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달의 제단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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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달의 제단 (10)
2023.07.2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소년들과 수하가 리버필드 시로 돌아온 건 아주 한참 만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리버필드 시는 여전히 관광객과 학생들로 넘쳐나고, 해변은 북적거렸다.
건조하고 추운 땅에서 피와 침묵, 그리고 과거의 망령과 싸웠던 소년들은 이 익숙하던 풍경을 아주 낯선 것을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쟤네 맨날 만나기만 하면 싸우지 않았어?”
리버필드 시민들은 지나가다 말고 경악해서 노천카페 한구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환하게 펼쳐진 파라솔 아래 테이블은 심드렁하게 앉은 덩치 큰 소년들로 북적였다.
“……곧 리그냐?”
“리그는 아직 멀었는데. 근데 쟤네 왜 저렇게 모여 있어?”
부딪쳤다 하면 꼭 큰 소리가 나오는 각 학교 나이트볼 주전 몇몇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제멋대로 늘어졌다. 도합 다섯이다.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 모두가 납득하겠지만, 문제는 교복이 두 종류였다는 거다. 절대 섞일 리가 없는 이들이 섞여 있었다.
리버필드 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시원한 음료를 쟁반에 잔뜩 받아온 사람은 나자크였고, 그걸 받아서 나눠주는 사람은 노아였으니 이게 무슨 부조화인가.
지나가던 시민들부터 학생들까지 턱이 떨어질 지경으로 입을 딱 벌리고 이쪽을 보는데, 정작 시선을 받는 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
마한이 뚱하게 앉아 있는 이안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말이 없던 그는 빨대를 꽂은 음료를 받으며 대답했다.
“아니, 좀 이상해서.”
“뭐가?”
“기분이.”
너무나 평안한 곳이다. 언제 누가 쳐들어올까 봐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차량을 여러 번 바꿔 타거나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
“너무 평화로워서 적응이 안 돼.”
이안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자크가 픽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래. 웃기지 않아? 사실 여기에서 산 기간에 비해 우리가 히버널까지 간 기간은 정말 짧잖아.”
비교도 안 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숨 가쁘게 달리면서 인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경험들을 여러 번 겪었다.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꿈을 꾸는 건지 스스로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고 평범한 평화가 찾아왔지만,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뭔데, 하고 모두가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의자에 길게 기대앉아 있었다.
“솔직히 우리 전부 계속 도망치고, 도피하고, 숨어다녔잖아.”
늑대인간 소년들은 태조파 뱀파이어들로부터, 그리고 뱀파이어 소년들 역시 태조파 뱀파이어들로부터 추적을 받아 도망 다녀야 했다. 그사이에 수도 없이 아끼는 이들을 잃었고, 뒤에 시체와 비명소리를 두고 떠나야 했다.
“그러니까 이번 일도 그냥 늘 겪던 일이려니, 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줄 알았거든? 근데…….”
노아는 말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도가 철썩철썩, 기분 좋게 포말을 만들며 밀려왔고, 백사장에는 아이들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 뒤를 쫓아가며 한바탕 웃고 있었다.
“형들은 여기가 아주 평화로우면서도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드나드니까 몸 숨기기가 좋다고 여기에 머무르기로 한 거거든.”
노아의 중얼거림에 나자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처음 왔을 때 참 좋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지금도 좋은데……, 그런데 어색하고 이상해.”
마치 이 평화는 소년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분이었다. 노아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헬리 형이나 수하한테는 이 느낌이 뭔지 딱 보여주면 편하거든. 그런데 말로 설명하려니 잘 안 되네. 어색하다고 해서 싫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끙끙대는 노아의 말을 이안이 받았다.
“다시 뱀파이어들이랑 싸우고 싶은 건 아닌데, 어색한 거지.”
“어, 그거.”
“맞아, 나도.”
가만히 듣고 있던 타헬이 등을 펴면서 튀어 오르듯 동감을 표시했다.
“둘 다 좀 어려서 그래. 너희가 제일 막내잖아.”
“나이가 차이 나 봤자 얼마나 차이 난다고……!”
“저 봐. 바로 발끈하는 것만 봐도 막내지.”
마한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래. 게다가 이번엔 우리가 여태까지 겪어본 적들보다 훨씬 강한 적을 여러 번 상대했으니까 더 그러지.”
그런가? 노아가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저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다 비슷하게 어색해하고 있을 거야. 곧 이런 느낌도 사라져.”
무뎌지고, 적응해나가고, 어느새 다시 학교에 녹아들어 평범한 학생으로 생활할 거다. 운동에 푹 빠지기도 하고, 또 졸업하면 뭘 해야 할까 진로도 고민하겠지.
“사라지지 않으면 형들한테 말해라, 너네. 자존심 상한다고 말 안 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 터지지 말고.”
이안이 말하자 타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안 그럴 거야!”
“그래, 그래. 장하다. 근데 애들 아직도 안 끝났대?”
그 말에 모두가 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 안 끝났대.”
“아니, 잠깐만……. 어, 안 끝났네.”
“좀 있으면 끝난다는데?”
“어, 뭐야.”
열다섯 명이 떼로 와르르 몰려다녔으니, 각자 알아서 연락이 되는 대로 모이게 되었다.
으르렁대던 주전들끼리 갑자기 몰려다니니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그들은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서로 붙어 있는 게 오히려 익숙했다. 그 또한 소년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왜?”
“수하는 나이트볼 경기장 간다는데?”
잠시 침묵하던 소년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빨대를 물고, 가방을 대충 어깨에 걸친 키가 큰 소년들이 저마다 휴대폰을 두드리거나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어찌나 키가 큰지, 그들이 있던 자리가 휑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소년들의 넓은 등 위로 따사로운 햇빛이 내려앉았다.
*
나이트볼 리그가 열릴 때 관중이 꽉꽉 들어차는 나이트볼 경기장은 한산했다. 곧 이곳도 열기와 고함, 응원가와 호루라기 소리로 요란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이곳보다 조용한 곳이 없었다.
“저리 좀 가봐. 나도 좀 보자.”
필드 위에 선 사람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꽉 묶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골대를 노려보다가 낮이라 빛이 덜한 공을 휙 집어 던졌다.
공이 골대 정중앙을 정확하게 맞히자 골대가 빠르게 돌아갔다. 공을 굉장한 속도와 힘으로 집어 던진 거다.
그녀를 보던 여학생들은 감탄을 연발했다.
예전엔 나이트볼 리그 주전들을 보러 오던 학생 중 극히 일부가 갑자기 등장한 저 여학생, 나이트볼 후보 선수 수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멋있다…….”
“그치. 쟤 해외에 나가서 훈련받고 왔다더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
일전엔 어깨를 움츠리고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던 많은 학생 중 하나였는데,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차분한 태도와 부드러운 미소가 늘 기본인 데다가 지금 골대를 노려보는 눈은 아주 날카로웠다.
수하는 옆에 가득 쌓인 공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러곤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골대를 보다, 다시 정확하게 던졌다.
팽그르르르, 골대가 또 돌아간다. 던진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갔다.
“와아.”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수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감탄사가 너무 성의 없잖아.”
“수하 누나 멋있어요. 반했어요. 이번 리그 MVP는 수하 누나 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찬사를 고저가 없는 투로 고스란히 수하에게 줄줄 읊어준 헬리가 필드 안으로 쓱 걸어들어왔다.
“그건 더 성의가 없어.”
이런. 헬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심을 가득 담았는데.”
수하는 대답하는 대신 새 공을 힘껏 던졌다. 이번엔 골대 정중앙이 아니라 그 윗부분에 공이 맞았다.
하지만 역시나 골대는 팽그르르 빠르게 돌아갔다.
저 묵직한 골대가 저렇게 많이 돌다니, 나이트볼 리그에 주전으로 나서는 선수 중에서도 특출한 실력을 가진 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던진 수하나, 그걸 본 헬리나 덤덤하기만 했다. 그는 골대가 돌아가는 걸 가만히 보다가 수하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무슨 생각해?”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아, 그 생각.”
헬리는 수하를 가만히 보다가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봐,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게 목표였거든? 근데 그냥 난 평범한 게 아니고 특별한 거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럼 고민 하나가 사라졌지?”
“응.”
수하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공을 또 힘껏 던졌다. 역시나 또 명중이다.
“솔직히 히버널까지 가면 너희가 다 안전해지겠다, 그럼 됐다,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내가……, 내가……!”
그녀는 저 멀리 여학생들이 이쪽을 보는 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앉은 헬리에게 바짝 다가가 낮게 말했다.
“내가 공주잖아!”
“그렇지요, 공주님.”
으이그. 수하는 가지고 있던 공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헬리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뭐가요, 공주님?”
“놀리지 말고. 눈 떠보니까 나라는 망했지, 마지도 죽었지……. 뭐, 예상도 했고, 각오도 한 일이지만…….”
막상 겪어보고 보복까지 했는데 이젠 뭘 해야 하나. 수하는 이젠 점점 속도가 줄어드는 골대를 쳐다보았다.
“이젠 뭘 하지?”
“글쎄. 일단은 졸업을 잘하는 걸 목표로 삼는 게 낫지 않을까?”
헬리는 마침 경기장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는 친구들을 힐끗 보며 빙긋 웃었다.
“너나 나나, 아니, 우리 모두 다.”
저기 들어오는 늑대인간 소년들과 뱀파이어 소년들을 다 포함해서 ‘우리 전부’가 다.
“똑같은 고민을 할 텐데.”
“무슨 고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청력도 좋은 소년들은 그들의 말을 저 멀리에서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하고 있었어? 수하 너 연습해?”
“아니, 그냥 공만 던지고 있었어.”
루슬란이 공을 턱 집어서 빙글빙글 돌리고, 지노는 헬리 곁에 털썩 앉았다. 그들 곁에 가방들이 툭툭 내려앉아 쌓이고, 경기장과 서로가 익숙한 이들은 각기 자유로운 대로 서로 붙어 앉았다. 그들은 그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끈끈한 사이였다.
“무슨 고민을 하길래 여기서 혼자 공을 던져?”
칸이 씩 웃으며 물었다.
“이게 끝인가, 싶어서.”
수하는 공을 들어 엔지에게 툭 던지며 말했다.
“끝이면 어떻고 끝이 아니면 또 어때?”
카밀이 아예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안전해졌으니 난 됐어. 더 바라지도 않아. 늑대인간들이 뱀파이어에게 사냥당할 일도 없고, 또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 뱀파이어 친구들.”
그는 그게 특히 중요하다는 듯 주변에 둘러앉은 소년들을 쭈욱 가리켰다.
“……이 생겼으니까, 바라지도 않던 일들이 다 이루어진 거야. 그럼 됐어. 오늘도 한가하네. 좋다.”
가만히 카밀을 내려다보던 시온이 그의 배에 냅다 머리를 대고 누워버렸다.
“윽.”
“그러게, 날씨 좋네.”
“야, 너 머리에 뭘 넣고 다니는 거야! 벽돌 들었냐!”
“아닌데. 똑똑해서 무거운 건데.”
“머리가 돌이라 무겁겠지.”
투닥대는 소리가 이젠 익숙하고,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게 됐다.
수하는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툭 내려놓곤 그대로 앉았다. 머리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파란 하늘은 더없이 높아 보였다.
그래, 일단 기사들까지 구하고 거기에 늑대인간 소년들까지 일곱이나 지켜낸 공주가 좀 조용하고 한가롭게 살면 또 어떤가.
수하는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으며 지나갔다.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