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19화 (19/257)

19화. 세상의 모든 은우를 위해 (2)

창현은 수화기를 든 채, 정우리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일일극에 출연할 아기가 필요해서요. 은우가 딱일 거 같은데. 엄마 역은 백수희 씨예요. 백수희 씨는 이미 오케이 하셨어요.”

정우리는 열정 떡볶이에서 떡볶이를 먹다가 보았던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믿고 드라마 작가에 지원하였다.

정우리가 쓴 ‘내일도 사랑해’라는 드라마가 이번 bbs 일일드라마에 채택되어 제작하게 된 것이었다.

정우리는 처음에 드라마를 계획할 때부터 은우의 출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일드라마에 채택돼 PD와 함께 출연진을 정할 때가 오자, 바로 창현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은우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제작진 측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구요.”

‘내일도 사랑해’는 미혼모인 백수희(극중 이채아)가 아기를 키우면서 사랑과 성공을 모두 찾는 이야기.

은우는 이 드라마에서 백수희의 아기 함준호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정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은우를 출연시키고 싶었다.

‘은우를 만나지 않았으면 드라마 작가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을 거야. 은우는 나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준 사람이야.

게다가 은우가 너무 보고 싶기도 하고. 매일매일 너부트를 보고 있긴 하지만, 너무 보고 싶어. 골목의 제왕 때 보고 못 보았으니. 너무 긴 시간이 흘렀구나, 은우야.’

창현은 은우에게 다가온 드라마 출현의 기회가 신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고민이 앞섰다.

‘드라마 촬영은 긴 시간이 걸릴 텐데, 그런 과정들이 어린 은우에게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을까.

그리고 은우가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창현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릴게요. 꼭이요.”

정우리가 팬으로서 팬심을 담아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창현은 은우에게 출현 의사를 물었다.

“은우야, 은우에게 드라마 촬영 제의가 들어왔는데 하고 싶어?”

“드랴먀?”

“백수희 누나처럼 텔레비전에 나와서 연기하는 거야. 대본이 있고 그걸 읽으면서 실재 인물처럼 연기하는 거.”

“테레비에 냐와? 햐꺼야. 햐꺼야.”

영탁이 말을 보탰다.

“요새 은우 매일 자기가 나온 영상 반복해서 보더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좋은가보다. 노래 경연대회 최우수상 영상 매일 보잖아.”

“그래, 참 신기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좋아할 줄 몰랐어.”

“내가 은우라도 신나겠다. 저렇게 예쁘게 나오는데. 은우는 화면발이 잘 받잖아.”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너무 어려서.”

“은우가 좋다는데 뭐가 걱정이야. 기회는 일단 잡고 나서 후회해도 늦지 않는다고. 은우 재능 썩히기 아까워.”

***

창현은 은우를 데리고 ‘내일도 사랑해’ 촬영장에 도착했다.

정우리 작가가 창현과 은우를 맞이했다.

“우리 은우 잘 있었쪄요? 그새 더 귀여워졌구나.”

“눈냐도 이뻐.”

“누나 칭찬해 주는 거야? 오늘 집에 가서 일기 써야겠다.”

은우는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말이 급속하게 늘기 시작했는데, 매일 어른들 사이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만 듣다가 아기들 사이에 있으니 비슷한 또래의 아기들이 어떤 식으로 말을 늘려가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우야.”

백수희가 하이톤으로 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한걸음에 은우에게 달려왔다.

‘힙시트에 앉아서 방긋방긋 웃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역시 아기들의 시간은 빨라. 나는 늙기만 하는 거 같은데.’

백수희는 오랜만에 본 은우가 걷기도 하고 말도 잘하는 것에 놀랐다.

“은우야, 이거 먹을래?”

백수희는 은우를 위해 블루베리를 준비해 왔다.

“마디뗘?”

은우가 블루베리를 보더니 백수희에게 물었다.

“응, 맛있어.”

백수희가 창현에게 물었다.

“창현 씨, 은우 이거 처음 먹어봐요?”

“아니요. 은우야, 왜 이거 전에 아빠랑 마트에 가서 사서 먹었잖아. 그치? 기억 안 나?”

은우는 골똘히 생각했다.

‘음, 이게 대체 뭐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보라색 열매. 그건 아닌 거 같고. 보라 딸기, 보라 멜론?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은우가 말했다.

“아, 이거. 아빠갸 멱꾜 십뀨냐.”

듣고 있던 백수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풉, 은우 봐요. 와, 은우 똑똑하다.”

정우리는 은우가 너무 귀엽다는 듯이 볼을 당겼다.

“아이고, 요 깍쟁이. 그러니까 내가 너를 안 이뻐하고 배기겠어.”

은우의 볼이 인절미처럼 쭈욱하고 늘어났다.

“와, 우리 은우 혼자서 귀엽고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이래도 되겠어? 혼자서 다 하네.”

김진호 PD도 은우의 귀여움을 칭찬했다.

백수희가 창현에게 말했다.

“자, 아버님. 아버님이 드시고 싶은 이 과일을 말씀해 주시죠.”

창현도 은우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응, 은우야. 아빠가 블루베리 먹고 싶었어.”

은우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밝게 웃었다.

“응, 그때 아빠량 블류베리 며겨쓸 때도 마디뗘더.”

백수희가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은우, 블루베리 다시는 안 잊어버리겠다. 그치?”

정우리 작가가 은우의 손에 뽀뽀하면서 말했다.

“아고 이뻐라 우리 은우.”

은우 덕분에 촬영장은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감독님, 저 대기하는 동안 은우랑 같이 대기실에 있을게요.”

백수희는 은우를 자신의 대기실로 데려갔다.

- 백수희 배우 대기실.

‘여기가 대기실이라는 곳이구나. 백수희 누나는 주연이라서 그런지 혼자 쓰네. 부럽다. 나도 이렇게 혼자 넓은 공간을 쓸 수도 있을까. 게다가 가구도 다 좋은 것 같아.’

은우는 파리넬리이던 시절에 값비싼 고급 가구들을 많이 보았다. 은우가 살았던 18세기의 유럽은 여러 가지 사치품이 발달했던 시대였다. 전생의 기억 탓인지 은우는 좋고 예쁜 물건을 구별해내는 안목이 탁월했다.

“은우야, 누나 연습하는 것 볼래?”

은우는 기대해 차 있었다.

‘백수희 누나는 연기를 매우 잘하겠지. 이름 있는 배우고, 요새 인기도 많으니까. 나랑도 연기하게 될 테니 많이 보고 배워야겠다.

곧 촬영이 시작될 텐데 긴장을 푸는 법 같은 거라도 있나?’

은우는 백수희의 행동에 신경을 집중했다.

백수희가 말했다.

“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공 공장장이다.

들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깐 콩깍지면 어떻고 안 깐 콩깍지면 어떠냐. 깐 콩깍지나 안 깐 콩깍지나 콩깍지는 다 콩깍지인데.

작년에 온 솥 장수는 새 솥 장수이고, 금년에 온 솥 장수는 헌 솥 장수이다.”

백수희의 작은 입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에 은우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체 이게 뭐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말이 왜 이렇게 빠르지? 설마 저게 대사인가?’

백수희가 가방에서 아이스크림 막대를 꺼내 물었다.

은우는 놀랐다.

‘대체 아이스크림도 없는 빈 막대기를 왜 무는 거지?’

백수희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문 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분은 백 법학박사이고 이분은 박 법학박사이다.

우리집 옆집 앞집 뒷창살은 흩겹창살이고, 우리집 뒷집 앞집 옆창살은 겹흩창살이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고 니가 그린 기린 그림은 안 긴 기린 그림이다.”

은우는 정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백수희 누나는 마법사가 되려고 하나? 저건 새로운 고대시대의 주문인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설마 나를 잡아먹으려는 건가? 아니면 나에게 저주를 걸려는 건가?’

백수희는 정신없이 연습을 하다가 은우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은우야, 누나가 너무 정신없이 말했지? 사람들이 누나 발음이 안 좋다고 해서 연습하는 거야. 촬영하기 전마다. 자꾸 혀짧다는 지적을 들어서.

개그 프로 같은 데서 개그맨들이 누나 성대모사 같은 것도 하고 말이야.

누나가 자꾸 딜땅님, 딜땅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순간, 은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하지? 나도 백수희 누나처럼 혀짧은 소리 잘 내는데. 맙소사 나도 저거 연습해야 하나? 근데 방금 어떻게 한 거지? 누나가 한 주문 어떻게 외운 거지?’

은우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눈나, 냐도 그려케 먀햐능데 냐도 해야 대요?”

백수희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은우는 그렇게 말하는 게 정상이지. 은우는 아가니까.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백수희는 순간 은우의 작은 마음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자기도 같은 실수를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어. 저 작은 아기가.

만약 내가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같이 연습할 기세였다니까.

암튼 대단해. 은우는 저 작은 몸에서 뿜어내는 열정이.’

백수희는 은우를 꼬옥 안아주었다.

“은우야, 발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은우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팬들이 다 예뻐할 거야.

은우는 작고 소중하니까.”

“눈냐도 쇼듕해.”

“교먀어.”

백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은우식으로 말해버렸다.

“은우야, 누나는 아직 배우로서 모자란 면이 많아. 발음 지적도 당하고, 얼굴만 예쁘고 연기는 잘 못 한다는 말도 많이 듣고. 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서 꼭 연기 잘한다는 말을 듣고 말 거야. 처음 하는 연기 변신이라 두렵긴 하지만, 너와 함께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

불면증도 심했는데 네 덕분에 불면증이 사라졌거든.

정말 고마워.”

은우는 생각했다.

‘백수희 누나는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누나에게 미안해진다. 사실 나는 신에게 받은 재능이 있어서 남들보다 더 쉽게 할 수 있는 건데. 내게 주어진 재능에 감사해야 어.

누나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빠에게 준 것처럼 재능을 줄 수 없을까?

그때 어떻게 했더니 아빠에게 소카리스의 재능이 갔는데, 기억이 안 나네.

다시 한번 해볼까?

백수희 누나는 발음이 힘드니까 아테나의 화술이 좋겠지?’

은우는 백수희에게 재능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재능창이 열리지를 않아? 왜 그런 걸까? 다시 해볼까?’

은우는 다시 재능창을 불러오기 위해 애썼다.

‘안 되네. 백수희 누나가 불면증을 극복했다는 건 부처님의 염화미소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럼 그땐 재능이 작용했다는 건데. 이번엔 줄 수가 없나?

하긴 그땐 재능을 누나가 받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까지 재능을 받은 건 아빠뿐이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재능을 줄 수 있지?

기억이 나질 않아.

하긴 난 아직 내가 받은 재능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구나.

대부분 하나의 재능을 레벨업하면 그다음 재능이 오곤 했어.

한 번 레벨업한 재능은 다시 불러올 수는 없었어.

그리고 한 번에 두 가지 재능을 불러오는 일도 되지 않고.

애초에 토르의 천둥처럼 결합 가능한 재능이 아닌 경우는 말이야.

지난번 노래 경연대회는 운 좋게 칼리오페의 감동과 아테나의 화술을 함께 썼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했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아.’

은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백수희는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근데 누나 발음 정확한 거 같아?”

“녜, 눈냐 체고.”

“고마워.”

“은우가 누나 체고라고 말해주니 신나는데.”

은우의 칭찬에 신이 난 백수희가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다.

은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누나,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네. 그치만 그 노력 꼭 기억할게요.

나중에 누나에게도 재능을 주고 싶어요.

그리고 나도 누나 배우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연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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