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함께 찍기로 한 영화가 바로 ‘위대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
은우는 자신의 앞으로 들어온 대본을 보리와 함께 살펴보는 중이었다. ‘내일도 사랑해’의 시청률 고공행진과 베베드림의 옷 완판, 정후석과 함께 출연한 하루 세끼도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면서 예능과 드라마, 아동 대상 프로그램의 섭외 1순위가 은우가 되었다.
은우의 앞에는 다양한 대본이 놓여있었다.
‘밤마다 아빠와 삼촌이 대본을 보고 차기작을 고민하는데, 그래도 난 내가 출연할 작품이니 내 스스로 결정해 보고 싶어.’
[올림포스의 동물의 신 판의 동물과의 의사소통능력 레벨 2 - 0 / 10000]
‘이제 동물과의 의사소통 능력은 보리와만 써야겠어.
보리와 매일 함께 있으니까 보리와만 이야기해도 충분히 레벨업도 할 수 있고 말이지.
보리를 내 전속 매니저로 써야지.
나름 전생에 유능한 수학자였다고 하니 유용하지 않을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보리가 먼저 대본을 살펴보고 은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멍멍.(이건 사극 대본인데 박혁거세의 아역이군. 역사물이라 재밌어 보이긴 하는데, 어때?)”
“조긍 어렵지 아느까?”
“멍멍.(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해.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자연스럽게 평범한 현대 아기의 역할을 맡거나, 아니면 주특기인 노래를 부르거나. 이런 쪽이 좋을 거 같긴 한데.)”
보리가 한참 대본을 뒤적거리다가 이거라는 듯이 말했다.
“멍멍.(그럼 이제 현대 아기의 역할 위주로 추천할게. 드라마 제목은 ‘재벌집 막내로 환생했다’의 아기 재벌역이야. 아기가 회사에 간다는데, 너 정장 입어볼 수 있겠다. 어때?)”
“음, 그건 팬드리 원하능 모스비 아냐.”
“멍멍.(그건 그래. 조금 징그러울 수도 있고. 자, 이건 어때? 제목은 ‘네 남자와 아기’ 바람둥이이자 독신인 네 남자가 사는 집에 누구의 아기인지 모르는 아기가 맡겨지는 거야. 네 남자는 처음에는 아기가 부담스럽고 싫지만, 점점 아기를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야. 너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어필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더 자라면 하기도 어렵고 말이지?)”
“마으메 등긴 하는데. 다릉 건?”
“멍멍.(이거 좀 새롭다. 뮤지컬 어때? 아기들을 대상으로 하는 뮤지컬인데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래. 니가 맡은 역할은 아기 마법사야. 관객들이 별자리를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돔으로 된 상영관에서 진행된대. 와아 재밌겠다. 여기 뒤에 악보도 있어.)”
은우가 손을 뻗어 ‘별을 노래하는 아기 마법사’의 악보를 보았다.
“나나나나나나나.”
은우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멍멍.(노래 너무 좋은데)”
비록 가사는 읽을 수 없었지만, 선율만으로 좋은 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먀메 꼭 드러.”
은우는 드디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다는 즐거움에 박수를 쳤다.
‘스타로서 제대로 된 이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작품을 고르는 눈도
중요하니까.’
은우는 자신의 작품 이력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은우가 ‘별을 노래하는 아기 마법사’의 대본을 만졌을 때, 새로운 신이 은우의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달그닥 달그닥.
하늘을 달리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가 은우를 향해 ‘달그닥달그닥’ 발굽 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려왔다.
“신들의 가호를 받는 아이야, 내가 너를 축복하노니.
너는 나의 권능을 이어받아 너의 상상을 사람들에게 시각화할 수 있다.
너의 상상을 본 자 아름다움에 황홀해할 것이며,
너의 상상을 본 자 그 화려함에 넋을 놓을 것이며,
너의 상상을 본 자 그 감동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
[올림포스의 천마 페가수스의 시인의 상상력 레벨 1 – 0 / 1000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 앞에 현실처럼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은우는 새로 생긴 재능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보리를 탐정으로 만들어볼까.’
은우는 보리가 시가를 입에 문 채, 책상에 앉아 열심히 범인을 쫓는 사설탐정이 된 상상을 했다.
순간, 보리의 눈앞에는 자신이 바바리를 입고 중절모자를 쓴 채 범인을 쫓으러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또다시 환생을 한 것인가. 그래도 다행이야. 이번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범인이 빠르게 도망을 쳤다.
“거기 서.”
보리가 빠르게 달려서 범인의 뒷다리를 물으려고 하는데.
‘앗, 뭐야. 왜 물지? 난 사람이야? 개야?’
정신을 차린 보리는 자신의 앞발을 내려다본 뒤 한숨을 쉬었다.
‘꿈이었나. 이상하네. 대낮에 꿈이라니. 졸리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너무 아쉽다.’
은우는 보리에게 미안했지만, 페가수스가 선물한 재능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재능 놀라운데.’
은우는 퇴근한 창현에게 ‘별을 노래하는 아기 마법사’의 대본을 가지고 갔다.
“아빠, 저 이거 하고 시퍼요.”
창현은 은우가 가져온 대본을 천천히 살펴보곤 놀랐다.
‘은우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연기력이 돋보일 수밖에 없겠어. 게다가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이미지가 은우에게 매우 잘 어울려.’
창현은 은우가 어떻게 대본을 읽었는지 의아했다.
‘은우는 한글로 고작 자기 이름 쓰는 게 다인데. 이 긴 대본을 다 어떻게 읽었지?
또래에 비해 암기력이 좋긴 하지만.
그동안은 내가 대본을 읽어주면 그걸 녹음해서 듣고 외우곤 했는데.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걸까?’
창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이거 무슨 내용인지 알아?”
“아기 먀법샤가 벼레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거요.”
창현은 예상과는 다른 은우의 반응에 놀랐다.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그새 혼자서 한글을 깨우친 걸까.
일단 내일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봐야겠어. 그런데 연기에 이어 뮤지컬이라니? 어쩜 은우는 스스로 여러 가지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 걸까.’
창현은 은우가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겠다고 할 때마다 은우의 적극적인 성격과 도전정신에 놀라곤 하였다.
‘난 늘 새로운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앞서곤 했는데 은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내 아들이지만, 나랑 정말 달라.
은우에게 자극도 받게 되고.
그리고 당시엔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은우의 선택이 마치 슈퍼스타라는 하나의 청사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창현은 뮤지컬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미팅 날짜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