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오토널 습격 (3)
(64/81)
64. 오토널 습격 (3)
(64/81)
64. 오토널 습격 (3)
2023.03.2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잠시 트리샤가 비운 시청은 낮에는 인간들로 분주하게 돌아가고, 밤에는 뱀파이어들의 소굴이 따로 없었다.
“얘넨 또 전화는 쓸 줄 알아요, 에휴…….”
전자기기랑 친하지 않으면 아예 쓰지 말든가. 자카는 뱀파이어들의 어설픈 전자기기 의존에 대해 투덜거리면서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는 시청의 기본적인 전산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레일건보다는 낫잖아.”
옆에 있던 루슬란의 말에 자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건에 비하면 양반이지!
“거긴 전산이라고 할 게 없었어. 저언혀.”
“여긴 있긴 하다는 얘기네. 상태가 어때?”
으음. 자카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별 거 없다는 뜻이다.
“정전은 시킬 수 있는데, 솔직히 추천은 안 해. 그거야말로 놈들한테 날뛰라고 자리 깔아주는 거니까. 해킹을 해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방화벽 작동은?”
그건 가능했다. 수틀리면 짧게나마 방화벽을 다 내려서 뱀파이어들을 잠시 가둬놓거나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스프링클러까지도 조절 가능해. 물이라도 좀 뿌려줘?”
“더우면 부탁할게.”
루슬란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물을 좀 뿌려대는 걸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있으나 마나 한 도움이었다.
“아직까지 트리샤인지, 그 여자가 돌아오지 않은 거 확실하지?”
그의 물음에 자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24시간 감시 중이야.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확실해. 아직까지 레일건이나 우리가 싸운 곳에 있는 카메라에 뱀파이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
“어디? 어, 진짜네. 쟤네 저기에서 뭐 건질 것도 없는데 뭐하러 저러고 있대?”
“은침 수거 안 한 거에 다치기도 하더라고. 가만 보면 재미있어.”
“좀 줘봐. 나 계속 볼래.”
재미있어 하는 루슬란에게 노트북을 통째로 넘긴 자카는 볼 게 사라지자 엔지 쪽으로 고개를 넘겼다.
“도와줘?”
“여긴 이미 손이 충분해.”
노아와 시온이 엔지의 곁에서 이번에 가져온 탄환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자카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총을 쏘기 시작하면 분명히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할 텐데.”
지금 루슬란이 들여다보고 있던 저번 싸움터는 프린태니어 시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 그나마 듣는 사람이 없었지만, 시청에서 총소리라면 대번에 난리가 날 거다.
“뭐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지금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잖아. 게다가 분명히 그 시청에 잡혀 온 늑대인간들도 있을 거야. 그쪽도 구출해야 하니까 우리 쪽에서도 총을 쏠 수밖에 없어.”
시온이 빠르게 탄환을 정리하며 중얼거리다, 이쪽을 보는 루슬란과 엔지, 그리고 나자크를 마주 보았다. 얘네 왜 쳐다봐?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야, 노아야, 뭐 묻었어?”
노아는 시온의 뽀얀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저놈들은 왜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봐?
“아니……, 우리 말고 뱀파이어가 당연히 늑대인간 구출을 생각한다는 게 엄청나게 어색해서 그러지.”
나자크가 더듬더듬 말했다.
“뭐래. 누가 들으면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에서 우리는 손 놓고 있고 너희가 죄다 잡혀 있던 사람들 구출해서 나온 줄 알겠다?”
시온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잘 정리한 탄환 상자를 따로 뒀다. 이쯤이면 한 사람이 충분히 잘 쓸 수 있는 물량이다.
“그 안에 분명히 늑대인간들이 엄청나게 붙잡혀 있을 거야. 구출할 작전이나 생각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야, 얘네 진짜 왜 이래? 시온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한소리를 하려다가 말았다. 뜻밖에도 늑대인간 소년들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기 때문이다.
“……의외로 없을 수도 있어.”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에 많은 늑대인간이 포로로 잡혀 있을 텐데? 시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토널을 거쳐서 히버널인가 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니까 있을 수는 있는데……. 보통 거리가 이쯤이면, 여기에서 많이 죽어. 계속 끌려다니느라 체력이 다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아니면 여기에서도…….”
에스티발 시에서부터 오토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던 엔지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실험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고.”
시온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들어가서 뭘 볼지,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어.”
엔지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구할 뿐인 거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남는 거고.”
말을 잃은 시온의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노아가 물었다.
“계속 그렇게 살아왔던 거구나?”
구해야 할 동족이 없었던 뱀파이어 소년들에겐 생각해보지 않았던 처절한 방식이었다.
“뭐, 우리나 너희나 똑같이 살아왔던 거 같은데?”
나자크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래.”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정정했다.
“살아 있는 늑대인간이 있다면 꼭 구하자.”
뱀파이어들이 늑대인간의 피에 집착하는 이유가 결국 공주가 마셨던 고대 늑대신 바르그의 피 때문이란 걸 안 이상, 이 역시 뱀파이어 소년들의 일이기도 했다.
*
트레나는 죽었다. 숯덩이가 된 시신 사이에서 트레나의 시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참혹한 정예 뱀파이어들의 시신을 모조리 검시소에서 빼내며 트리샤는 한 번 더 중얼거려보았다.
동생이 죽었다.
뒤늦게 찾아온 감정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섬뜩한 공포였다. 트레나가 죽었다면 트리샤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다. 정예 뱀파이어들을 끌고 와서도 못 죽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다르단 님도 아시는 일일 텐데……?’
트리샤는 트레나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분명히 기억했다. 동생은 그녀에게 전화해서 다르단 님이 어디 계시냐고 공격적으로 물었고, 동생에겐 공로 따위 전혀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트리샤는 늘 그랬듯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동생이 알아서 다르단 님을 찾아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트리샤는 눈을 잠시 꾹 눌러 감았다.
‘보고를 드려야겠네.’
대충 생각이나 해 보자.
‘다르단 님께, 제 바보 같은 동생이 다르단 님이 내어주신 정예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굴려보니 보고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내용이라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라리 죽은 트레나가 부러울 지경이다.
이 일에 다르단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의 차가운 분노는 마주했다간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이어서, 트리샤는 순식간에 마음속에 돌덩어리가 잔뜩 얹힌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보고를 하려면 다르단에게는 직접 찾아가야 했다. 그가 있는 히버널, 버려진 옛 왕국의 수도까지 가서 그를 직접 대면해야 했다. 그냥 전화로 보고를 미리 올릴 수 있다면 차라리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마주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안 그래도 차갑던 손이 더 차가워지고 땀이 뱄다.
“뭐 때문에 이 꼴이 났는지 아직도 몰라?”
“흔적이 다 불에 타서…….”
분명히 다르단은, 정예를 내어준 다르단은 이유를 알고 있을 거다. 정예를 왜 내어줬겠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적이 있으니 내어줬겠지. 그렇다면 그 적이 정예와 트레나를 궤멸시켰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트리샤는 일단 동생의 죽음은 밀어두고, 다르단의 분노를 최소화할 보고 방식을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다르단도 알고 있는 적에 대해 트리샤가 모른다면 안 될 일이다. 그녀는 온갖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아무것도 공유해주지 않은 동생이 참 짜증 났다. 물론 트리샤도 동생에게 아무것도 공유해주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는 늘 관대한 법이다.
*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 몇 명이 시청 로비를 걸어 다녔지만, 워낙 별의별 사람들이 시청에 볼일이 있는 터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 중에 늑대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예민한 뱀파이어들이 알아차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늑대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그놈의 향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그나마 시청이 오토널 시 관광명소에 해당해서 다행이다.
뱀파이어들은?
아직 낮이잖아. 없어.
헬리는 돌아오는 솔론의 대답에 수하의 손을 고쳐 쥐었다.
겉으로 보기엔 풋풋한 학생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 헬리는 지금 하지 않던 짓을 하고 있었다. 원장선생님이 절대로 해선 안 된다고 한, 사람들의 의식을 허락도 없이 읽는 짓을 하고 있는 중이다. 누가 뱀파이어의 끄나풀 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집중해야지.’
수하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서 잡고 있는 헬리를 절대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엄밀히 잠입 중이었고, 여기에서 수틀리면 그대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까지 내린 후였다. 곧 싸우게 될 가능성이 무척 크니 여기에서 이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안 되는데 말이다…….
‘손 엄청 커.’
크고,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따뜻했다. 게다가 왜 하필 깍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낀단 말인가.
‘이거 사심이지? 맞지?’
꿈속의 헬리나, 지금의 헬리나 그런 면에서는 똑같다. 공주에게 차마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그렇다고 접지도 않았다. 지금 헬리는 기다리겠다고 하면서도 수하에게 표현하는 건 멈추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혼자서 설레발을 떠는 걸 수도 있다.
수하는 고개를 들어 헬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살피느라 바빴다.
‘……내 설레발이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해서 수하는 잘 지킬 수 없을까 봐 일단 꽉 붙잡아놓는 게 분명했다.
헬리는 존재 자체가 유죄다. 이 긴장되는 순간에 혼자 괜히 설레다니, 정신 차려야지.
수하는 괜히 주변을 살폈다. 어디서 뱀파이어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수하야, 이쪽으로.”
“아, 응.”
헬리가 그녀를 로비에서 시청 안쪽으로 데려갔다. 수하는 바짝 긴장하며 그를 따라갔다. 체격 좋은 경비원이 제복을 입은 채 돌아다니고, 안쪽에는 원형으로 뱅글뱅글 도는 계단이 각각 위층과 아래층을 향해 뻗어 있었다. 헬리는 주저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경비원이 입구에 하나, 1층에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또 여기도 분명히 있겠지?’
열심히 헤아리며 나중에 안개가 되어 어디부터 뒤질지 헤아리고 있던 참이었다. 헬리가 갑자기 그녀를 휙 잡아다가 움푹하게 패인 벽감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등은 안전하게 감싸서 벽과 부딪치지 않게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설마 뱀파이어인가? 수하가 당장 공격할 태세를 갖추려는데 모자챙 아래로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헬리의 눈이 들어왔다.
그는 똑바로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 학생들, 데이트하려면 저쪽으로 가야지, 여긴 안 돼.”
“왜 그래, 좋을 때잖아. 내버려 둬.”
시청직원들이 한소리를 하며 지나갔다. 아, 저 사람 때문이구나. 수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사람이 지나갔는데도 헬리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뭐해?”
“뭐하긴, 우리 데이트하는 중이잖아.”
얘가 원래부터 이렇게 컨셉에 충실했던가. 수하는 바짝 다가오는 단단한 품에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우리 할 일 있잖아.”
“응. 데이트. 돌아갈 때 아이스크림 먹을까?”
그의 눈이 화사하게 휘었다. 눈앞이 아찔해진 그녀가 중얼거렸다.
“헬리야, 우리 정신 차리자, 제발…….”
네가 이러면 나는, 나는 너무 힘들단 말이다! 수하는 정신이 혼미해지려 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왜 얼굴로 공격하는 건데!
“정신을 차리고 있어. 그런데 요즘 일이 하도 많아서 네가 날 자꾸 까먹는 거 같아.”
“안 까먹, 까먹지 않았어.”
수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려고 해서 다시 가다듬은 뒤 침착하게 말했다. 너 같으면 널 까먹겠냐! 몹시 억울했다.
“거짓말.”
“거짓말은 무슨, 야, 좀 놔봐. 더 내려가 봐야 하잖아.”
“아무도 없어. 말 돌리지 말고 나 봐. 아이스크림 싫어? 그럼 다른 거 먹으러 갈래?”
엄마야. 수하는 만난 지 너무 오래된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저 시무룩하게 처진 눈이 갑자기 왜, 왜 이 무서운 곳에서 이러는 걸까요? 남자애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신경을 쓰고 있냐니, 저 얼굴 가지고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해요? 당연히 신경 쓰지! 엄청나게 신경 쓰지!
하지만 헬리의 표정은 어딘가 진지하다 못해 절박해 보였다. 뭔가를 걱정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시간 있단 말이야. 조금은 있어.”
꿈을 많이 꿀수록 기억은 선명해지고, 잊었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헬리는 공주를 보던 다르단의 눈빛을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었다.
“둘이서만 이렇게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은 있다고.”
볼멘소리에 수하의 눈은 저절로 잡고 있는 손으로 내려갔다. 헬리는 각이 진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나 잊어버리지 좀 마.”
그게 꼭 초조해하다가 결국 터진 목소리 같아서 수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헬리는 그녀가 아는 그냥 고등학생이자 뱀파이어 소년이 아니라, 말괄량이 공주를 쫓아다니면서 마음은 티도 내지 못했던 기사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수하는 그때도 무심했고, 지금도 다른 데만 보는 건 똑같다.
정신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헬리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신분 차이로 인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못 하던 그때처럼 똑같이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