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오토널 습격 (9) (70/81)


70. 오토널 습격 (9)
2023.05.0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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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뱀파이어 시체들이 아직 식지도 않은 채 쌓였고, 그림에도 간간이 피가 튀었다.

더구나 언제 트리샤가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끝에 있는 육중한 문을 돌파하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는 건 불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헬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맞아. 일단 정비부터 대충 하면서 숨 돌리자.”

이안은 뒤쪽에 묶어놓은 시장을 찾으러 갔다. 가다가 공주의 초상화를 보곤 사정없이 욕을 해댔다.

“미친, 야, 이거 재상 그놈이 그린 거 맞지?”

“재상?”

칸이 저건 또 무슨 소리냐고 헬리를 쳐다보았다.

“다르단. 레일건 마스터와 시장을 조종하는 트리샤의 상관. 예전 직업이 재상이었어.”

“징그러운 놈, 어딜 감히 누굴……!”

그린 이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아름다운 초상화였다.

의도를 모르는 이라면 화가가 피사체를 몹시 사랑했겠다, 하고 생각하겠지만 의도를 아는 뱀파이어 소년들은 저 초상화를 솔직히 찢어버리고 싶었다.

“일단 시장부터 찾으러 가. 그놈 기절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기절했으면 때려서 깨우면 될 거 아냐!”

지노가 씩씩대는 이안을 어르고 달래서 보냈다.

“나도 같이 가.”

카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안을 따라갔다.

“혹시 모르니까 정찰도 하고 올게.”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칸은 헬리 앞에 주저앉았다.

타헬이 주섬주섬 가방을 열었다. 그러면서 우물쭈물 뱀파이어 소년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힘들면 마실 사람 있어?”

늑대인간이 혈액팩을 굳이 응급 가방에 같이 담아주는 것도 모자라 혹시 필요한 사람 있냐고 묻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헬리와 솔론은 동시에 픽 웃었다.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시온이 타헬의 곁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진짜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조금 긁혔는데 괜찮, 야, 너야말로 이게 뭐야!”

괜찮다고 말하던 시온이 눈을 크게 뜨며 타헬의 팔을 잡았다. 찢긴 옷 사이로 팔뚝에 송곳니 자국이 선명했다.

“나도 괜찮아, 별 거 아니야.”

“야, 이게 어떻게 별 게 아니야? 피도 나잖아. 솔론, 얘 팔 좀 잡아봐. 일단 지혈부터 하자.”

“뭐야, 타헬 다쳤어?”

솔론이 와서 거드는 사이 루슬란이며 마한을 비롯한 늑대인간 소년들도 안색이 변해서 다가왔다. 금세 다들 응급 가방을 뒤져가며 서로에게 반창고라도 붙여주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안이 퉁퉁한 시장에게 재갈을 물린 채 어깨에 메고 카밀과 도로 계단을 내려왔다.

“문은 다 닫아놨어. 아직까지 조용해. 바깥에서 눈치챈 기미도 안 보여.”

카밀의 보고에 칸은 헬리를 돌아봤다.

“이제 얘기나 좀 해봐. 어디서부터 뭘 알고 있는 건지.”

이걸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하를 돌아보았다.

공주님이라는 단어에 면역이 아직 없는 그녀의 의견도 중요했다.

“이걸 말로 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냥 생각으로 보여주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얼굴을 이미 감싸고 있던 수하는 잠시 심각하게 끙끙거리다가 포기했다. 저 민망하고 짜증 나는 초상화만 봐도 이미 글러 먹었다.

“그래, 그게 낫겠어. 그냥 다 보여줘. 이제 와서 뭘 숨기겠다고.”

“그래, 그럼. 우리도 정리할 겸 다시 한번 보는 게 낫겠지?”

열네 명한테 한꺼번에 의사를 전달해보는 건 해봤지만, 여태 꿨던 꿈이나 겪었던 일들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전달하는 건 처음이다.

헬리는 목을 몇 번 스트레칭한 뒤 집중했다.

*

문 안쪽에는 뱀파이어가 딱 둘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 신성한 장소를 지키고 관장하는 신관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옛 왕국 때부터 이어온 뱀파이어들의 신전이었다.

고대 신 바르그를 섬기던 신전은 모든 게 재상 다르단의 손에 넘어간 이후부터 변질되어 바르그의 피와 그 힘만을 숭상하는 식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신관이다. 감히 신성한 장소에 침입한 저 더러운 늑대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지키던 다른 신관들이 다 뛰쳐나가서 공격에 참여했다.

이 신전은 오래된 만큼, 고위 뱀파이어들이 지키고 있던 신성한 곳이다. 다르단 님의 직속 수하인 트리샤가 늘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신관들의 전투력이 남달랐는데, 이상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좀 시끄럽긴 했지만 워낙 방음도 잘 되고, 문이 크고 두꺼워서 둔탁한 소리가 좀 나다 말았다. 최고신관은 그를 모시는 바로 아랫사람인 신관에게 물었다.

“예, 하지만 문 때문에 소리가 안 들릴 수도 있어요.”

“싸움이 끝난 건가?”

“글쎄요. 그랬으면 도로 들어오고 정화를 시작하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괜히 불안해서 자꾸만 문에 귀도 대보고, 꽉 다물린 문틈으로 바깥을 엿보려고 했지만 보이지도 않았다.

“열어볼까?”

최고신관의 말에 당장 펄쩍 뛰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휴, 큰일 나십니다! 안 됩니다! 바깥 상황이 정리되면 돌아오겠지요!”

“근데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하잖아? 게다가 지금 트리샤 님도 안 계신데.”

“……지금 돌아오셔서 조용한 거 아닐까요?”

“그런가? 아니, 어쨌든 끝났다는 거 아니야? 딱 조금만 보고 다시 문을 닫으면 되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떠받들어지던 최고신관이 처음 겪어보는 갇혀 있다는 기분은 꺼림칙하기만 했다. 얼른 떨쳐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바깥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간이 부은 놈이 여길 알아내서 쳐들어온 걸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어떤 놈이지? 뭐가 목적인 거지?

“아휴, 안 된다니까요!”

“어허, 내 순발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이럴 때만 위엄을 찾는 최고신관은 목소리를 착 깔면서 권위적으로 말했다.

그는 뜯어말리는 부하를 떨쳐내고 복잡한 잠금장치를 슬슬 풀어냈다. 아주 조금만 열어서 딱 보기만 하고 얼른 닫으면 되잖아? 전투를 거의 겪어보지 않았던 최고신관은 그게 가능할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끼릭끼릭, 톱니바퀴가 맞물리면서 바깥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잠금장치가 매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고신관은 이 묵직한 양 문을 조금만 여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차피 싸우는 중이라면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테니, 상황이 어떤지만 보고 얼른 문을 닫는 건 아주 쉬운 일일 거다. 분명히 그럴 거다.

그런데 문을 조금 열어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뭐지?’

바깥은 아주 고요했다. 최고신관은 문을 조금 더 밀었다. 문이 워낙 두꺼워서 복도가 다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침내 그가 얼굴을 들이밀 수 있을 정도로 문이 열렸을 때였다.

“아, 왜 나오냐?”

누군가가 문을 턱 잡더니 투덜거리면서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힘이 너무 세서 최고신관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억!”

“아이고, 신관님!”

비명을 지르던 신관도, 엎어진 최고신관도 빠르게 제압당했다. 문을 열어젖힌 이안은 투덜거리며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꺼냈다.

“아, 진짜.”

당당하게 손을 내밀고 있는 엔지와 자카에게 돈을 건넨 이안은 이번 내기에서 졌다. 그냥 부숴버리자는 파였던 그와 칸의 말과는 달리 엔지와 자카는 기다리면 궁금해서 나오지 않겠냐는 태평한 소리를 하며 돈을 걸었다.

헬리도 끼려고 했지만 모두가 그건 반칙이라고 나서서 막았기 때문에, 결국 칸과 이안만 진 셈이었다.

“이걸로 과자 사 먹어야지.”

엔지가 헤헤 웃었다. 물론 최고신관과 그 아래 신관, 그리고 카밀이 끌고 와서 최고신관 옆에 던진 시장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따로 없었다.

“과자 사 먹을 거야? 그럼 더 줄게.”

칸은 주머니를 더 털었다.

“아, 싫어. 딱 이만큼이 좋아.”

엔지가 몸을 뒤로 빼는 사이, 헬리는 지노와 솔론이 솜씨 좋게 묶어놓은 두 뱀파이어와 한 인간 앞에 앉았다. 나자크가 시장에게 물려놨던 재갈을 거칠게 뺐다. 당장 시장이 외쳤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그렇게 물어보면 퍽이나 잘 대답해주겠다.”

지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나 이 다음에 나올 얘기 알아. 어떻게 뱀파이어들이 더러운 늑대인간들과 함께 다니냐! 그거지?”

카밀도 한마디 보탰다. 그는 이 상황이 꽤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닐걸. 인간이 할 말은 아니고, 저 신관들은 우리 정체를 아는 모양이니까.”

헬리가 대답하자 카밀은 최고신관을 바라보았다. 신관의 눈은 전부 수하에게 향해 있었다.

“공주……!”

그가 신음하며 공주를 부르자 당장 노아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공주님, 공주님. ‘님’ 자 어디 갔어? 하여튼 다르단한테 붙은 놈들은 예의가 없어.”

수하는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민망해라. 그녀는 괜히 안쪽을 둘러보았다.

신전 내부는 더 넓었다. 원형으로 널찍하게 뻗은 공간 안에 돌로 만든 제단이 있고, 촛불이 그 둘레를 따라 켜졌다. 내부의 벽화는 복도보다 더 세밀했다. 쓰러진 일곱 기사와 혼자 남은 공주, 공주, 공주, 오직 공주뿐이다.

말로 하는 긴 설명이 아니라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꿈의 내용과 험악했던 보육원 탈출 덕분에 늑대인간 소년들마저 그 벽화를 곱게 보지 못했다.

“이 그림. 여기에서 너네 다 쓰러지고 공주 혼자 남은 거 맞지? 저건 본 적이 없는 거잖아?”

칸이 그림들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뭐, 한번 뒤져봐야지.”

헬리는 안 그래도 창백했는데 밀가루를 표백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최고신관을 들여다보았다. 샅샅이 ‘뇌 속을’ 뒤져봐야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지만, 마침 그들에겐 시간이 아주 많았다. 헬리는 씩 웃었다.

*

트리샤는 자꾸만 고개를 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창문 바깥 풍경은 그녀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트리샤가 원하는 속도는 아니었다.

마음이 몹시 조급했다. 프린태니어 시에서 시신들을 대충 처리하고, 불에 타고 남은 흔적이라도 더듬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결국 아침 해가 뜰 무렵에 간신히 오토널 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사 놈들이 습격한 거야. 그럼 공주는?’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늘 능력만은 뛰어났던 기사들도 모자라 늑대인간들의 냄새도 났다. 그건 불로 지운다 해도 지울 수가 없는 냄새였다.

갈수록 가관인데, 정작 그놈들 사이에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어쨌든 이 문제는 다르단에게 직통으로 보고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었다.

보육원에서 놓쳤던 기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트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마지 그게 감히 우리를 막지만 않았어도……, 발목만 잡지 않았어도…….’

공주를 가르치고 기사들까지 가르친 마지는 전투에 능하고 아주 유능한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자신의 회복력을 비롯한 모든 능력을 그저 습격자들을 막고 함께 죽는 데 써먹었다.

덕분에 쌍둥이들은 심한 부상을 입었고, 마지가 숨겨놨던 기사들은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어린 아이가 된 놈들인데 놓쳤다. 뼈아픈 일이었고, 그때 다르단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언젠간 다시 나타날 놈들이라고 다르단 님이 말씀하셨지.’

미리 알고 막았어야 했는데, 쓸모없는 동생 같으니! 이런 건 진작 얘기해줬어야지! 새삼스럽게 죽은 동생에 대해 화가 치밀다가도 동생이 죽었다는 생각이 다시 들면 한숨이 나왔다.

어쩌겠나. 살아 있는 언니가 뒤처리를 잘해야지. 하지만 솔직히 동생이 죽어서 슬픈 것보다 다르단이 분노할 게 훨씬 더 중요했다.

“도착했습니다.”

시청 앞에 차가 섰다. 트리샤는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자신이 직접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아직 직원들이 출근할 시각은 아니라 정문은 닫혔지만, 직원들이 이용하는 문이 따로 있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빠르게 향했다. 이미 구워삶아 놓은 시장이나 지하에 처박혀 어서 공주가 나타나라고 빌어대는 신관들이야 관심 밖이다.

오토널 시 전체를 지배하는 자는 트리샤였고, 그녀는 어서 일곱 기사의 목을 얌전히 다르단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녀는 뒤에 경호원과 비서를 비롯한 뱀파이어 셋을 달고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이쪽 복도를 지나 로비와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로 가야 했다.

“히버널로 갈 거야.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다르단 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최대한 좋게 일이 끝날 수 있을까? 트레나에게 뱀파이어를 얼마나 지원해주신 거지?’

분명히 다르단은 트레나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을 거다. 그러니 뱀파이어들을 더 붙여줬겠지.

트레나보다 아는 게 없으니 트리샤는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

뭔가 뒷골이 서늘했다.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서 곧장 돌았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났다.

트리샤는 그녀의 목에 드리워진 검에 질겁했다. 그녀를 따르던 뱀파이어들은 다 제압당했고, 수하가 그녀를 보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공주!’

그녀에게 검을 들이댄 헬리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이야, 트리샤 비서관.”

그녀가 한낱 재상의 비서관에 불과하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준 헬리는 벌레를 보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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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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