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
뉴욕은 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충분히 실감하는 중이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값에 수많은 마천루들로 구성된 맨하튼.
그리고 타임스퀘어 광장의 번화가.
하지만 브루클린 레드힐(Red Hill)처럼 지옥 같은 갱단구역도 뉴욕의 한부분이다.
그러나 뉴요커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장소는 여기 퀸즈(Queenz)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 채당 수백만 달러는 가볍게 넘어갈 정도로 화려하게 지어진 주택들.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와 가로수들이 좌우로 심어진 골목길들까지.
퀸즈의 풍경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구체화시켜 놓은 장소다. 창밖을 둘러보던 송재동이 나직하게 말했다.
“백인 상류층들이 사는 곳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여기 퀸즈거리. 그중에서도 상류층들이 주로 모여있는 이스터(Easter)거리를 흑인이 어슬렁거리다가는 한블럭도 못가서 경찰들에게 검문당하고 재수 없으면 체포당할 가능성도 많을 겁니다. 물론 그런 흑인들을 체포하고 검문하는 게 주로 같은 흑인경찰일 경우가 많다는 게 상당한 아이러니지만 말이죠.”
“그래서 미국 흑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같은 흑인경찰이란 말도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김태천이 나를 향해 대답했다.
미국경찰들이 흑인을 상대로한 과잉진압이 종종 문제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같은 흑인경찰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도 꽤 많았다.
그렇다 보니 흑인들 중에는 흑인경찰을 향해 백인들의 사냥견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적대하였다.
“그런데 이런 동네에 총기 밀거래를 하는 장소가 있다니? 겉으로 봐서는 상당히 평화롭게 보인는데 말이지요.”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걸맞는 것이죠. 그나저나 제프녀석이 말해준 주소에 따르면 여기쯤인 거 같은데.”
김태천이 메모지를 확인했다.
제프는 김태천이 뉴욕에서 알게 된 인맥으로 블랙마켓(Black Market)쪽에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다.
“저기가 맞군요.”
“그냥 봐서는 평범해 보이는 주택인데.”
“하지만 주변의 주택들과는 좀 틀린 게 있지요. 창문커텐도 모두 쳐져 있고 담장 근처에 CCTV 카메라와 방범용의 동작감지 센서들도 보이고.”
김태천의 말대로 근처에 있는 다른 주택들과 틀린부분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얼핏 지나가면서 볼 때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준이다.
얼마 후 김태천이 근처에 차를 주차시켰다.
송재동은 일단 방탄차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긴급호출을 통해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송재동의 경우에는 총기류에 익숙치도 않았다. 잘못하면 오발사고나 또는 아군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전략실장님은 권총을 쏴보거나 다뤄본 경험은 있습니까?”
“김태천 씨의 군경력에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병생활을 103특공연대에서 보냈습니다.”
“103특공연대라. 그곳이라면 사병들도 1년에 2-3차례 K-5 권총사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잘 아시는군요. 다만 K-5 권총사격은 숙련을 위한다기보다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한 것이지요. 병사 개개인에게 따로 지급된 K-5 권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특공연대는 사병들이 권총사격까지는 안하지만 103 특공연대만은 연대장의 특별지시로 그런 교육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특수부대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기에 103 특공연대의 내부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와 김태천은 정문이 아니라 담벼락을 크게 후회해서 후문쪽으로 나아갔다.
총기 밀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정문에서 맞이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김태천이 벨을 눌렀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2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었다.
미국에서 2달러짜리 지폐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물론 수집가들의 사이에서 모으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태천이 지갑에서 꺼낸 2달러짜리 한장을 CCTV-카메라가 있는 부분에 비쳤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 소개로 온 거요?”
“제프.”
“들어 오시요.”
철컹- 금속음이 나면서 문이 열렸다.
내부로 들어가자 먼저 보인 것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사내다.
구렛나루와 수염이 덮수룩하게 자랐고 탄입대등이 달린 전투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얼핏봐도 전직 군인출신이란 느낌이다.
“제프가 보내서 왔다면 여기가 어떤곳인지 알고 있겠군요.”
“그렇소.”
“먼저 어떤 모델이든지 간에 가격은 시장가격의 5배입니다. 대신에 일렬번호가 삭제되거나 위조된 상태고 총열은 다른 것으로 교체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총격사건등에서 증거로 사용되는 탄도흔과 내부강선을 감식해서 원래의 총기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군요.”
백인사내를 향해 대답했다.
역시 5배나 비싼 이유가 있었다.
총열내의 강선은 저마다 고유한 모양이 있었다.
이것을 보통 총기지문이라고 부르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총기를 구입할 때에는 이 탄도흔을 등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총격사건이 벌어졌을 때에 유력한 증거나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블랙마켓(Black Market)을 통해 구입할 때에는 탄도흔을 통한 추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걸 물어보는 건 좀 이상하지만 뭣 때문에 우리 쪽에 와서 5배나 비싼값으로 구입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주된 이유는 호신용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상대가 뭔가 수작을 부릴 때에 주저없이 먼저 쏘시요. 우리로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구입한 총기를 갖고 있다가 시체로 발견되는 게 더 골치아픈 일이니까.”
“고마운 충고군요.”
나의 대답에 백인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의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미국은 총기가 합법화된 나라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다녔다.
그리고 총격으로 죽을지 아닐지는 0.1초도 안되는 순간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일순간의 방심과 머뭇거림이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다. 이윽고 백인사내가 우리를 안내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총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권총부터 시작해서 자동소총 그리고 기관총까지 보인다. 잠시 우리 쪽을 보던 백인사내가 넌지시 말했다.
“두 명다 총기를 다뤄본 경험은 있는 거 같군요. 하긴 대부분의 한국인 남성들은 군대를 갖다오니까.”
“우리가 한국인이란 사실은 어떻게 파악한 겁니까?”
“영어를 쓰고 있지만 동양인이란 느낌이고 그것도 극동쪽. 그렇다면 한국, 중국, 또는 일본인데. 의무징병제를 실시해서 2년 동안 군대에서 총기를 다루게 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지요. 그리고 군대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눈앞에 있는 총기들을 향해 나타나는 반응을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눈썰미가 빠르고 좋았다.
대부분 군복무를 마친 한국남자들에게 총기는 결코 신기한 것은 아니다.
특히 저앞에 진열된 자동소총을 볼 때의 느낌은 장거리 행군시에 소총과 군장을매고 고생하며 걷던 모습이 먼저 떠오를 정도니까 말이다.
어차피 진열된 권총들 중에서는 이전에 내가 103 특공연대에서 써봤던 K-5 권총은 없었다. 그리고 권총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는 김태천이 더 능숙하다.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신뢰성과 장탄수, 기타 여러 가지등을 고려해볼 때에 가장 무난한 것은 이거군요.”
김태천이 진열된 여러종류의 권총들 중에서 비슷한 모델의 권총 3개를 선택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백인사내의 눈빛이 감탄으로 바뀐다.
“당신은 스페셜포스(Special Force)출신인 거 같은데. 권총을 보는 안목이 상당하군요. 보통 권총에 대해 잘 모르는 멍청이들은 데저트이글이나 매그넘같이 크고 화력만 좋은 것을 선택하는데.”
“특정한 전투가 목적이라면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권총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요.”
“이런 곳에서 전문가를 만나게 되니 기쁘군요.”
백인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도 여기서 밀거래로 상류층 백인들에게 총기를 팔고 있지만 아마츄어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눈에차지 않은 상대들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김태천이 선택한 권총은 글록(Glock)27이었다.
38구경의 탄환을 사용하면서도 관통력은 뛰어났다.
그리고 장탄수도 탄창에 15발, 약실에 1발해서 총 16발까지 가능했다. 뭣보다 총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립감이 좋은 편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시중가격의 5배. 그래서 1정당 4000달러. 합계 12000달러입니다.”
“권총탄도 필요하겠군요. 38구경 보통탄과 할로우탄. 그리고 ACP 철갑탄까지 포함해서 30박스정도인데.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당신들과 거래를 하게 되어서 기쁘군요. 이후에라도 추가주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사격장입니다. 대략 15m 거리의 사대이지만 어차피 권총은 근접전 무기다보니.”
“그렇군요.”
김태천과 함께 지하사격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총기밀거래와 사격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우리와 거래한 백인사내 자체가 총기매니아인 것이었고 지하사격장은 고객들보다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게 분명했다.
딸깍- 김태천이 불을 켰다.
그러자 지하사격장의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꽤 잘 만들어진 사격장이다.
주위위에는 콘트리트와 방음재료를 사용해서 소음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표적지도 여러 개 있었다.
나와 김태천은 가장 일반적인 타겟을 선택했다.
버튼을 누르자 표적지가 자동으로 레일을 따라 밀려나갔다.
정확히 15미터 지점에서 멈추었다.
가져온 탄박스에서 38구경 보통탄을 꺼낸 뒤에 탄창에 장전을 시작했다.
글록(Glock)같은 자동권총에도 탄창에 탄환을 빨리 끼우는 패스트로딩(Past Loading)이라는 장치를 쓸 수는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손으로 하나하나씩 끼우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
뭣보다 탄창에 탄환을 직접 끼우면서 38구경탄의 촉감과 파워를 피부로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15발짜리 탄창에 38구경탄을 모두 넣은 뒤에 탄창을 조립했다.
철컥- 탄창이 조립되면서 경쾌한 금속음이 흘러나왔다.
탕! 타타탕!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주변 콘트리트에서 총격음이 메아리친다. 권총사격시에 중요한 것이 총소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쏜 권총의 총격음을 듣는 순간 움찔거리며 놀라거나 총구를 다른데로 돌리기도 한다.
글록(Glock)27은 초기형인 글록-17을 컴팩트하게 만든 모델로 호신용을 포함해서 총을 휴대하기에 편했다. 그럼에도 장탄수는 15발정도로 많은 편이다.
또한 격발시의 반동이 전체적으로 분산되면서 조준성능이 뛰어났다.
“전략실장님. 생각외로 사격솜씨가 좋군요. 이 정도면 충분히 현장에서 뛰어도 되겠는데요.”
15발짜리 탄창을 3개 정도 비운 뒤.
사격이 완료된 표적지를 확인한 김태천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103특공연대에서 한국군 제식의 K-5 권총사격을 한 것이 나름대로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신용이란 것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총격사건이 난무하는 곳이라 해도 기왕이면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한테도 유리하니까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김태천의 대답을 들으며 그가 사격했던 표적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특수부대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자다.
나의경우에는 45발을 사격하면서 표적지의 중앙을 조준한 상태였다.
그래서 탄착점이 중앙에 몰려있다.
그에 반해 김태천은 권총사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15발은 머리쪽에 집중, 그리고 나머지 30발은 표적지의 심장부분을 모두 관통한 상태다.
“김태천 씨의 사격실력을 보니 든든하군요.”
“여차하면 제가 전략실장님의 경호원 역할도 해야하니까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몰라도 일단은 본인의 안전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 정석이죠.”
“과연 그것이 정답이군요.”
나의 대답에 김태천이 미소를 지었다.
김태천이 나의 든든한 경호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서는 스스로 내 몸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김태천과 함께 자동권총도 구입한 것이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김태천 씨는 저보다는 송재동씨부터 먼저 챙겨주십시요.”
“알겠습니다. 역시 전략실장님의 생각은 탁월하시군요.”
김태천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