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꿈 (17) (61/81)


61. 꿈 (17)
20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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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꿈이라는 단어 하나에 수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헬리는 분명히 포착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겐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지.’

알고 있었다. 꿈을 통해서든, 혹은 새로 전학 온 수하와 여기까지 오면서든, 어쨌든 알고 있었다.

적에게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서 속여 넘길 만큼 담력이 세고 강하지만, 그녀는 가까운 이들에겐 몹시 약했다. 거짓말도 못하고, 해도 티가 나는 솔직한 성격이라 모두가 그녀를 아꼈다.

그럼 지금 수하는 헬리도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끼는 건가. 생각을 하다가 그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입꼬리가 비식비식 제멋대로 움직이며 올라가려고 했다.

몇 번이나 같이 싸웠는데 이 정도면 전우가 아닌가. 목숨을 서로 구해주고 도와준 사이다. 헬리의 생각에, 이건 상당히 특별하고 가까운 사이가 맞았다.

“꿈……, 꿈은 꾸지, 가끔……?”

그리고 높은 확률로 헬리가 예상하는 바로 그런 꿈일 게 분명했다.

굳이 수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짓고 있는 미묘한 표정과 살살 피하는 시선만 봐도 안다. 자주 관찰하고 관심을 많이 가지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알 수가 없어 애가 타지만 말이다.

“나도 꿔.”

“아, 그렇구나. 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수하를 보며 헬리는 다시 한번 고민했다.

이쯤에서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고, 나뿐만이 아니라 내 형제들이 다 같은 꿈을 꾸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고. 너도 그렇지 않냐고.

그들이 돌아가야 할 드셀리스 아카데미와는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고, 이런 식으로 가다간 차분하게 앉아서 대화할 시간마저 없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적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목덜미가 붉어지더니, 홍조가 귀까지 올라오고, 그러곤 결국 얼굴 전체가 익어버릴 정도로 곤란해하는 수하를 보면 입을 다물게 된다. 목숨이 위험한 이 순간에 어떻게든 알고 있는 단서를 다 맞춰봐야 하는데 다그치고 몰아세울 수가 없다.

차라리 수하가 그의 형제들이었다면 편했을까?

‘애들이었으면 절대 안 봐줬지.’

딱 앉혀두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헬리는 굳이 생각을 읽어내지 않아도 상대를 어떻게 압박하면 진실을 실토하는지 잘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심지어 동생들도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이 솔직하게 말하길 권유하면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왜, 그게 지금 이리저리 눈동자를 또로록 굴리고 있는 수하한테는 할 생각이 안 드는 걸까.

‘그냥 넘어갈까?’

헬리는 잠시 그들의 앞에 펼쳐진 계획을 헤아렸다.

사실 계획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일 것도 없었다. 레일건 마스터 트레나에게서 얻어낸 정보와, 그녀가 끌고 왔던 뱀파이어들에게서 털어낸 단서들을 가지고 분석한 뒤 다음 목적지로 아무것도 모르고 떠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프린태니어 시에서 북쪽으로 더 가면 나오는 오토널 시였다.

무엇보다 결국 그곳에 있을 뱀파이어들이 노리는 것도 공주, 혹은 수하다.

헬리는 트레나 안에서 꿈틀거리던 욕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공주가 마셨던 고대 수호신의 피, 그 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힘에 대한 질척한 욕망. 그 욕망이 수하에게로 향한다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럼 너는 네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니?

꿈에서 원장선생님이, 혹은 왕국의 장관이자 스승이 물었다.

그때의 헬리는 어떻게 했을까?

지금의 헬리는 조금도 성숙하지 못했다. 그냥 수하에게 미움받기 싫고 부담 주기 싫으면서 가장 가까운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적진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고 있다는 모순이 그를 괴롭게 했다.

꿈에서 본 헬리였다면 이런 때 아주 능숙하게 대처했겠지. 철저하게 마음은 숨기고, 그러면서도 눈앞에 있는 여자애는 가장 안전하게 지키고.

‘나는 왜 내가 기억도 못 하는 나를 질투까지 해?’

헬리는 얼굴을 확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수하가 엉겁결에 말했다.

“꾸, 꿈은 나도 꾸는데……!”

아, 제발. 입이 안 떨어진다. 맨정신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차라리 그녀가 꾼 꿈을 대충 생각만 하고 있으면, 헬리가 알아서 들여다보는 편이 훨씬 빠르겠다. 그런데 내용만 봐도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볼까 봐, 그게 겁이 났다.

하지만 말해야겠지? 애초에 재상인지 다르단인지 그 남자랑, 쌍둥이 뱀파이어들이 다 나왔다면 말은 해야 했다. 차라리 말한 뒤, 그녀가 너무 겁이 나서 꿈에 무서운 적들이 나타나는 거라는 소리를 듣는 편이 낫겠다.

“나는 네 꿈을 꿔.”

헬리가 건조한 말투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갑자기 툭 던졌다. 수하는 자신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종종. 아니, 자주 꾸고 요즘엔 매일 꿔.”

잘못 들었나? 아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녀를 뚫어져라 보는 헬리의 눈은 거의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폭탄을 펑펑 터트리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 꾸고 있다는 게 문제……, 라고 해야 하나. 뭐, 마음에는 안 들지만 사실이지.”

“다 꾼다고?”

목소리가 왜 이래? 수하는 말을 해놓고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거의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서둘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

아, 여기서도 삑사리가 심하게 났다. 수하는 눈을 질끈 감았고, 헬리는 태연하게 못 들은 척했다. 솔직히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티를 내면 수하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게 뻔했다.

“응. 우리 일곱 명, 다.”

뱀파이어 소년들은 다 그녀의 꿈을 꾼다는 얘기에 수하는 창피함도 잠시 잊었다.

“꿈에는 수하 너도 있고, 레일건 마스터도 있고, 그 여자의 쌍둥이 언니도 있고…….”

수하는 말하기 너무 어려웠던 얘기를 헬리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풀어냈다.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르단, 그 남자도 나와.”

그녀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왕의 후계자 교육을 받을 때는 저런 허술한 모습은 없었는데. 헬리는 눈을 약간 가느스름하게 뜨며 수하를 살폈다.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와 책임 따위 없이 나이에 걸맞게 솔직하고 자유로이 성장한 그녀가 공주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아마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적들이겠지. 너도 같은 꿈을 꿨을 거라고 추측하는 중이야.”

그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수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꿈에서 너도 날 봤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에 수하는 발개진 귀만 내놓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네가…….”

헬리는 주변을 살피다가 말로 하는 대신 생각을 전했다.

피를 마시고 몸이 건강해진 건, 기억나?

생각에는 질문뿐만 아니라 헬리가 보았던 장면까지 담겨 있었다.

예복을 갖춰 입은 공주가 제단 위로 올라가서, 신성하게 분류된 피를 마시는 장면이 수하의 뇌 속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녀가 직접 계단을 올라가서 마시는 모습을 남이 보는 시각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이 가쁘다. 쌕쌕 숨을 내쉬는 소리도 커졌다. 수하는 얼어붙어서 시선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아아. 차가운 얼음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느낌이었다.

이건 현실이구나. 냉정한 과학으로 쌓아 올리지 않은, 비이성적인 사실이지만 그녀가 보고 느낀 모든 것이니 현실이었다.

같은 꿈을 꾸었다는 헬리의 고백에 수하는 기쁨이나 안도감보다 충격을 먼저 느꼈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 손을 보다 못한 헬리가 꽉 잡았다.

“수하야. 숨 쉬어. 괜찮아.”

“나, 나는…….”

어쩌면 여태까지 방관해왔는지도 모른다. 한 걸음 떨어져서, 친구들을 돕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레나가 수하를 아는 척했을 때부터, 아니, 훨씬 이전부터 이 모든 일은 그녀와 깊게 관련된, 그녀의 일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기숙사 월담을 하면서 누가 잘생겼다느니, 어떤 운동을 하고 싶다느니, 친구들과 꺅꺅대며 수다를 떨던 소녀에겐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무서웠다. 가공할 힘을 가진 적들이 무서운 건 둘째 치고,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걸, 고작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녀가 어떻게 잘 처리하겠냔 말이다.

“괜찮아. 내가 끝까지 같이 갈 거야. 수하야, 날 봐. 응?”

귀에서 삐이, 하고 이명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헬리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예 탁자를 돌아 그녀의 곁에 앉았다.

“수하야.”

빨갛게 물들었던 얼굴을 살살 달래며 그를 향해 돌리게 하고 보니, 이미 허옇게 질려 있었다.

“헤, 헬리.”

“응.”

“만약에 이게 다 사실이면…….”

“사실이야. 아마.”

적들은 소년들을 추적하는 게 아니라 수하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다녔다.

“괜찮아.”

그는 덜덜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공주님 지키라고 기사들이 있는 거잖아.”

그의 품 안에서 그제야 힘없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겨우 웃네. 다행이다.

“와…….”

“왜? 사실이잖아.”

“난 그 말은 차마 입 밖에도 못 내겠던데…….”

수하는 거침없는 헬리를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 그래서 말을 못 하던 거였어?”

여왕의 유일한 딸이니 공주인 거고, 그들은 기사이니 기사인 건데. 그게 뭐 어때서. 헬리는 몹시 민망해하는 수하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있었던 일이잖아.”

“넌 그렇게 생각해? 그게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지? 수하는 스스로 꿈을 꾸고, 또 트레나의 입에서 그녀를 아는 척하는 말이 나와도 반신반의 중인데 헬리는 아주 확고했다.

“응. 믿으니까 말이 다 되던데.”

그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다 이어져서 말이 되게 꾸는 꿈이 어디 있어? 꿈이 아니라 기억인 거지. 그런 생각 안 해봤어?”

“했……, 했지만…….”

수하는 문득 헬리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그녀의 어깨를 안고 토닥여주고 있었다. 다시 화르륵, 얼굴에 불이 붙었다.

“하긴 우리는 일곱 명끼리 꿈도 대충 보여줬으니 확신이 들었지만, 너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을 테니 당연한가……?”

빳빳하게 굳어버린 수하는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때 무슨 일이 있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거야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고. 무엇보다.”

헬리는 말을 잠시 끊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때마다 그는 꿈속의 그 평정심 강하고 노련하던 기사와 자신이 같은 사람이란 걸 확신했다. 원장선생님은, 스승님은 그에게 마음을 접으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절대로 그러지 못했을 거다. 눈에 담는 순간 마음은 확고해지고, 닿는 순간엔 도저히 끊어내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만났잖아.”

소년들이 그녀를 찾아낸 것인지, 그녀가 소년들을 찾아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서 지킬게.”

뭐든. 동생들, 자신의 목숨도, 무엇보다 수하까지 전부 다.

“무슨 소리야? 대충 보니까 내가 너희를 지켜줘야겠던데.”

그녀는 일부러 씩씩하게 말하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빠졌다. 그만큼 헬리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그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 공주님 눈에 기사들이 성에 안 차시나?”

“악! 아악! 악!”

기겁을 한 수하는 낮게 비명을 지르며 헬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너 진짜 그런 말 좀 하지 마……!”

아. 다시 가까워졌다. 이렇게 민망해할 지경이니 여태까지 왜 말을 못 했는지 이해는 가는데 말이다. 헬리는 빙긋 웃었다.

“싫은데요, 공주님.”

반항의 대가는 팔뚝 한 대였다.

“아야.”

헬리는 과장되게 제 팔을 잡았다.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엄살 부리지 마.”

“진짜 아파. 뼈 부러진 거 같아.”

“뼈가 부러졌으면 너 말도 제대로 못 해.”

이제 골절상이나 타박상 정도야 훤하게 구분하는 베테랑이 된 수하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끝인 건가. 그건 싫은데. 단박에 검은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가려고?”

“아니, 차가운 거 마시려고. 여기 얼음 넣은 커피는 없나? 너 뭐 더 마실래?”

아. 아니구나. 헬리는 언제 서운해했냐는 듯 얼른 웃었다.

“디저트 없어? 단 거 먹자.”

너는 단 거 먹고 힘내고, 나도 단 거 먹고 힘내고. 힘내서, 이번에는 마음 접을 필요 없이 한 번 서로 마주 보기라도 하자.

공주의 어머니였던 여왕이 다스리던 나라가 지금은 없는 걸 보면, 솔직히 이젠 공주든 기사든 그런 신분은 의미 없는 거 아닌가.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도 몇 번이나 살아남은 소년의 가슴은 꿈으로 가득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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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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