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이거 꿀알바네.
‘대부분 온 것 같네.’
카페로 들어가기 전 창문을 통해 넓은 테이블에 모여있는 애들을 확인했다.
자비스(Javis)-
우리학교 앞에서 제법 유명한 곳이다.
프렌차이즈의 커피숍은 아닌데.
이곳 카페의 오너가 유럽 등에서 바리스타(커피전문가)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여기에 카페를 차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닥 인기가 없었는데 커피맛이 좋다보니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면서 점점 인기가 많아졌다.
내부의 인테리어 등도 중세유럽풍의 것을 차용했고 이것이 그윽한 커피맛과 어울리며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끙끙대는 후배 녀석을 놔두고 카페에 대해 감상하는 것도 좀 미안하네.
“끄으윽. 강민 형.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요.”
짐꾸러미를 한가득 든 종수 녀석이 투덜거린다.
이 녀석 봐라.
간단한 짐꾼 역할도 못해서 끙끙대다니.
“너 내년에 군대 갈 거 아냐? 그러니까 미리 체력단련 한다고 생각해.”
“형. 저 공익판정 받은 거 알면서.”
“공익이었어?”
“뭡니까, 그 눈빛은? 설마 공익은 인간취급 안한다는 겁니까?”
“사실은 부러워서 그런 거다. 그리고 공익도 국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다만 국방부쪽이 아니라 내무부쪽이던가. 그런데 공익이라도 훈련소 4주 훈련은 받아. 그 때 졸라게 빡세니까 체력훈련이라도 해놓고 가. 그리고 요즘은 현역보다 공익이 이래저래 스트레스 받는 것도 많다고 하던데.”
“그거 진짜예요. 동사무소에서 동네 민원인들에게 잘못 찍히면 죽음이에요.”
“그런 고충이 있는 줄은 몰랐네.”
“크으. 그래도 강민 형이 공익의 설움을 이해해 주시다니. 정말로 눈물이....”
“그걸 알면 앞으로 충성해라.”
“아예 죽을 때까지 노예로 부릴 작정입니까? 그런데, 이거 도대체 몇 장이나 되는 겁니까?”
“대략 2000장.”
“역시 처음부터 속았어.”
투덜거리는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종수 녀석이 한가득 들고 있는 건 A-4 용지다. 그것도 앞뒤로 프린트된 2000장의 설문지다.
설문내용을 워드로 만드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2000장을 프린트로 뽑는 것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잉크도 꽤 쓴 거 같은데.
그래도 역시 레이저 프린터가 좋다.
저걸 잉크젯 프린터로 뽑으려면.... 에휴~
“아무튼 들어가자.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도와줘야겠네.”
“겨우 여기서 생색내는 겁니까?”
하지만 녀석의 얼굴은 반쯤 살았다는 표정이다.
지금까지 낑낑대던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졌으니까.
“생각보다 일찍 왔네.”
“어서오세요. 강민 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애들이 인사한다.
여기에는 낯익은 후배들도 있었다.
동수와 소민이는 얼굴도 자주 보는 편이다.
이제는 아예 커플행세냐?
어쭈! 커플티까지 맞춰 입고.
그리고 저 두 명의 취미가 같다보니 더 가까워진 거 같다.
일명 덕질커플.
영어능력자인 세연이도 학교에서 몇 차례 만나서 익숙했다. 나머지 6명들 중에는 친하진 않지만 얼굴을 알고 있는 애들도 보였다.
여기 있는 9명, 그리고 나와 같이온 종수까지 모두 10명은 학교의 후배들이다.
“그런데 강민 형이 좋은 껀수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왔는데. 무슨 일입니까?”
“일단 커피부터 시켜.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니까.”
“그럼. 난 카푸치노. 난 모카. 에스프레소....”
저마다 희망하는 메뉴를 외쳤다.
그리고 주문을 받으러온 알바생은 11명의 주문을 받느라 약간 당황했지만 능숙하게 넘겼다.
하긴 20명 이상의 단체로와서 각자 따로 메뉴를 주문하는 경우도 꽤 있으니 말이다.
주문한 커피들이 올동안 종수에게 신호했다.
종수가 가져왔던 짐꾸러미.
내가 워드로 만들어서 프린트로 뽑은 A-4 용지를 한 명당 200장씩 돌렸다.
그리고 영어능력자인 진세연에게는 내가 따로 뽑은 A-4 용지 200장을 건네었다.
“저번에 네가 메일로 보낸 것을 프린트한 거야.”
“선배의 연락을 받고 설문지의 내용을 영어로 번역한 것일 뿐인데 잘 되었나 모르겠네요.”
“이 정도면 충분한데.”
나의칭찬에 진세연이 수줍게 웃었다.
결코 헛말이 아니다.
그리고 진세연이 영어로 프린트된 설문지를갖고 담당할 대상들은 한국인이 아니다.
정확히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이다.
그래서 설문지의 내용을 영어로 작성한 것이고 이것을 진세연이 영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강민 형. 이게 다 뭐예요?”
“보면 모르냐? 설문지지.”
“여론조사예요?”
“그것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르지. 일단은 확인해봐.”
나의 대답에 후배들이 설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신이 사용하시는 스마트폰 배터리나 노트북 배터리에 만족하십니까? 이런 황당하고 돌발적인 설문내용은 처음인데요.”
“맞아. 그리고 현재 배터리 기술은 어느국가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네”
“간단하게 말한다면 시장조사, 마켓리서치 같은 것이지. 너희들 중에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현재 투자회사에서 알바하고 있거든.”
“알바라니. 그런 수준이 아닌데.”
동수 녀석이 반박했다.
하지만.
“알바다.”
“예. 알바입니다.”
금방 꼬랑지 내릴 녀석이. 후후.
알바인데도 투자회사라는 말이 나오자, 여기에모인 후배들이 놀라고 있었다.
“알바라도 그런데서 일하면 재밌겠다.”
“강민 선배. 다시 보이네.”
“언제부터 일하고 있었어요?”
저 애들의 질문을 다 받아주다가는 끝도 없고.
“그런데 투자회사에서도 이런 마켓리서치를 해요? 투자회사는 주로 기업분석이나 금융분석, 그 외에도 투자분석등을 주로 하는 줄 생각했는데.”
“그건 예전 개념의 것이지. 지금은 투자회사라고 해서 무조건 그런 식으로만 활동하는 건 아니야.”
“그렇구나.”
나의 대답에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 후배들이 한말도 틀린 건 아니다.
내가 저 애들에게 준 설문지나 마켓리서치에 대한 부분은 주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제조업체쪽에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이 오히려 기회를 놓치고 발전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아무튼 강민 형이 설마 공짜로 부려먹지는 않겠죠?”
“지금 너희들이 마시는 커피값으로 퉁칠건데.”
“설마?”
“농담이야.”
와! 저 살벌한 눈빛들.
만약에 진짜 커피 한 잔으로 퉁쳤으면 여기서 하극상 일어난다.
그리고 저 애들에게 무슨 열정페이를 강요할 조건도 아니고.
원래 돈이란 것은 필요할 때에는 팍팍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 애들에게 설문조사 시키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일주일. 어차피 하루이틀만에 끝내라는 것도 아니야. 느긋하게 해. 대신 너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꼼꼼하게 해달라는 것일 뿐이야. 설문지에도 보면 알겠지만 성별에 따라 남/여- 구분되었고, 그 외에도 연령대에 따라. 또한 얼리어댑터(Early Adaptor)인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구분해 놓았어. 그리고 너희들이 1주일 동안 성실하게 했을 때에 주어지는 보상은 이 정도쯤.”
“와아- 이거 꿀알바네요.”
“너무 꿀만 빨지말고. 제대로 해.”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후배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 정도의 보수면 마다할 이유조차 없지.
이제부터 느긋하게 결과를 기다려볼까.
***
“이거 칵테일 괜찮은데요.”
“그래도 다른 것보다 좀 독하기는 하지. 보드카를 기본베이스로 하지만 그중에서도 알루트(Alute)라는 상당히 독한 보드카를 사용하니까.”
“선배님 말대로 넘기는 순간, 목에 느껴지는 짜릿함이 장난 아니군요.”
“그런데 조금 전까지 저녁을 평범하게 해장국 먹은 뒤에 칵테일바라니. 이것도 영 뭔가 어색하네.”
“칵테일바 오는 게 꼭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은 뒤에 와야 하는 것도 아니죠. 어차피 한국인들에게 한식은 공기처럼 익숙한 것인데, 평범한 한식 먹고 후식으로 칵테일바에 온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하긴 지금은 식생활과 문화도 퓨젼(Fusion)의 시대니까.”
송재동이 바텐더의 말에 동의하며 웃었다.
그는 내가 JSE-(K) 투자쪽의 여러 가지 법률자문과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포섭한 인물이다.
변호사로서 능력은 뛰어나지만 법조계의 주류가 아니기때문에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날개를 달았고 본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나스카(Naska)라.... 내부의 인테리어를 포함해서 분위기가 괜찮네요.”
“어머~ 칭찬 고마워요. 제가 이전에 남미 여행을 갔다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겪은 추억이 너무나도 좋아서 이렇게 칵테일바의 이름으로 지었어요.”
박채영이 미소를 지었다.
설마 조명 때문인가?
나이는 30대인데도 20대의 여자들 못지 않게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여기는 오늘이 처음인데 나름 마음에 든다.
재동 선배도 제법 보는 안목이 있네.
그리고 재동 선배가 칵테일바의 오너이자 바텐더인 저 언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보드카를 베이스로한 칵테일, 바이칼을 한잔 더 주문한 뒤에 마셨다.
내가 칵테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은 나름 마음에 든다.
잔을 반쯤 비울 때 송재동이 넌지시 말했다.
“이번에는 배터리인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90% 이상이라 보면 됩니다.”
“네가 속해있는 JSE-(K) 투자가 움직일때마다 지각변동이 생기는군.”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이미 한국의 IT-산업계가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름도 없는 유비콘(Ubicon)이란 소형 벤처기업이 이렇게 큰 사건을 사건과 파급효과를 만들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유비콘은 나름대로 고속성장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도 충분히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즉. 일정 부분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유비콘의 사장인 최병관도 능력이 출중하고요.”
얼마 전까지 허름한 작업실에서 팀장으로 있었던 최병관이지만 지금은 유비콘의 사장이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같이 일했던 유비콘의 팀원들은 초기멤버로서 지금도 유비콘의 실질적인 기둥들이다.
“한동안 유비콘에 집중해도 충분할 정도인데. 벌써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인가?”
“성공의 만족하고 정체되면, 나중에는 도태될 뿐입니다.”
“다만 유비콘에 대한 투자와 도박은 나름대로 블루오션(Blue Ocean)이라는 미개척과 발전 가능성이 많은 분야였지만 배터리쪽은 다르네. 그야말로 포화상태에 가까운 레드오션(Red Ocean)인 셈이지.”
“하긴 상업용 배터리와 축전지가 나온 것만도 벌써 100년의 역사가 넘으니까요.”
“그렇네. 스마트폰 모바일앱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게 채 10년 남짓한 상황과는 완전히 틀리지.”
송재동이 신중하게 운을 떼었다.
이런 그의 말은 결코 틀린게 아니다.
하지만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가능한 것도 미리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또한 송재동이 배터리 산업과 시장을 이미 포화된 레드오션(Red Ocean)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판할 마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송재동을 포함해서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에게는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돌파할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
칵테일 바이칼을 깨끗하게 비운 뒤에 송재동을 향해 미소지었다.
“재동 선배의 말은 정답입니다. 하지만 레드오션과 블루오션은 상황과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변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써서 변화시키면 됩니다.”
“그 말은 즉 마켓을 주도하겠다는 뜻인데,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나의 대답을 듣자 송재동이 입이 쩌억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