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오토널 습격 (10) (71/81)


71. 오토널 습격 (10)
2023.05.1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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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헬리가 뱀파이어들의 뇌 속을 읽는 건 엄청나게 도움이 되면서도 동시에 엄청나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가장 힘들고 역겨운 작업이기도 했다. 안위와 야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살육을 일삼고 남을 밟아버리는 뱀파이어들의 뇌 속만큼 더럽고 불결한 곳도 없으니까.

“형, 잠깐 쉬어. 내가 할게.”

헬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꿈에서 본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보육원으로 오게 된 건지, 어쩌다가 그들이 어려지고 수하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건지 알아야 했다.

필사적으로 트리샤의 뇌를 뒤지던 헬리는 가끔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에 구토감마저 느꼈다. 희게 질린 그를 시온이 말렸다.

“내가 할게, 좀 쉬어. 이러다 진짜 형이 제일 먼저 쓰러지겠다.”

시온도 이제 슬슬 매료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매료시킨 트리샤는 그의 명령에 따라 그저 정직한 대답만 해야 했다.

헬리는 마른 입가를 쓸어내리며 시온이 이끄는 대로 뒤로 물러났다. 시온만 그를 뜯어말리는 게 아니었다. 수하도 그렇고, 모두가 착잡한 얼굴로 헬리를 보고 있었다.

“대충 여태 본 것만 보여줘. 그럼 내가 마무리할게.”

하지만 괴로운 것과는 별개로 헬리는 이제 이능력을 능숙하다 못해 아주 무서울 정도로 쉽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모로 까딱이는 순간, 늑대인간 소년들과 뱀파이어 소년들, 그리고 수하에게 그가 여태 봤던 모든 정보가 한꺼번에 전달되었다.

수하가 놀라 경직되는 사이 헬리는 그녀를 빠르게 잡아챘다. 칸의 눈이 잠시 그들에게로 향했다.

“어…….”

아아. 수하는 머릿속에 한꺼번에 밀려와서 어지럽게 뒤섞이는 새 정보에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헬리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기에 괜찮았다.

“괜찮아.”

피. 피 밖에 없다. 다르단의 시커먼 욕망은 언뜻 보기엔 왕좌로 향하는 것 같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는 공주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짙고 깊은 눈으로.

언뜻 헬리가 그녀를 보는 눈과 같았지만, 그의 눈은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르단은 비교도 하기 싫을 정도로 바닥이 없는 시선으로 공주를 보았다. 오래도록 보았다.

“괜찮아, 수하야.”

수하야. 헬리는 그녀의 이름을, 예전에는 감히 부를 수 없어 호칭으로 불렀던 그녀의 이름을 쉽게 부르며 다독였다.

그녀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공주에게 향한 다르단의 욕망이, 그녀가 피를 마시고 강해졌기에 그만큼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몸서리쳐질 지경이었다.

다르단의 수하들이 봤던 기억만으로도 이렇게 소름 끼치는데 직접 대하면 얼마나 징그러울까?

“수하야.”

하지만 수하는 아직까지도 헷갈렸다. 과연 그녀 자신을 공주라고 스스럼없이 인정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괜찮아? 나갔다 올래?”

몰려오는 최고신관과 트리샤의 기억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카밀이 허리를 숙여 수하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차라리 이런 때는 신선한 공기라도 쐬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벌써 이 어둑한 지하에서 몇 시간째인가.

“얘 나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헬리 너도 좀 바람이라도 쐬고 와.”

카밀의 말이 맞았다. 헬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틀었다.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수하야. 나갈까?”

칸은 잠시 고민했다. 저 둘만 내보내는 건 위험하다. 물론 안전한 건 계속 확인했지만 또 다른 뱀파이어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함께 갈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갈까?’

하지만 곧바로 지노와 자카가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에게 따라붙었다. 언제나 고민보다는 행동이 더 빠르다는 걸 아는데, 그게 힘들다. 칸은 시선을 내렸다.

네 사람은 조용히 신전을 나서서 쳐다보기도 싫은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지나갔다. 수하는 일부러 초상화 쪽은 바라보지 않았고, 헬리는 수하와 초상화 사이에 서서 걸어갔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아서 시청에는 햇살이 내려앉았고, 시장도 사라지고 트리샤도 사라졌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아주 평범하게 시청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 몇 놈만 때려잡고 올게.”

자카의 눈에는 이미 트리샤와 시장이 없어 당황한 뱀파이어 몇 명이 보이나 보다. 그는 말만 남기고 휙 사라졌다.

헬리는 수하를 데리고 과감하게 시청 바깥으로 나가 광장을 가로질렀다. 신선한 공기가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녀는 헬리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

잠깐 여기에서 이 차가운 공기로 폐를 가득 채우고 싶었다. 수하는 크게 심호흡했다. 곁에 선 헬리와 지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움직이거나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공주는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었어.”

앞에 ‘공주는’이라고 덧붙이지 않았다면 수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을 거다.

“몸은 약하고 신체 능력은 안 따라주는데 나, 아니, 공주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중얼거리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걸 간신히 너희가 있어서 잘 견뎌냈는데, 진심이야. 진심으로 너희가 있어서 괜찮았어.”

아픈 사람 취급하지 않고 걱정하는 기색도 감춘 채, 고귀한 왕국의 후계자면서도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와 주는 기사들 덕에 숨통이 트였다.

“피를 마시니까 몸도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했는데.”

꿈을, 그리고 헬리가 알아낸 정보를 종합해보던 수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즉위는 못 한 모양이야. 그렇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즉위하기도 전에 일이 터졌을 줄은 몰랐다.

다르단은 정확하게는 여왕을 죽이고 공주를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또 속이 울렁거린다. 엄연히 말해 수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드는 걸 보면, 공주가 그를 어지간히도 싫어했나 보다.

“그러니까 공주지. 맞아. 즉위를 했으면 호칭이 바뀌었을 거야.”

수하는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싫은 사람을 이제 맞서 싸우러 가야 한다고? 와, 진짜 싫다. 너무 싫어. 이렇게 더 싸우러 가기 싫은 건 처음이다.

수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짜증 나고 싫어서 때리고 싶어.”

“뭐, 뭘?”

깜짝 놀란 지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재상.”

헬리가 건조하게 웃으면서 대신 대답하자, 지노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그놈은 때리고 싶었어.”

누군들 안 그럴까. 저 안에 있는 늑대인간 소년들도 지금 계속해서 늑대인간들이 고작 피를 제공하기 위해 개처럼 끌려와서 죽어 나간 게 다르단 때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어마어마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다르단을 때리려면 번호표를 뽑아야 할 지경이었다.

“수하야, 뭐라도 마실래? 내가 가서 사 올게. 선샤인 애들도 뭐 마시려고 하겠지?”

지노는 근처를 둘러보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갔다. 다시 수하는 헬리와 단둘만 남았다.

“……나 모르겠어.”

올려다보며 말하자 헬리는 ‘뭐가?’라고 다정하게 눈으로 물었다.

“이게, 싫고 끔찍한 감정이 내 건지, 아니면 공주의 건지 모르겠어. 나랑 공주는 좀……, 거리감이 있거든. 나는 분명히 우리 엄마 딸인데, 그렇다고 해서 공주가 내가 아니라는 건 아니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수하는 그게 좀 어려워서 뺨을 문질렀다.

기억이 쭉 이어지는 뱀파이어 소년들과는 달리 그녀는 공주라는 존재와 아직까지도 낯을 가리고 있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보육원에서 어린 모습으로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너는 네가 기사였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잖아.”

헬리는 재미있다는 듯 근사하게 웃었다. 그래. 쟤는 웃는 게 근사해서 문제다. 아니, 사실 진짜 문제는 그가 따뜻한 눈으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거였다.

“너는 생각 읽는 이능력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응? 어떻게 알았지?”

“아, 저리 가. 붙지 마.”

“진짜 가? 나 버리는 거야?”

“버리긴 누가 버, 아, 이리 와.”

못 이기는 척하면 헬리는 좋다는 걸 숨기지 않고 바짝 와서 붙었다.

“공주가 아니면 어때.”

헬리는 사실 수하가 공주라는 걸 이미 확신한 지 오래였지만, 때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진심으로 해줘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공주라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진짜?”

그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얘 좀 봐라?

“아, 아니야. 응. 알았어. 고마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지금 그럼 여태까지 그런 줄 알았다는 거잖아.”

“아니, 나는……! 나는 그게 조금, 아주 조금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헬리는 푸스스 웃어버렸다.

“나는 네가 나 걷어찼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뭐,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하는 거야?”

“어. 왜? 그때부터 내가 너한테는 무척 다르게 대했는데? 몰랐어? 알았잖아.”

그런 거야 이젠 서로 알 만큼 알 때도 되었다.

“이능력 때문에 그런 줄 알았지.”

“응. 그래서 자꾸 날 피하길래 나는 너무 섭섭했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더 바짝 다가오더니 수하를 꼭 안아버렸다.

“괜찮아. 끝까지 가보고, 어떻게 된 건지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아. 다 끝나면 리버필드로 돌아가서 하루 종일 같이 있자.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모든 게 다 끝나고 평범하고 즐거웠던 생활로 돌아갈 수 있길.

“……둘이서?”

우물쭈물하다가 수하가 묻자 헬리는 활짝 웃었다.

“당연히 둘이서.”

“응, 좋아.”

두 사람은 일곱 명분의 음료를 사 온 지노가 ‘이제 그만 떨어져!’라고 짜증을 낼 때까지 꼭 붙어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어?”

마지막까지 괜찮냐고 한 번 더 물어본 헬리는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지노는 헬리가 하는 행동을 몹시 재미있어하며 뒤에서 걸었다.

불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지긋지긋하게 짜증 나던 마음이 어느새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복도를 걸어가면 다시 마음에 추가 얹힌 듯 무거워졌지만,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왔어?”

칸이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며 그들을 맞았다.

“이거 마시면서 해. 그사이에 뭐 나온 거 있어?”

지노가 사 온 걸 칸에게 안겼다. 늑대인간 소년들은 안 그래도 목이 말랐다는 듯, 일제히 손을 뻗었다. 헬리는 완전히 넋을 놓은 트리샤 앞에 앉은 시온을 바라보았다.

“일단 히버널 성문을 여는 방법은 알아냈어. 트리샤를 앞세우면 아마 깊숙한 곳까지도 돌파 가능할 거야. 하지만 트리샤를 인질로 쓰는 건 불가능해.”

“여러 번 물어봤는데 대답이 똑같아, 형.”

노아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다르단에게 인질이 될 만한 존재가 없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리고 뭐…….”

헬리는 대답하다 말고 칸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인질을 잡는 건 귀찮으니까.”

칸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히버널 성의 구조와 거기 있는 전력을 자세히 알아봐야겠네. 고생했어. 쉬어.”

헬리는 시온에게 이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알아낼 만큼 알아내면 바로 히버널로 갈 테니까, 그때까지 다들 몸 상태 점검하고 충분히 쉬어.”

마지막 종착지가 가까이 왔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바로 돌파해야 했다.

*

오토널에서 멀지 않은 도시, 히버널에 스스로를 태조라 칭하는 다르단이 있다.

사실 히버널 시와는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는 그의 ‘성’은 뱀파이어 소년들이 이미 알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미친놈.”

헬리가 마지막으로 트리샤의 머릿속을 싹싹 스캔해 소년들과 정보를 공유하자 그 조용하던 솔론이 참지 못하고 욕을 툭 했다.

“지가 뭔데 왕성을 차지하고 있어?”

“왕성?”

가만히 머릿속으로 ‘이젠 성이냐’ 하고 탄식하며 정보를 되새기고 있던 나자크가 눈을 번쩍 뜨고 솔론을 쳐다보았다.

“어. 여기 우리가 예전에 살던 데야.”

“아. 그, 기사일 때?”

솔론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주인이 사라진 왕성을 그 기분 나쁜 놈이 차지하다니. 언제나 새롭게 분노가 치솟을 일이 하나씩 하나씩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그사이에 많이 개조되고 구조도 달라졌을 거야. 게다가 우리도 이제 기억이 나는 상황인지라, 사실상 이용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겠네.”

이안이 유감이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솔론과 같은 이유로 화가 난지라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걸 늦출 수는 없지.”

언제나 기습만이 소년들에겐 유일한 무기였다. 칸은 조용히 말하며 두툼한 외투를 입었다. 히버널은 쌀쌀한 오토널보다 더 추울 것이다.

“잠시 쉰 뒤 바로 출발하자.”

다들 어느 정도 부상에서 웬만큼 회복했고, 배도 든든히 채웠다. 소년들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전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늑대인간 소년들은 본능적으로 이 다르단이라는 자만 해치운다면 더 이상 종족을 위협하는 이는 지상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아무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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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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