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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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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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꿈 (16)
2023.02.2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후로 수하는 헬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헬리가 그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새삼 의식된 것도 있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이젠 말 그대로 말해야 했다. 말을 할 때가 되고도 지났다. 하지만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있잖아, 내가 사실 꿈을 꾸는데 말이야, 꿈에서 레일건 마스터도 보고 저 다르단이란 남자도 봤거든? 신기하지? 응, 나도 신기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말이야. 거기에서 나는 공주고 너희는 기사…….
‘아으아아아악! 아악! 못 해! 못 해! 애들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수하에게도 이른바 사회적 체면이란 게 존재했다. 어떻게 공주니 기사니 하는 말을 멀쩡한 정신으로 입에 담는단 말인가.
‘아, 레일건 마스터가 날 공주라고 불렀지. 아주 확실하게 날 알아봤어.’
그러니까 그 꿈이 사실이긴 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걸 애들한테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분명히, 분명히 말이다. 헬리도 트레나에게 ‘계집애가 아니라 공주님’이라고 했는데, 분명히. 신경 쓸 거 없다고 했지만 수하는 똑똑하게 들었다.
‘그게 혹시 날 말한 걸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돌아보았지만 헬리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그리고 당시엔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질 새가 없었다. 어쨌든 이런 정황들을 다 모으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말은 해야 할 텐데.
‘근데, 내가 진짜 공주인 건 아니잖아?’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수하가 공주인가? 공주가 수하인가? 설마 전생? 전생이면 그녀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외모만 똑같은 거 아닐까?
‘……나는 도대체 뭐지?’
그래서 사춘기라면 누구나 다 고민하다 확립한다는 자아정체성을 다시 찾는 지경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어쨌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애들이 도대체 싸울 때 레일건 마스터가 뭐라고 말한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지 머리를 맹렬히 굴리고 있는데 말이다.
‘근데 왜 안 물어봐?’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 미치겠네. 일단 가장 절실했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는 건 다 했는데 말이다. 그다음에는 무조건 소년들과 또 마주해야 했다.
프린태니어 시를 떠나 정신없이 이동하면서 일단 잠부터 잤던 건 다 끝났다. 애들도 다 정신 차렸을 테니 멀쩡한 머리로 지난 싸움을 하나하나 조합하다 보면 분명히 물어볼 텐데.
특히 헬리가 말이다.
“옷이 그게 다야?”
나오는 그녀를 보고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오던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응, 왜?”
“일단 이거 입어.”
헬리는 외투를 벗어줬다.
“그리고 옷은 좀 더 사자.”
“으응? 짐을 늘려서 뭐하려고? 난 괜찮은데.”
“지금부터는 그런 소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친 사람도 있는 마당에 괜찮은 게 어디 있어, 최대한 몸을 챙기면서 버텨야지.”
헬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에 실어둔 가방 안에서 다른 겉옷을 꺼내 걸쳤다.
이동수단은 수시로 바뀌었다. 주로 가명으로 빌린 렌터카를 사용했는데, 그것도 오래 이용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동한 뒤 곧바로 두고 다른 이동수단으로 갈아타는 식이었다.
그러니 짐은 점점 간소해졌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사서 쓰고 버렸다. 추적을 따돌리면서 쉬고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오토널에 갈수록 추워져.”
“뱀파이어들은 아무래도 밤이 긴 곳을 선호하니까 그렇겠네.”
수하는 커다란 헬리의 옷에 푹 잠기다시피 했다. 은은한 향이 난다. 바로 요전에 이동하면서 꿨던 꿈을 다시 떠올리니 헬리의 얼굴을 보기가 더 어려웠다.
“많이 힘들어?”
“약간.”
“나와 괜히 엮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인가.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일말의 불안감까지 엿보여서, 약간 미간을 좁힌 수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왜 날 안 봐, 섭섭하게.”
“지금도 보고 있잖아.”
헬리는 대답 대신 그냥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때는 꼭 꿈 안에서 본 그가 튀어나온 것 같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약간 다정한 미소만 지은 채 부드럽게 바라본다. ‘그게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라는 시선이다.
별일 아니라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안 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다무는 것도 안 된다. 그는 그녀가 입을 열고 솔직하게 말할 때까지 무한히 기다릴 수 있었다.
‘……얘 이러려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왜 안 물어보지, 분명히 물어볼 텐데, 하고 고민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하는 이걸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물었다.
“시간 있어?”
“오늘은 여기에서 머물 거야.”
“그럼 따라와. 앉아서 얘기해.”
임시로 머무는 숙소 주차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수하는 먼저 걸어가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공주였다면 이런 순간에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 그녀는 왕국의 후계자로 키워져 수하보다 훨씬 똑똑할 테니 더 현명하게 슬쩍 말을 흘리지 않을까? 수하는 너무 난감하기만 해서 근처 카페에 앉아서도 컵만 만지작거리며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헬리는 반면에 느긋하고,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차분하게 수하를 기다리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선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는 게 즐거운 걸까? 하긴 수하도 관광객이었다면 신나게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다.
“있잖아.”
트레나와의 싸움을 기점으로, 수하는 적어도 그녀가 끝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다. 여기에서 멈춘다고 해도 뱀파이어들은 계속 그녀를 추적할 것이다. 그러니 소년들과 함께 가야 하는데, 이 여정에서 그들과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녀가 부르면 곧장 서늘하고 검은 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모든 게 불분명한 수하와는 달리 곧은 확신을 가진 시선이었다.
“그…….”
어떻게든 돌려 물어볼 생각이었다. 간접적으로 꿈 이야기를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선에서 슬쩍 흘리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는 게 가장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수하답지 않게 돌다리를 여러 번 두드리기만 하는 거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많이 두드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헬리는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었으니까.
‘아, 그랬구나.’
이미 말할 때까지 기다렸던 거구나. 기다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자리까지 깔아준 거다.
헬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소년들도 물어보지 않았다. 트레나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기억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피곤해도 계속 복기하며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필사적으로 짜 맞췄던 헬리가 왜 수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왜 안 물어봐?”
헬리는 대답 대신 눈으로 되물었다. 뭘?
“싸울 때 레일건 마스터가 나한테 아는 척했잖아.”
“아. 공주님이라고 불렀던 거.”
“어으으으…….”
수하는 당장 어깨를 움츠리며 질색했다. 헬리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럴 거 같아서 안 물어봤어. 너도 모르는 것 같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사실은 예전에 뱀파이어들이랑 친했다든가, 아니면 레일건 마스터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수하였다면 의심을 하든가, 의심까지는 아니라 해도 의문은 가졌을 거다.
“아, 네가 첩자였다?”
“그런 가정을 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더 네 앞에서는 행동 조심해야겠다. 뱀파이어들이 나랑 친한 척하면 네가 의심할 거 아니야?”
“야.”
헬리는 정색하는 수하를 보며 자꾸 웃었다. 아, 어떡하지.
“거봐. 너도 절대로 안 그럴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너야 그 뱀파이어들이랑 원래부터 원한 관계인 거 같고…….”
“응. 리버필드 시에 오기 한참 전에 그랬어. 애들이랑 다 같이 보육원에서 자랐거든. 보육원이라고 해봤자 우리 일곱밖에 없었는데. 좀 이상한 곳이었지.”
다정한 보육원 선생님들과 원장선생님 ‘마지’와 함께 살다가, 어느 날 습격당해서 일곱 명만 도망치고 선생님들은 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꺼내 풀어놨다.
“네가 나타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잠깐 보육원 자리에 갔었어. 다 무너지고, 시신밖에 없더라고.”
수하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무섭고, 아픈, 그리고 철저하게 뱀파이어 소년들의 사생활이다. 이걸 그녀가 알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헬리는 덤덤하게 말했다.
“오래된 이야기야. 레일건 마스터가 그때 습격했던 뱀파이어였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원장선생님이 우리를 지키려다가 마스터한테 죽었다는 것도 알았지.”
알지 못하던 과거의 일 중 하나가 드러난 셈이었다.
“나도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수하야. 드리프터들과 리버필드 시 외곽에서 싸웠던 날 기억나?”
말하지 않은 거라니? 수하는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때 읽어낸 정보 중에, 중요한 게 하나 있었어. 놀랄까 봐 너한테 말하지는 않았지만.”
헬리는 주변을 살피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보다, 늑대인간들보다 더 열심히 찾고 있는 존재가 있대. 정확하지는 않아. 다만, ‘다른 사람 눈에 띌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라고 했지.
그는 수하의 표정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는 걸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이미 그게 너일 거라고 생각했어.
수하가 숨기고 있는 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거다. 반신반의하던 일은 레일건 마스터와 부딪친 후로는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레일건 마스터가 네게 아는 척을 했겠지.
완전히 얼어붙은 그녀는 조금씩 호흡을 멈추기 시작했다.
“수하야. 숨 쉬어.”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수하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자신이 호흡을 멈췄다는 걸 깨달은 그녀의 좁은 흉통이 들썩거렸다.
“괜찮아?”
“어……, 잘 모르겠어.”
그렇게 두려운 힘을 가진 뱀파이어들의 표적인 친구들을 돕는 것과, 표적이 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래. 그럴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어.”
어릴 때부터 무술을 교육받고, 또 죽음의 위협에서 수도 없이 도망쳐봤던 소년들과 평범하게 자란 수하는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길게 두고 보면서 확실해질 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트레나가 수하를 알아보는 순간엔 모든 게 확실해졌다.
“나는 그런 뱀파이어들 몰라. 이건 네가 내 생각을 읽어도 괜찮아. 정말 몰라.”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그녀는 너무 불안해 보였다. 헬리는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덮었다.
“알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나도 알아봤잖아. 노아도 알아봤다고. 아니, 내 형제들은 전부 다 알아봤어. 그런데 우리가 그 여자를 예전에 만나 본 적이 있을까? 보육원에서도 못 봤는데.”
수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헬리의 말을 듣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하지만 만났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난 걸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
그리고 헬리는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수하야.”
그가 이름을 부드럽게 부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떨어졌다.
두려운 사실을 목전에 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부르는 사람이 헬리이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그의 곧은 눈빛만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는 온통 희뿌옇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홀로 똑바로 분명하게 수하를 응시했다.
“잘 때 혹시, 꿈꾸니?”
수하가 몹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제정신으로는 절대 못 물어볼 질문이라 생각했던 걸, 헬리는 덤덤하고 멀쩡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
오토널 시 깊숙한 곳.
쌍둥이 자매 트레나가 떠들썩하면서도 허름한 술집을 즐거워하면서 운영하는 것과는 달리 트리샤는 고풍스러운 양식과 권위가 느껴지는 건축을 사랑했다.
때문에 그녀는 오토널 시의 가장 유서 깊은 시청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밤이었다. 추운 날씨로 인해 이곳의 밤은 무척 길었으며, 때문에 다르단을 섬기는 뱀파이어들도 이곳에 아주 많이 거주했다.
타닥, 타닥, 벽난로만 장작이 타는 소리를 낼 뿐 그 밤은 늘 그랬듯이 평온하고 조용했다. 에스티발 시의 물류창고에 불이 난 관계로 이곳에 배송되어야 할 늑대인간들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하긴, 그들이 온다고 해도 이미 무력화시키는 향에 절여져서 아무런 소리도 못 냈을 거다. 어쨌든 트리샤는 동생과는 달리 시끄러운 건 싫어했다. 그래서 오늘도 혼자 앉아 열심히 다르단을 위해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의 창문은 꼭꼭 닫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섬뜩한 기분이 어깨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이상하다. 트리샤는 본능적으로 고풍스러운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무도 없나?”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전화벨 소리도 못 듣는 거겠지.
트리샤는 레일건 특유의 정신 나간 소음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시끄러워서 못 들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로도 다섯 시간 동안 열 번이나 레일건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 통화도 연결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유일한 혈육이자 쌍둥이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트리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사실을 예감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