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조 재벌-29화 (29/300)

# 29

운빨이 작용했다.

“강민 형. 저번에 우리에게 꿀알바자리 주셔서 정말로 고마웠어요.”

“어차피 너희들도 나름 열심히 해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

“그래도 요즘 우리 같은 대학생이나 청년들 상대로 열정페이니 뭐니 하면서 통수치는 새끼들 엄청 많은데. 강민 형은 오히려 우리를 제대로 대접해줬으니까요.”

종수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평소에는 말도 이상하게 하고 헛소리도 종종하는데 지금 저 표정은 꽤나 진지하고 거짓이 없었다.

저번에 종수와 세연이, 그리고 둥수와 소민이 등을 포함해서 10명에게 설문지 및 리서치 알바를 맡겼다. 기간은 1주일이었고 한 명당 200장씩의 리서치 설문지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10명은 1주일 동안 진짜로 열심히 했다.

이런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리서치 회사에 맡긴 것보다 성과가 더 좋았다.

1주일 뒤에 10명을 카페에서 만났고 결과물들을 받았다. 저 애들이 해온 2000장의 설문지와 리서치에는 내가 알고 싶었던 부분과 정보들이 상당히 있었다.

정확히는 소비자의 니즈(Needs)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니즈(Needs)는 내가 예측했던 부분과 상당수 일치했다.

모든 일에는 기브앤 테이크(Give & Take)라는 원칙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1주일 동안 내가 맡긴 리서치 알바를 자신의 일처럼 성의껏 해준 10명에게 제법 후한 보수를 지불했다.

이런 것에서 돈 아끼겠다고 쪼잔하게 구는 것은 오히려 등신짓이다.

쓸 때는 과감하게 쓰는 게 중요하니까.

“강민 형. 다음에도 그런 알바 있으면 또 불러주세요. 사람들 상대로 리서치 하는 동안 재미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배우게 된 것도 많아요.”

“걱정 마라. 앞으로 종종 그런 일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나의 대답에 녀석이 히죽거렸다.

“그건 그렇고, 으으~ 왠지 긴장되네요.”

“이번에는 또 뭐야?”

“강민 형은 신경 안쓰고 있는 겁니까? 저번에 형이랑 소명중학교에서 본 토익시험 기억 안나요?”

“그게 왜?”

“오늘 점수발표하는 날이잖아요.”

“그랬어?”

“와아! 저 표정. 진짜로 선배만 아니면 때려주고 싶어라.”

종수 녀석이 부들부들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종수는 토익시험이 평소보다 어려웠다고 엄청 투덜거렸다. 나중에는 반쯤 자포자기와 절망감으로 눈물까지.

“그래서 네가 아까부터 표정이 영 똥씹은 것처럼 보였군. 내가 자판기 커피 사준 것 땜에 삐져나 생각했는데.”

“자판기 커피는 진짜거든요. 투자회사에서 일하시는 분이 쪼잔하게 자판기 커피로 때우다니.”

“원래 수컷끼리 있을 때는 자판기 커피로 충분해.”

나의 말에 녀석이 반박을 못했다.

하긴 남자 둘끼리 점심 먹은 뒤에 카페에 커피 마시러 가는 것도 좀 그렇지.

“그런데 지금 확인돼?”

“물론이죠. 스마트폰 어플로도 가능한데요. 그 외에 인터넷으로 직접 토익사이트 들어가서 확인하는 방법도 있고요.”

종수가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한국에서 토익시험을 주관하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악!”

비명소리를 토해냈고 온몸을 부들거렸다.

대충 예상되네.

“이번 시험에는 진짜로 공부 열심히 했는데. 크흐흑!”

짜식이, 왜 여기서 울고 난리야?

누가 보면 내가 후배를 팬 줄 알겠다.

어. 진짜네.

복도주위로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수근거렸다.

“야. 그만 쳐 울어. 어차피 다음 달 시험 또 보면 되잖아. 그런데 너의 목표가 800점대라고 했는데, 잘 안나온 거야?”

“800점 근처도 못 갔어요. 저번 달에 765점인데, 이번 달은 700점대 초반이라니.”

울상으로 변해버린 녀석을 바라보며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종수 말대로 오늘이 시험 점수 발표날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과연 몇 점이 나왔을까?

일단 희망은 800점대다.

하시(AI)를 통해 영어학습을 중급까지 익히면 토익에서의 점수가 대략 그 정도 수준에서 나온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형도 확인해 보시게요?”

“어차피 지금 시간 날 때 해봐야지.”

“그래도 형은 저보다 좀 높게 나올 거 같네요. 저번에 L/C 문제 좀 풀었다고 했으니까. 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사실 L/C는 다 풀었는데.”

“영어 기만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니!”

“대신에 R/C는 좀 어려워서 다 못 풀었다.”

“많이 어려운 게 아니고, 좀....?”

더 이상 말하면 종수 녀석 폭주하겠다.

녀석을 향해 싱긋 웃은 뒤에 인터넷으로 토익시험 사이트로 들어갔다.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시험 친 달을 입력했다.

그러자 점수가 나왔다.

“어라......!”

“왜 그래요? 점수가 엄청 나쁘게 나왔어요? 설마 저보다 더 안나온....”

종수 녀석의 저 기대감어린 표정.

그러나 미안하게도.

“예상보다 좀 더 잘나왔네.”

“대체 몇 점인데 그래요?”

“915점. 대충 800점대 후반 예상했는데.”

“이건 꿈이야. 분명히 내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게 분명해.”

종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걸 보고 있으니 왠지 미안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915점이면 확실히 예상보다 더 많이 나왔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거 같았다.

하시(AI)의 말대로 중급까지 터득했을 때의 실력은 800점대다.

많이 나와도 800점대 후반.

그러나 토익시험은 기본적으로 객관식이다.

그래서 R/C 부분에서 시간이 없어서 다 풀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몇 분 남겨놓고는 다 풀지 못한 걸 대충 찍었다.

거기서 운 좋게 몇 개 정도 맞은 것이다.

영어중급까지 올라간 실력 + 운빨이 작용한 것이다.

완전 개이득.

“크으. 900점대라니.”

“900점대 턱걸이일 뿐인데.”

“저 표정, 저 여유만만함. 700점대 하수 앞에서 기만행위까지.”

“이거 왠지 미안하네. 네가 토익 이야기 안했으면 나중에 따로 확인했을 건데.”

“미안한 걸 아시면 커피 사세요.”

“지금 마시고 있잖아.”

“후배 앞에서 900점대 맞은 거 자랑해놓고, 자판기 커피로 때우려고요? 이건 제대로 된 커피로 받아야 합니다.”

“아무튼 선배 뜯어먹는 기술은 갈수록 고급지네.”

녀석을 한 대 쥐어박았다.

점수가 915점이나 나온 부분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놀랐고 흐뭇하다.

내가 토익스펙 쌓아서 기업체에 입사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어를 파고든 목적 중에 하나가 앞으로 더 많은 활동과 투자.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토익 915점이란 점수는 나에게 영어를 쓰고 활용하는데 큰 자신감을 주는 증거다. 토익 900점대라고 해서 모두가 영어 능통자는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어 잘하는 사람이 토익성적도 좋은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면 내가 얻은 토익 915점은 객관적인 증거인 것이다.

앞으로 영어 때문에 고생할 일은 많이 없겠군.

이것만도 상당한 성과다.

***

“형님. 잔 받으세요.”

“그것보다 안주도 먹으면서 마셔!”

서홍철이 넉살 좋게 웃었다.

테이블 맞은 편의 안성준은 측은한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서홍철과 안성준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둘 다 공고를 졸업했고 손재주도 좋았다.

다만 안성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꽤 방황했다.

그러다 서홍철을 만나면서 결혼도 하고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안성준에게 KR-전지(株)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선배로서 여러 가지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안성준이 볼 때에 KR-전지(株)는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견실한 중견기업이었다.

대기업을 능가할 만큼의 잠재력과 실력을 갖춘 강소기업-

그것이 KR-전지(株)였던 것이다.

또한 안성준은 선배인 서홍철에 이끌려 KR-전지(株)에 입사했지만 이곳을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창업주인 정태수.

그리고 2대 사장인 정대현도 현장에서 직접 뛰는 모범적인 경영자였다.

지금까지 안성준이 다른 기업들을 통해 본 사장들과는 틀렸다.

그래서 안성준은 더 안타까운 것이다.

“최규식 그 양아치 같은 놈이 회사를 완전히 말아먹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KR-전지는 도산하고 말 것입니다. 형님과 제가 땀 흘려 가꿔온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대현 사장도 지금은 제대로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정 사장이 사람 좋은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뭔가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

“무슨 뜻입니까?”

“듣기로는 KR-전지(株)에 투자회사의 관계자가 왔다고 하던데. 전략실장인가 뭔가 하는 젊은 친구가 있는데 보통이 아니라고 하더군.”

“그거 회사에서 나온 정보입니까?”

“그렇네. 그리고 투자회사의 전략실장이 노사협의에 옵저버로 참가도 했는데, 거기서 최규식에게 제대로 한방 먹였다고 하던데.”

“만약에 그것이 정말이라면 진짜로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회사가 살아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나도 최규식과 그 패거리들이 더 이상 활개치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네. 내가 비록 최규식 세력에게 쫓겨난 전대 노조위원장이지만 그래도 공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키워왔고 가르쳐온 아이들이야.”

“당연합니다. 홍철형님이 아니었으면 저도 아직까지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직원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서볼 생각이네.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두 손 놓고 지켜만 볼 수는 없지.”

“형님이 그렇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고마워. 큰 힘이 되는군.”

서홍철이 미소를 띠며 후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곱창을 안주삼아 둘이서 소주 3병 정도를 비운 뒤에 식당을 나섰다. 거리는 어두컴컴했고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어왔다.

두 명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술을 마신 것도 동네에서 자주 가던 단골집이다.

넉넉하게 걸어도 30분이면 집에 도착하는 길.

“오늘은 형님이 좀 많이 마신 거 같네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하. 평소에 이 정도 마셔도 끄떡없는데.”

“에에- 뭘 그러십니까? 벌써 비틀거리는데.”

안성준이 웃으면서 서홍철을 부축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간에 흥을 나누며 걸어갔다. 그리고 골목길을 막 돌아서는 순간.

안성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에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항상 가로등이 있었는데 오늘은 깨져서 더 어두웠다.

이건 누가 일부러 깨버린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전방에는 4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떡대도 제법 되었고 한손에는 각목을 들고 있다.

“서홍철이 저 늙은 놈 맞지?”

“형님. 피하십시요.”

안성준이 전방으로 나섰다.

각목든 사내들이 노리는 게 누구인지 파악되었다.

“이 새끼들. 누가 보낸 놈들이냐?”

“노친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놈이 있었네. 해치워!”

안성준이 돌진했고 각목이 파고들었다.

나이도 서홍철보다 훨씬 젊었고 예전에는 한가닥 했던 솜씨도 있었다.

상대가 휘두른 각목에 맞으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지만 전방의 한 명을 주먹으로 날렸다.

퍽! 둔탁한 소음이 터지며 한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다른 한 명을 상대하며 주먹을 뻗었다.

두 명을 상대로 활약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새끼.... 죽어!”

퍽! 퍼퍼퍽! 후방에서 각목이 파고들며 안성준을 난타했다.

후배가 두들겨 맞는 상황.

안성준은 자신에게 피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홍철은 비록 늙었지만 뚝심만은 강했다. 후배를 난타하는 2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명을 쓰러뜨린 뒤에 몸을 돌리는 찰나.

“늙은이가 끈질기네.”

“어차피 상관없어, 담궈버려!”

푹! 푸푹! 날카로운 사시미 칼날이 서홍철의 허벅지로 파고들었다.

서홍철이 비틀거렸다.

“이제 끝장을 내주마.”

“저 노친네 해치운 뒤에 나머지 새끼도 죽여. 깨끗하게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물론이지.”

시퍼런 칼날을 든 적들이 다가왔다.

이미 앞뒤로 포위된 상황.

더 이상은 도망칠 공간조차 없었다.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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