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오토널 습격 (4) (65/81)


65. 오토널 습격 (4)
2023.04.0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잊어버린 적 없어.”

수하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한 번도 초조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던 헬리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다.

싸우고, 정신없이 이동하는 사이에 모자란 쪽잠을 자고, 또 싸우고, 또 이동하길 반복한지라 그사이 헬리와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멀어지기는커녕, 더 가까워지고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헬리는 아닌 걸까? 그래,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왜 그래? 무섭고 불안해? 우리 여태까지 잘해왔잖아.”

“그게 아니라…….”

분명히 헤어졌을 거다. 수하가 공주이던 때와 그들이 보육원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사이에 벌어진 일은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히 헤어졌다. 그렇게 마음에 품고 놓는 방법을 몰라서 어쩌질 못했으면서 결국 그녀를 놓친 거다.

아마 높은 확률로 뱀파이어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재상 다르단 때문이겠지.

점점 그놈에게 가까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이번엔 지킬 수 있을까? 이번엔 형제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른다. 언제나 가능성은 미약했고, 희망을 억지로 다독이며 가던 삶이니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선샤인시티 애들과 함께 온 건 예상 밖의 일이지만.’

그래, 늑대인간 소년들은 큰 도움이 된다. 원장선생님이 남겨준 검도 엄청난 힘이 되었다.

이번엔 할 수 있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도 갑자기 기분이 곤두박질친다.

‘재상을 꺾으면 다 끝날까?’

아마도.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정확하게는 수하와 그의 사이 말이다.

수하는 이제 슬슬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애가 큰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위험한 적들을 마주하러 가고 있었다.

꿈과 지금을 동일시하는 건가? 다 헷갈리는데, 그 와중에 수하를 보면 불안했다.

“헬리.”

수하는 그를 빤히 보며 그의 옷깃을 살살 잡아 흔들었다. 그냥 확 끌어당겨도 되는데 굳이 저렇게 구김도 안 가게 잡고 흔드는 건 또 뭐람.

“괜찮아.”

저건 맞는 말.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할 수 있어. 할 수 없었으면 진작 끝났을 거야.”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게다가 그런 건 수하보다 뱀파이어들과 싸워온 경험이 훨씬 많은 헬리가 더 잘 알았다. 그는 막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더 가까이 가면 마음이 전달될까?

“이번에야말로 그놈은 죽여버릴 거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헬리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늘 다정하고 차분하던 사람이 저렇게 새파란 살기를 보이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라 수하가 놀랄 지경이었다.

“그놈?”

“재상.”

“아.”

수하가 못 한다면 그가 할 거다. 높은 확률로 그들이 헤어진 이유도 다 그놈 때문일 테니까. 전부 다 그놈 탓이었다. 보육원 선생님들이 돌아가신 것도, 늑대인간 소년들이 저렇게 살아남으려 애쓰는 것도, 전부 다, 그래, 전부 다.

“그놈은 내가 죽일 거니까, 너는…….”

그는 수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너는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날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다음에 몸을 휙 돌려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그를 수하가 붙들어다 다시 원위치로 돌려놨다. 뿌리칠 수도 있는 힘이지만 그는 순순히 잡혀서 돌아왔다.

“난 너 피한 적 없어.”

그녀는 그를 또렷하게 올려다보았다. 헬리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뭘 해도 그녀에겐 늘 지는 기분이다. 아니, 그냥 져주고 싶었다. 수하가 그렇다는데 그 말이 맞는 거지.

“이런 일을 겪는 건 처음이라서 정신이 없었을 뿐이야. 변명 같지만. 아니, 변명이긴 하네, 이거.”

꿈을 꾸지 않았다면 헬리가 왜 이렇게 구는지 몰라 당황했을 거다.

하지만 마지가 헬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꿈을 꾼 이상, 수하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았다.

그는 아마 여러 사람에게서 접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거다.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겠지.

수하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지금도 열심히 듣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사였던 그는 표정마저 능숙하게 숨길 줄 알았지만, 지금의 헬리는 원하는 게 뭔지 티가 다 난다. 아니, 그게 눈에 보일 만큼 수하가 그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리 와봐.”

그녀는 손을 펼쳤다. 헬리는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친구 간에 포옹 같은 거 안 해.”

저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제 타헬도 안아주는 거 봤어.”

“걔는 어리잖아. 너랑은 안 해.”

“내가 언제 친구 간에 안자고 했어?”

수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마자 그는 그녀를 와락 안았다. 안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헬리는 그녀를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수하는 그의 몸에 팔을 둘렀다.

“……네가 먼저 친구 간에 안는 거 아니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여튼 피곤해.”

“분명하게 하자는 거지.”

“분명하게는 무슨, 그러기 싫어서 끝까지 말 안 했던 주제에.”

수하는 헬리의 몸에 얼굴을 묻으면서 웅얼거렸다.

“내가?”

“어, 네가. 너 끝까지 말 안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일까. 헬리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꼭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으며 생각했다.

“아. 그때.”

헬리는 수하의 정수리 위에 턱을 올렸다.

아, 좋다. 계속 쭉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리버필드 시 해변을 함께 걷자고 해 볼까? 한가한 곳에 가서 내내 이렇게 안고 있기만 해도 피로가 다 풀릴 텐데.

눈가가 뻑뻑하다. 계속되는 싸움은 정신적 피로를 몰고 왔다.

“공주님은 너무 귀하신 분인데 한낱 기사 나부랭이가 어떻게 고백을 하겠습니까.”

장난기가 섞였지만 분명히 진심인 목소리에 수하는 또 얼굴이 화끈거리고 말았다.

“지금은 공주 아니잖아.”

“아니니까 들이댔지.”

“들이댄다는 자각은 있구나. 정말 다행이다. 난 그런 것도 없이 아무한테나 그러는 줄 알고 걱정했다고.”

웅얼대는 목소리가 딱딱하다. 긴장했구나. 그럼 익숙해질 때까지 더 오래 안고 있어야지. 헬리는 허공을 보며 픽 웃었다.

“아무한테 그러지 않아. 내가 너 한정으로는 좀 뻔뻔한 구석이 있어.”

헬리는 소년답게 킥킥거렸다.

“응. 그래. 그런 거 같아.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한 5분은 더 이러고 있어도 돼. 아직까지 뱀파이어에게 충성하는 인간은 못 찾았거든.”

5분씩이나? 수하는 이걸 좋다고 생각해야 할지, 큰일 났다고 생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허탕인가?”

“아닐걸. 더 내려가면 있을 거 같은데.”

헬리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을 힐끗 보았다. 5분만 있다가 내려가자. 그래, 5분만.

그는 수하를 더 꾹 안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꿈에서는 바라기만 했던, 아니, 바라지도 못하고 억지로 접으려고 애썼던 일이었는데.

“근데 진짜로 절대 말 안 할 생각이었어?”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하를 보다가 눈을 가렸다. 너무 귀엽잖아.

“뭘?”

“나한테 좋아한다고 절대 말 안 하려고 했냐고.”

“너는 그때도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대체? 그렇게 티가 났어?”

아닌데. 공주는 상당히 눈치가 없었다. 너무 몰라줘서 화가 나고 억울하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도 몰랐다.

“……마지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

“아하. 엿들으셨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어련하시겠어요.”

수하는 인상을 썼다.

“너 왜 말투가 자꾸 그때 같아지는 거야?”

손바닥 위에 공주를 올려놓고 빙글빙글 웃으며 놀려먹던 기사 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

“맺힌 게 많아서.”

“내가 그렇게 힘들게 했어?”

“어.”

“……미안.”

“예쁜 건 알겠는데 그럼 다정하지나 말든가. 사심도 없이 다정하게 사람 챙기는 거, 너만 깔끔하지 받는 사람은 죽을 맛이라고. 그러니까 좋아하지. 마음을 내가 어떻게 접냐고.”

우와. 와. 정신을 못 차리겠다. 한번 툭 터놓자마자 물벼락이 쏟아지듯이 솔직한 말이 마구 쏟아졌다. 수하는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언젠가는 기사 못 해먹겠다고 때려치우면서 고백했을 거야.”

“진짜?”

그녀는 깜짝 놀라서 헬리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계였어.”

못 견디겠어서, 눈은 자꾸만 그녀만 좇고 있어서 돌아버릴 것 같았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헤어졌던 걸까. 무슨 마음으로 놓았던 걸까.

헬리는 상상하기도 싫어서 수하를 빈틈없이 안았다.

“이번에는 헤어지지 말자. 이번에도 또 놓치기 싫어.”

으응, 하고 그의 몸에 묻혀 웅얼거리는 대답이면 충분했다. 그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저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 학생들, 여기는 관람하는 데가 아니야.”

혼자 걸어오던 중년 여자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호호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래층으로 가야 하나요?”

“아니, 위층이지. 여긴 지하 1층이에요. 아래에는 보일러실이랑 설비실밖에 없답니다.”

“감사합니다.”

보일러실과 설비실이라. 수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헬리와 붙어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 중년 여인은 서류철을 안고 그들과는 반대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갔다.

……보일러실에 왜 서류를 가져가지?

수하가 헬리에게 속으로 물었다

왜냐하면 보일러실 말고 다른 게 있으니까. 저 여자가 뱀파이어들을 위해 일하고 있어.

이젠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다 읽은 헬리는 위층에 있는 형제들에게 말을 전했다.

발견했어. 분홍색 카디건과 회색 치마를 입은 50대 여성. 현재 지하 2층으로 가고 있어. 우리는 지하 1층이야.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내려와.

당장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데 가장 능한 자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소리는 최대한으로 내지 않는 게 좋다.

내가 먼저 가볼까?

자카가 눈으로 물었다. 수하도 상황만 된다면 그녀가 가겠다는 의지를 표정으로 보였다.

신중하자. 자카, 일단은 선샤인시티 애들한테 연락 부탁해. 여기에서 바로 진입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대비해야지. 지금 몇 시지?

4시 38분. 곧 시청은 문이 닫힐 거야.

닫히기 전까지 다들 들어와 있는 편이 좋겠어.

자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휙 사라졌다. 헬리는 아예 옆구리에 끼고 있다시피 하고 있는 수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당장 급습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성공한다면 뭐든 상관없어. 차라리 트리샤가 없는 지금이 낫지 않아?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트리샤.

헬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아래층으로 소리 없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트리샤는 프린태니어 시 외곽을 뒤지다가 중상을 입고 일반 시민에게 발견되었다는 뱀파이어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바로 그 뱀파이어가 있다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환자분,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막는 간호사들을 밀치고 트리샤는 침대에 누운 뱀파이어에게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넌 뭘 알고 있지?”

“……이능력…….”

뱀파이어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데였고, 은으로 입은 상처도 보였다. 햇볕에 의한 상처도 극심했다. 무엇보다 깊은 자상이 다리에 나 있었는데, 뱀파이어의 회복력이라면 당연히 아물었어야 할 상처가 전혀 낫지 않았다.

“비켜주세요, 쇼크가 왔습니다!”

그 상처에서 시커멓고 진득한 뱀파이어의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트리샤는 저런 상처를 남기는 끔찍한 물건을 어디선가 보았다.

“왜 피가 안 멈추지?”

“이 사람 피가 이상해요!”

트리샤는 돌아서서 뱀파이어들에게 눈짓했다. 정체를 들키게 되기 전에 어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사망했습니다.”

뱀파이어의 회복력마저 무시하고 절대 낫지 못하는 치명상을 입히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

공주의 가장 최측근 수호기사가 가지고 있던 검이자, 어떻게든 찾으려 애썼으나 끝내 왕국에서 사라졌던 검이 다시 돌아왔다.

‘이능력이라. 마지는 확실하게 죽였는데…….’

생각하며 걸어가던 트리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 낡아빠진 보육원에서 시신을 확인하지 못한 놈들이 있었다.

“하……, 하하.”

마지가 빼돌렸던 기사들이 돌아온 건가. 그녀는 사납게 웃기 시작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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