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세상의 모든 은우를 위해 (3)
‘내일도 사랑해’는 이미 첫 방송부터 순조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김진호 PD가 백수희에게 칭찬의 말을 던졌다.
“백수희 씨 좋겠어. 요새 시청자 게시판에 온통 백수희 씨 연기 칭찬이야.”
“그래. 차가운 도시녀인 줄만 알았더니 촌스럽고 실수 잘하는 미혼모 역할도 잘 어울린다고. 연기 변신 성공이야.”
옆에 있던 카메라 감독도 거들었다.
“이제 얼굴만 예쁜 배우라는 평은 벗어야죠.”
백수희가 대답했다.
“나를 만나서 연기 인생에 확실한 터닝 포인트가 온 거라니까.”
김진호 PD가 잘난 체를 했다.
“대본이 좋아서죠.”
백수희가 정우리 작가를 칭찬했다.
“오 저기, 은우가 오네.”
정우리 작가가 은우를 알아보았다.
백수희가 은우에게 오늘 촬영할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은우야, 오늘 누나랑 같이 김밥 싸는 걸 할 거야. 내일 은우가 소풍 가거든. 그리고 은우 드라마 속에서 이름이 준호야. 그리고 누나는 은우 엄마야.”
은우는 엄마라는 단어에 마음이 설렜다.
은우에게는 늘 ‘할미’와 ‘눈나’만이 있었는데, 연기지만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는 대상이 생긴 것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작은 투룸에 펼쳐진 커다란 상. 그 위엔 김, 단무지, 햄, 당근, 오이, 밥, 유부가 놓였다.
“자, 우리 준호(은우) 엄마랑 같이 김밥 싸 볼까?”
백수희가 먼저 시범을 보이듯 예쁘게 김밥을 말았다.
“와, 잘한다.”
은우가 백수희가 만든 김밥을 보며 박수를 쳤다.
이번엔 은우의 차례.
은우가 작은 손으로 백수희가 펴준 김과 밥 위에 단무지, 햄, 당근, 오이를 놓았다.
그리고 김발로 김밥을 둘둘 말았다.
김발을 펴는 순간, 힘이 약해서인지 말리지 않고 다시 해체되는 김밥.
“엄마, 김바비 사이조케 지내기 시테요(엄마, 김밥이 사이좋게 지내기 싫대요.)”
백수희는 은우가 너무 귀여웠다.
‘단무지, 햄, 당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보네. 사이좋게 지내기 싫다니.’
백수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엄마가 친하게 지내게 해줄게요.”
백수희가 은우의 김밥을 다시 힘을 주어 꾹꾹 눌러 김발로 말았더니 김밥 완성!
“엄마, 체고(엄마 최고)!”
“이번엔 혼자 해볼게요.”
은우가 다시 백수희가 펴준 김과 밥 위에 단무지, 햄, 당근, 오이를 놓고 김발로 둘둘 말았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힘을 주느라고 표정까지 일그러졌다.
“힘힘!!!”
백수희도 은우의 김밥을 응원하였다.
은우는 김발을 들고 마치 올림픽에라도 출전한 듯 신중한 표정으로 거듭해서 김발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김발을 벗겨내자 드러나는 은우의 김밥.
“엄마, 터져써요.(엄마, 김밥이 터졌어요.)”
처음 것보단 발전했지만, 재료를 많이 넣은 탓인지 김밥은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아이, 참. 왜 앙대지(왜 안 되지)?”
“그래도 잘했어.”
백수희가 은우를 칭찬했다.
“하하하하하.”
백수희와 은우가 터진 김밥을 보면서 함께 웃었다.
[그리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우라. 레벨 2 - 330/10000]
카메라 감독은 은우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에 반했다.
‘저렇게 이쁜 아기라니.
보통은 카메라로 잡으면 실물보다 안 예쁜 게 정상인데 너무 예쁘잖아.
하얀 피부는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의 아기라도 해도 믿을 정도야.
무엇보다 저 풍부한 표정.
아기만이 낼 수 있는 천만 가지의 표정.
좋음과 싫음을 꾸미지 않는 표정.
마치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잖아.
은우가 ’엄마, 엄마‘하고 백수희를 부를 때면 마치 내가 은우가 되어 백수희를 부르는 것 같다니까.’
김진호 PD는 다시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주던 요리박사 엄마.
재밌는 장난감도 잘 찾아주던 만능박사 엄마.
화장대 앞에서 예쁘게 변신하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엄마.
은우의 ‘엄마’라는 단어는 내게 잊고 있던 ‘엄마’라는 단어의 벅차오름을 떠올리게 했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그 이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이름.’
은우와 백수희는 김밥을 다 만들고 유부초밥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자, 여기 귀를 붙여보자.”
백수희가 유부초밥에 귀를 붙여주고 있었다.
백수희가 만든 것은 리락쿠마 유부초밥.
캐릭터를 좋아하는 아기들의 특성에 딱 맞춘 것이었다.
눈과 코를 붙이니, 백수희의 손 안에서 귀여운 리락쿠마의 얼굴이 탄생했다.
“와, 엄마. 마버비예요.(엄마 마법 같아요.)”
은우는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고마스니다.(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엄마.”
은우가 유부초밥을 하나 들어서 백수희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 맛있어, 우리 준호(은우)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네.”
“엄마가 돼주셔서 고마스니다.”
마지막 대사는 대본에도 없던 대사.
은우의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수희는 무언가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은우도 엄마가 그리웠을지도 모르겠구나.’
백수희의 마음이 저려왔다.
백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은우를 와락 껴안았다.
‘아가. 소중한 나의 아가.’
백수희는 자꾸만 ‘내일도 사랑해’가 드라마가 아닌 것만 같았다.
PD는 은우와 백수희가 만들어낸 대본에도 없는 장면에 놀랐다.
‘대본에 있는 건 엄마와 아들의 사랑스러운 일상 정도였는데, 이건 잔잔물에 갑자기 CG 들어간 느낌이네.
처음 김밥을 마는 장면도 원래 대본에서 읽었을 때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는데. 오늘 은우와 백수희가 함께 찍으니 김밥을 마는 것조차 엄마와 아기의 사랑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변했어.
마지막에 은우가 추가한 엄마가 돼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대사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해.
두 사람 정말 엄마와 아들 같아.’
“세상에 한 번도 NG가 없었어. 저 어린 아기가.”
“백수희 씨 표정 봤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표정이던데. 특유한 시크한 그 표정 어디로 간 거야?”
“두 사람 케미가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이번 작품 대박 터지겠다.”
스태프들은 앞다투어 은우와 백수희의 연기를 칭찬했다.
백수희도 자신의 이런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늘 연기를 할 때 대본을 먼저 분석하고, 분석한 것에 따라 달달 외웠었어. 꿈에서도 대사가 생각날 정도였지.
시청자들은 늘 같은 연기를 한다고 지적했지만, 나한텐 그게 최선이었어.
오늘 처음 분석이 아니라 내가 정말 이채아가 된 기분이었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낳은 준호(은우)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일상의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는 씩씩한 이채아.
백수희는 이채아를 연기하면서 창현에 대해 생각했다.
‘창현 씨도 은우를 볼 때 이런 기분일까.’
백수희는 전에도 은우가 예뻐 보였지만, 지금은 애절하고 애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은우와 백수희의 촬영분이 방송되자, ‘내일도 사랑해’의 시청률이 3포인트 상승했다.
방송국 게시판의 댓글도 그 인기를 증명했다.
- 연기가 아니라 진짜 모자 사이 같은데.
- 백수희 씨 숨겨둔 아들 아님? 생긴 것도 좀 닮지 않았음?
- 아흑흑. 아기가 백수희 씨 먹여줄 때 너무 부럽더라. 진짜.
- 준호 형광색 옷 입은 거 봤어요? 형광색이 잘 어울리기 정말 힘든데. 무슨 아기가 그리 존잘임. 얼굴 천재.
- 두 사람의 꿀눈빛 교환. 아기 미소 진짜 미쵸.
- 저 아기 은우인데 이미 너투브에서 유명해요. 노래 너무 잘해요. 찐보이스.
은우는 드라마가 방송되고 나서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우라. 레벨 2 – 10000/10000]
‘레벨업이라니.
드라마 찍을 때 PD님, 카메라 감독님 등 스테프들에게서 숫자가 막 올라가고, 또 방송이 나갈 때 시청자들에게서도 숫자가 막 올라가니 레벨업이 어려운 일도 아니구나.
아프로디테의 아우라 레벨 2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는걸.’
***
창현은 김민석 변호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저 김민석입니다. 다음 주에 판사 대면이 예정돼 있어요. 그날 판사의 결정에 따라 은우가 사랑이법의 적용을 받을 것인지가 결정될 거예요.”
창현은 불안한 마음에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우의 너투브와 별스타에 은우의 상황과 관련한 장문의 글을 남겼다.
- 안녕하세요. 은우 아빠 창현입니다.
은우는 엄마가 없어서 아직 호적을 가지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기의 호적 신고는 엄마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은우와 같은 경우는 재판을 통해서만 저의 호적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국선 변호사님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다음 주 판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은우가 사랑의법의 적용을 받아 호적을 얻을 수 있을지가 결정이 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신께 기도드리고 싶은 심정이네요.
많이 응원해 주세요.
은우의 팬 중에는 대한신문사의 서지연 기자도 있었다.
서지연 기자는 은우로 인해 사랑이법과 미혼부들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런 게 사회부 기자로서 꼭 해야 할 일이지.’
서지연 기자를 은우를 위해 기획기사를 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은우가 다니는 천사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서지연 기자는 이태석 신부를 인터뷰했다.
“그러니까 미혼부들의 현실이 정말 심각하군요.”
“네, 창현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이런 문제를 많이 겪고 있어요. 보통 사람들이 미혼모보다 미혼부들의 경제적 현실이 나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도 아니거든요. 미혼부들도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으면 직업을 그만둬야 하는 경우도 많아요. 사회적 편견도 심하구요.”
“창현 씨가 그런 사회적 편견의 희생양이었군요.”
“네, 안타깝죠. 저희 천사들의 집에서도 이번 일을 계기로 미혼부들에 대한 지원도 더 늘려보려고 고민 중이에요. 그동안 후원도 적고 해서 미뤄뒀던 일인데, 더는 미뤄둘 수 없을 거 같네요.”
“저출산 저출산 하면서. 정작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호적을 주지 못 한다니 문제네요. 만약 아기가 출생신고를 못 하면 나라에서 주는 복지혜택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말이죠.”
서지연 기자는 이번 기회에 미혼부의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
- 법의 사각지대에서 울고 있는 미혼부들, 모성 말고 부성은 없는 건가요?
서지연 기자의 인터넷 기사를 발견한 것은 ‘러브파파’의 회원들이었다.
‘러브파파’는 창현과 같이 출생신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혼부들의 모임이었다.
‘러브파파’의 모임장 현진파파는 기사를 보자마자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걸 카페 회원들에게 알려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어려움을 사회에 알려야만 해.’
현진파파는 도윤파파에게 카톡했다.
- 여기,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기사가 있어.
- 읽었어. 눈물 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야.
- 미혼모에 비해 지원도 없고. 또, 사람들이 남자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죠.
- 그치? 부모님 도움 없으면 애 맡길 곳 못 구해서 회사 잘리고 생계 걱정하게 되는 건 미혼모나 미혼부나 다를 게 없는데.
-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몰라요. 우리 움직입시다.
- 그래. 내가 가성맘카페에 퍼다 나를게.
- 전 어얼리어답터카페에 퍼다 나를게요.
기사는 ‘러브파파’의 회원들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퍼지기 시작했다.
서지연 기자의 인터넷 기사 밑에는 많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있다니?
- 은우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다음 주에 가정법원의 판결이 있다는데 만약 사랑이법이 적용 안 되면 은우는 호적을 못 가지나요?
- ‘내일도 사랑해’ 드라마 얘기가 어느 정도는 진짜였네. 은우가 미혼부의 아기였다니. 근데 미혼모의 아기보다 미혼부의 아기가 더 상황이 안 좋네요.
- 지 자식 버리고 간 엄마란 년은 어디 가서 뭐하며 살지. 천벌을 받아라.
혜린의 엄마는 우연히 인터넷을 하다가 은우의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지난번 혜린이 아빠 일도 그렇고, 늘 은우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는데. 이번 기회에 은우를 도와야겠어.
인터넷 카페에 퍼다 나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맞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있었지.
여기에 청원을 발의하고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면 더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은우가 사랑이법의 적용을 받을 확률도 높아지고.’
혜린의 엄마가 은우를 위해 정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을 발의했다.
은우의 너투브 팬들과 열정 떡볶이의 단골들, 천사들의 집의 미혼모들, ‘러브파파’의 회원들이 열심히 서명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품 카페에서.
맘 카페에서.
취업준비 카페에서.
공부법 공유 카페에서.
반려동물 카페에서.
귀농귀촌 카페에서.
인터넷을 타고 은우의 안타까운 사연이 널리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원 참여율과 함께 은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