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오토널 습격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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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오토널 습격 (5)
2023.04.1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수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헬리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고, 맥박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손을 통해 그가 알아차리게 될까 봐 불안했다. 정작 헬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보고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 속을 마구 흔들어놓더니, 혼자 회복이 빠르다.
‘저래놓고 짝사랑은 무슨.’
괜히 아니란 걸 알면서도 투덜거려 보았다.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집중이 안 된다. 정말 큰일 났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냥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무수한 여학생들의 짝사랑 대상이자 남학생들에겐 남자가 봐도 멋있다는 소리를 듣는 존재면서, 수하 앞에서는 불안해하고 꾸밈없이 표현하는 게 신기했다.
자꾸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그녀는 입꼬리에 열심히 힘을 줬다.
오른쪽.
다행히 몸은 알아서 저절로 움직인다. 이쯤이면 운동신경이 뛰어난 게 아니라 공주가 마셨던 바르그의 피에 깃든 힘이 아직까지도 몸에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수하는 즉시 오른쪽 모퉁이로 몸을 틀어 잠시 숨었다. 헬리가 그녀를 감싸며 복도 끝을 엿보았다.
두근두근도 아니고, 쿵쾅쿵쾅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쾅, 쾅, 쾅 하며 요란하게 심장이 혈관을 내리쳤다.
기억인지 꿈인지, 아무튼 더듬어보니 헬리는 기사 시절에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고백도 많이 받고, 선물도 엄청 받았던 거 같은데.’
하지만 수하는 그에게 준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계속 받기만 한 거 같다. 그녀는 괜히 미안하고 고마워서 혼자 입을 삐죽거리다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복도 쪽을 경계하던 헬리의 눈이 커지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거 뭐야? 나 오늘 생일이야?
응, 그렇다고 쳐.
너 너무 잘해주지 마.
민망해서 헬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던 수하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투가 몹시 퉁명스러웠다. 불쾌했나? 말 안 하고 해서 싫었나?
갑자기 이러면 집중을 못 한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헬리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가 뱀파이어답지 않게 불그스름했다.
면역이 없단 말이야.
처음부터 너무 잘해주면 불안했다. 이렇게 받기만 하다가 수하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한 번 잃어봤기에, 기억까지 통째로 잃어봤기에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
음, 그러면 면역을 갖추기 위해 더 자주 하는 게 좋겠어.
얜 도대체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는 걸까? 헬리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부터 말은 어마어마하게 안 듣는 공주님이긴 했다.
아니, 정정하자. 항상 헬리는 뜯어말리다가 지는 역할이었고, 그녀는 그를 늘 이겼다.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만으로도 이겼다.
근데 방금 분명히 사람이 있었지?
수하는 그 와중에도 목을 슬쩍 빼고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사람 머릿속을 다 뒤집어 놓고 또 혼자 매끄럽게 빠져나가다니, 헬리는 굉장히 억울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것조차 익숙하다는 느낌에 또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언제 이겨본 적이 있어야지.
어. 아무래도 저기가 입구인 거 같아.
입구서부터 보초를 세워놓다니,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도 겉으로 보기엔 허름한 곳처럼 꾸며놔서 저 정도는 아니었다. 레일건이야 사람들을 우습게 아는 레일건 마스터 성격에 그렇게 방비가 치밀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헬리와 수하가 제대로 온 게 맞았다. 저 안에 뭔가가 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시청직원은 그 안으로 사라졌다. 헬리는 고개를 들고 주변에 형제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1층 로비에 선샤인 애들 진입했어.
현재 로비에서 타헬과 함께 관광안내서를 들여다보는 척하고 있는 노아가 무심히 대답했다.
타헬은 실전에 투입되는 게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지만, 저번에 정예 뱀파이어들과의 전투경험도 있었기에 생각보다는 침착했다. 혹시 몰라 부상을 입었을 때 쓰일 응급처치 도구들을 담은 가방끈을 꽉 잡고 있지만 않아도 좋으련만.
노아는 타헬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안 형이랑 카밀이 청소부로 위장해서 뒤쪽으로 들어온다고 했어.
다들 관광객, 아니면 청소부를 기절시킨 뒤 유니폼을 슬쩍 빼앗아 입고 잠입했다. 위장하지 않는다면 갑자기 시청 1층을 꽉 채운 덩치 큰 고등학생 여럿을 누구나 다 의심할 것이다.
자카?
헬리는 자카를 불렀다. 잠입하는 사람 중에 가장 걱정을 덜하게 되는 건, 역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카였다.
칸이랑 루슬란, 마한이 지붕으로 올라갔어. 3층에 열려 있는 창문이 있대. 그쪽으로 진입해서 내려갈 거야. 어차피 위층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사이 수하가 목을 한 번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녀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며 헬리는 자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시장을 조심해. 트레나의 기억에 따르면 트리샤가 시장을 조종하고 있으니까.
시장이 무장을 하고 있을까?
그건 아니지만 들키면 골치 아파질……, 게 아니지.
헬리의 눈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아마 자카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시장을 잡으라고 할까?
그래. 이리로 끌고 와봐. 우리는 지하 2층 보일러실 앞이야. 아무래도 이쪽이 입구인 거 같으니까, 시장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면 뭐든 나오겠지. 아니면 시온에게 데려가도 돼.
형의 말대로 하려던 자카가 멈칫거렸다.
근데 헬리 형, 좀 바뀐 거 같다? 예전에 그런 일은 질색하지 않았어?
이쯤 되면 당한 만큼 갚아주기도 해야 하는 법이야.
그 말 마음에 드네.
자카는 짧게 웃은 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늑대인간 소년들과 합류하러 간 모양이다.
작전은 실시간으로 변경될 거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트리샤가 자리를 비운 틈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으며, 그러려면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최대한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해서 일단은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수하야.
하지만 그가 지켜야 하는, 그리고 지키고 싶은 존재는 언제나 너무 무모해서 탈이었다. 헬리는 당장 튀어 나갈 기세인 수하의 어깨를 잡았다. 말간 눈이 그를 올려다본다.
딱 저 입구에 몇 명이 있는지만 보고 오는 거야. 더 들어가면 안 돼.
아니지. 저 안에 몇 명이 있는지는 확인을 하고 와야지.
그게 말이 되냐? 수하는 표정으로도 말했다.
그럼……, 그럼 더 들어가지 말고 딱 저 보일러실 안만 확인하고 와. 계단 같은 게 보여도 내려가면 안 되고, 복도가 보여도 거기로 가면 안 돼. 알겠지?
네에, 네, 이 잔소리쟁이야. 내가 언제 네 말 안 듣는 거 봤어?
순식간에 말간 눈이 사라지고 일렁이는 안개로 변했다. 하지만 헬리는 그녀를 안개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주 안 들어놓고 무슨 소리야?
아니라니까. 난 네가 한 말은 언제나 성실하게 잘 들었어. 듣지 않으면 듣게 만들었잖아.
휘리릭, 안개가 빠르게 움직여서 복도를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여차하면 빼 들 수 있게 검자루 위에 손을 짚은 헬리는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혼자 정찰로 보낸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야 네가 빠져나갈 궁리만 하니까 나도 요령만 늘어난 거지.
아니야. 나는 정말 결백해. 입구에 두 명, 음, 드리프터는 아니네. 시커멓게 다 뒤집어쓴 게 시작부터 정예 같은데? 으, 싫다.
수하는 짜증을 내며 보일러실 안을 쏘다녔다. 그 뱀파이어에게 협력하는 시청 직원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네 말이 다 맞다는 것도……, 으음……, 인정하기 싫지만 알고 있어.
가만히 듣고 있던 헬리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알고 있었어?
……너 그럴 때 너무 짜증 나.
짜증도 나고 잘생겨서 좋다고도 생각하잖아.
진짜 짜증 나.
막 던진 건데 맞았나 보네. 헬리는 슬그머니 웃었다. 너무 귀엽잖아. 진입했으니 수하는 긴장이라도 풀고자 아무 말이나 하다가 본심이 툭툭 나오는데 그게 신기하고 재미도 있었다.
으음……, 보일러실인데 이렇게 보초를 세워두면 괜찮나?
왜, 몇 명인데?
들어오는 입구에 둘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 시작점에도 둘이 또 있어. 그리고 보아하니 5분 간격쯤으로 한 사람씩 도는…….
말이 툭 끊겼다. 헬리는 당장 검을 틀어쥐었다.
수하야? 왜 대답이 없어, 수하야?
입구 쪽 경비는 아직까지 굳건히 서 있다. 경비들의 생각 역시 지극히 평범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데, 순식간에 헬리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휘둘려선 큰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는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고작 몇 초 만에 그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나 처리했어.
아. 헬리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처리하기 전에 말을 해야지.
얘네가 지금 양쪽 입구를 왔다 갔다 하는 타이밍이 영 이상해. 하나씩 처리할 수 있는데 잘 맞추기가 어려워. 잠깐만 있어 봐. 하나 더 잡을게.
그냥 같이 들어갈 걸 그랬다. 얘가 사람을 소리 없이 제압할 수는 있으려나, 시체까지 혼자 끙끙대며 처리할 텐데 그런 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속이 바짝바짝 탔다.
어째 전보다 증상이 더 심해진 거 같아 헬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이쯤 되니 반듯하게 제 일을 하는 건 수하고 중심을 못 잡고 정신없어하는 건 헬리다.
‘지가 먼저 안아줘서 사람 혼 빼놓고……!’
그는 몹시 억울했다. 그때 문 쪽에서 털썩, 털썩, 하고 사람 쓰러지는 소리가 아주 익숙하게 들렸다. 그러곤 문이 빼꼼 열렸다.
“헬리햐아……! 다 끝났허어……!”
다 처리해놓고 뭘 저렇게 소곤소곤 부르나. 헬리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 없이 웃으며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를 발견한 수하가 반짝 웃으며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어? 뭐야?”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시온이 엔지와 함께 내려오다가 눈이 커졌다. 저기까지 들어갔다고?
“얼른 와.”
수하가 그들에게도 어서 오라고 크게 손짓했다. 소년들은 기척 없이 달려서 얼른 보일러실로 위장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보일러실인데?”
대충 보일러를 가져다 두고 위장해뒀지만, 보일러실이 이 정도로 널찍하고 여러 사람이 오가는 통로에 있을 일인가.
시온은 재미있어하며 수하가 쓰러트린 뱀파이어들을 치우려다가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얼마나 가한 거야?”
“조절 중이야. 소리 안 내려고 고생했다고.”
수하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 주먹에 맞은 게 자신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 시온은 쓰러진 뱀파이어들을 질질 끌어다 보일러 파이프 사이에 처박아 놨다.
이쯤이면 뱀파이어들이 와도 바로 발견하지는 못할 거다. 엔지는 주변을 살핀 뒤 뱀파이어들을 샅샅이 수색했다.
“저쪽에 또 계단이 있네.”
시온이 반대편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대로 돌파할 거야, 형?”
헬리는 대답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시청 문은 닫혔어?”
“닫혔지. 이제 퇴근 시간이야. 뒤에 노아랑 타헬도 같이 오고 있어.”
좋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젠 들어갈 수 있는 만큼 깊숙하게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돌파할 수 있는 데까지만 돌파하자.”
아마 칸도 이 말에는 동의할 거다. 언젠 뭐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적과 마주쳤나? 그때그때 되는 대로 각자의 순발력과 재치, 그리고 숨은 잠재력에 의존해서 여기까지 왔다.
헬리는 검을 빼 들었다.
“보이는 놈들은 그냥 다 죽여.”
냉정하지만 그래야 했다.
지하 2층 보일러실 돌파했어. 넷 처리 완료. 다들 이쪽으로 합류해. 안쪽으로 계속 들어간다.
보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소년에게 의사를 전달한 헬리는 엔지가 좋아하면서 권총을 빼내는 걸 보았다.
“쓸 수 있겠어?”
“급한 대로. 꽤 괜찮아.”
“이곳 방음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길 바라야겠네.”
총소리가 외부에 들리면 골치 아파질 테니 말이다. 시온도 영 내키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총을 집어 들었다.
“적당히 챙겨. 계속 털면서 싸우면 되니까.”
짐을 굳이 무겁게 할 필요는 없었다. 엔지는 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내려온 저쪽 계단에서 노아와 타헬이 긴장한 얼굴로 오는 게 보였다.
이제 슬슬 3층으로 들어간 늑대인간 소년들이나 위장한 채 잠입한 이안과 지노 쪽에서도 얘기가 들릴 게 분명했다.
헬리는 뒤를 한 번 본 뒤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에는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계단이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 거지?”
엔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속삭이며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계단과 그 벽을 살폈다.
“글쎄.”
시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많이 내려가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깊으면 깊을수록 더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법이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