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꿈 (15) (59/81)


59. 꿈 (15)
2023.02.2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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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는 트레나의 시신에도 불을 놓았다.

“다르단의 성격으로 봐선 트레나의 시신도 필요하다면 실험체로 쓸 거야. 그자의 눈에는 모든 게 다 실험대상이야.”

헬리는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 뱀파이어들을 상대할 때마다 결국 얻게 되는 정신적 피로도와 역겨움이 상당했다.

“더 나은 부하를 얻으려고?”

지노가 물었다. 그건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헬리는 그래서 픽 웃었다.

“아니, 더 나은 힘을 얻으려고. 부하 같은 건 도구야. 그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어.”

“……마주칠 때마다 감이 안 좋긴 했지.”

헬리는 지노를 쳐다보았다. 언제 본 적이라도 있냐는 시선이었다.

“꿈에서.”

“그래, 꿈에서.”

혹은 우리도 모르는 아주 머나먼 과거에서.

“……진짜 사실이야? 그게 꿈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일이냐고.”

지노는 시신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연신 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기억들 몇 개를 뒤져서 봤어. 시온이 떠올리라고 명령하니까 곧바로 보이던데.”

더 말을 하기도 힘들어서, 헬리는 그가 보았던 트레나의 기억 중 장면 몇 개를 지노에게 보여주었다.

트레나의 눈으로 본 재상 다르단, 여왕, 병약하다가 건강해진 공주, 그리고 공주의 곁을 늘 삼엄하게 지키고 있던 그들. 뱀파이어 소년 일곱 명.

눈이 커다래진 지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헬리를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가, 결국 도로 주저앉았다.

“와, 우와…….”

순식간에 생생한 기억과 꿈이 합쳐졌다. 나 혼자 꾼 꿈이야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과 꿈이 같다면 그건 허상이 아니다.

“나는 그냥 믿기로 했어. 이쯤이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지.”

“그럼 우리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거야?”

그럴 리가! 지노가 경악하는 사이 뒤에서 터덜터덜 이안이 걸어왔다.

“나이가 많은데 왜 보육원에서는 한참 어렸겠냐? 분명히 중간에 뭐가 빠진 거지.”

예를 들면, 보육원 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과 어렸던 그들 말이다.

이안은 지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다시 어려져서 보육원으로 갔다는 거야? 어떻게?”

“재상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이야. 뭐, 어떤 식으로든 배신했어. 큰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너무 뻔해서 그냥 지나갔어. 다른 거 알아내기도 바빠서.”

정말 필요한 사실만 어떻게든 빠르게 빼낸 헬리는 피곤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트레나에게서 알아낸 것을 늑대인간 소년들과 공유할 때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다.

“노아가 들으면 그럴 줄 알았다고 씩씩댈 거야. 걘 꿈에 재상이 보였을 때부터 싫어했거든. 그게 훤히 보였는데, 역시나.”

“뭐 때문에 배신을 해?”

글쎄. 헬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마어마한 열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건물도 이젠 거의 다 전소되어 흰 연기만 사방에 날리는 중이다.

늑대인간 소년들이 저쪽에 모여 있는 사이, 뱀파이어 소년들은 이쪽에 모여서 잘 챙겨놨던 피를 따로 마시며 서둘러 원기보충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부터 이어질 장거리 여행이 몹시 고될 것이다.

“아, 그래. 뻔하지. 늑대인간들 잡아가는 거 보면 뻔해. 그놈의 힘 때문이지?”

이안의 빈정거림에 헬리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트레나에게서 읽어낸 그 구역질 나는 욕망을 조금 느끼게 해줄까? 그걸 느낀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다들 알 수 있을 텐데.

고민하던 그는 그냥 관두기로 했다. 그 역겨운 욕망, 그릇이 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갈망하는 끝없는 고집은 헬리만 느끼고 마는 게 나았다. 고생한 동생들이 그런 걸 보고 들으면 안 된다.

“그렇지. 정확하게는 공주가 마신 피 때문이야.”

“그, 늑대신인지 수호신의 피 말이지? 그거 마시고 병은 나았대? 매일 골골댔잖아.”

툭 하면 쓰러지고 열이 올라 힘들어하던 걸 이안은 꿈에서 보았다. 혹은 기억했다.

“그런 모양이야. 낫다 못해 아주 강력해진 게 분명해. 다르단이, 재상이 그 힘을 계속 노리고 있으니까.”

“도대체 그 힘이 뭔데?”

이안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잖아.”

뱀파이어 소년들이 완전히 뻗어서 피라도 마시며 끙끙댈 만큼 강력했다. 옆구리를 뚫린 시온은 지금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 혈액팩만 까는 중이었다.

“낮에 취약하지.”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헬리는 인간이었을 때와는 달리 햇빛 아래를 거닐 수 없다는 트레나의 절망감을 생생하게 느꼈다.

“흡혈 욕구를 잘 이기지도 못해.”

“……그건 나도 그랬는데.”

지노가 머뭇거리며 말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보육원에서 한때 흡혈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자카를 깨문 적이 있었다.

“네가 지금도 그러는 건 아니잖아. 정도도 강하지 않았고.”

“아니, 깨물었다니까.”

“어느 정도든 다르단의 부하들과는 비교할 게 못 돼. 마약 금단증상 수준이더라고. 미쳐서 충족될 때까지 인간을 계속 죽이고, 피를 마시는 거야.”

사람 수준이 아니었다. 이성이 싹 휘발되고, 흡혈 욕구만 남아 상대를 파괴하는 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흡혈 욕구를 여러 번 보면서 가족과 일족을 잃은 늑대인간 소년들의 혐오감이 이해될 지경이었다.

“우리랑 달라. 그건 평생 가는 모양이야.”

“그럼 다르단 그놈도?”

“그렇겠지. 그러니까 계속 늑대인간들의 피를 실험해보는 거고. 결국 늑대신의 피가 궁극적인 목적인 거야.”

“야망이 강하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반란을 일으킬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나라를 통째로 엎어버렸단 말인가. 그냥 나이트볼을 하고 공부도 하고, 형제들과 즐겁게 지내는 게 우선인 그에겐 반란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 거대했다. 그는 그래서 그의 일상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물었다.

“그럼, 원장선생님은?”

당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솔론이 고개를 들었다.
“원장선생님을 레일건 마스터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래?”

꿈이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건 아무래도 좋다. 그것보단 그들을 길러주고 사랑해줬던 보육원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더 궁금하고 더 중요했다.

우리는 왜 보육원에 있었고, 왜 습격을 받은 걸까?

왜?

소년들의 시선이 헬리에게 모이고, 불길이 마지막 불꽃을 발산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

수하가 앉은 채로 솔론의 등에 이마를 박고 자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칸은 잠시 생각했다.

‘……걱정되는데.’

그러곤 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가 사사로이 걱정하는 것일 뿐, 수하에겐 실례인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혼자 성별이 다른 입장인데 얼떨결에 이 기나긴 전투에 끼게 되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수하가 제일 힘들 거다.

솔론은 이안의 어깨에 기댄 채 자고 있으니 뭐, 그럭저럭 평온한 모습이다. 게다가 이안의 다리는 그 뱀파이어들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타헬이 떡하니 베개로 삼아서 자고 있었다. 같이 2층에서 싸우더니 좀 친해졌나? 어쨌든 다들 잘 자는 중이다.

‘평안히 자길.’

칸은 그들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하지만 수하는 평안한 잠과는 약간 거리가 먼 꿈을 또 꾸고 있었다.

*

온갖 수를 다 쓰고 의사들을 다 동원해봐도 낫지 않던 공주의 불치병은 여왕이 결국 꺼내든 고대 수호신, 바르그의 피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공주는 이제 침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며 날아다니다시피 했고, 그녀의 어머니인 여왕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공주님.

아, 마지, 장관님, 울지 마. 울지 마!

그리고 그녀를 아끼는 또 다른 존재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었다. 점잖게 곁에 시립한 헬리가 마지라 불린 장관에게 손수건을 꺼내 내미는 사이, 공주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를 달랬다.

울 일이 아닌데 왜 울어? 우리 엄마는 완전 신나서 춤추고 다니시던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주 기쁠 때 눈물이 나기도 하는 법이랍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낸 마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선생님. 안다구.

왕국의 고귀한 후계자를 여태까지 잘 가르쳐온 스승인 마지는 잠시 벗어놨던 안경을 쉽게 다시 쓰지 못했다.

툴툴대는 제자이자 공주의 뺨은 보기 좋게 생기가 감돌았고, 혈색이 아주 좋았다. 언제나 걱정될 정도로 창백했는데 그녀는 이젠 환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아는데 조금 민망하네. 내가 그렇게 아팠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아프셨던 거 맞습니다.

말도 못 하고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마지를 대신해 헬리가 아주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러기야?

사실이니까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벽을 부수는 걸 보고 우는 사람은 또 처음 봐서 민망하네.

공주는 몹시 민망해하며 부서진 담장 잔해를 발로 슥슥 밀었다. 그냥 신나게 공중제비를 돌면서 담장 위에 올라서려고 했는데 그걸 부숴버릴 줄은 또 몰랐지. 진짜 몰랐다니까.

공주님. 그냥 벽을 부순 게 아니라 돌을 부순 겁니다. 이젠 정말 기물파손에 주의해주십시오.

공주는 대답 대신 주먹을 꽉 쥐고 헬리를 쳐다보았다.

물론 호위기사들의 안전에도 만전을 기해주시고요. 기사들도 아주 연약하답니다.

마지, 쟤 좀 끌고 가서 새로 가르쳐!

그때쯤 이 평범한 제자들의 싸움에 간신히 눈물을 그친 마지는 손수건을 내려놓고 안경을 도로 썼다.

뭘 가르칠까요, 공주님?

공주를 공경하는 법, 충성하는 법, 뭐 그런 거!

저 정도면 충신입니다, 공주님.

하하, 공주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충신 다 죽었다. 너네 단체로 나 놀리기로 작정했지? 아까는 시온이 궁정살림 다 거덜내겠다고 하더니!

실제로 걱정이 되는군요.

마지는 태연하게 웃으며 맞받아치는 헬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공주는 다 회복한 것 같고, 그래서 그녀의 기사들도 몹시 즐거워 보였다. 공주 역시 기사들이 슬슬 놀려대는 걸 같이 맞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늘었다는 데 행복해했다.

어쨌든, 결정적인 데서 기사들은 선을 결코 넘지 않았다. 그녀는 왕국 유일의 후계자이자 바르그의 피까지 받아 엄청난 힘을 얻은 소중한 존재이고, 기사들은 말 그대로 수호기사에 불과하니까.

공주님, 잠시 이쪽으로.

지노가 와서 정원 입구에 선 비서관을 가리켰다. 또 공주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어, 잠시만. 마지도 가지 말고 있어!

그럼요, 공주님.

공주가 휙 달려가는 걸음은 경쾌하고 속도는 무척 빨랐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휙 날리다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헬리에게 그의 스승인 마지가 말했다.

공주님께 새로운 힘이 생겼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이런, 내가 너희를 호위기사로 키웠는데 이젠 기사가 필요 없으실 지경이겠구나.

헬리는 짧게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헬리. 공주님은 장차 왕위에 오르실 분이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 나이가 어리시고 성품이 밝으시지만, 상처도 많이 받고, 버텨내는 법을 배우시다 보면 결국 지배자가 되실 거다. 바르그의 피까지 받으셨으니 그 무엇도 공주님의 운명을 막을 수 없어.

헬리는 마지를 돌아보았다. 이미 다 자라서 청년의 모습을 갖춘 그는 그만 말하라는 눈빛이었으나, 그를 가르친 스승에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못했다.

접어야 한다.

마지는 간절히 말했다.

접어야 해. 접고, 잊고, 봉하렴. 안 된다.

스승은 아마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환하게 웃고, 씩씩대고, 당한 만큼 골려주고, 위엄을 갖출 때는 한없이 진지한 공주를 보는 헬리의 눈을 봤을 거다. 그 눈빛은 감춘다 해서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보게 되니, 헬리도 어쩌질 못했다.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이지, 곁에 둘 수 있는 분이 아니야. 혼자 독점할 수도 없는 분이고.

오랜만에 본 마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사랑이 넘치는 스승이었지만, 동시에 분별을 똑바로 하는 엄격한 충신이었다.

공주님의 배우자는 아무나 될 수 없어. 충심과 연모를 헷갈려선 안 돼.

스승님. 저는 그런 게 헷갈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다만,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다르단 재상을 경계해야 한다. 공주님께서 나아지신 이후로 그 사람이 영 수상해. 지금 중요한 건 공주님의 안위와 왕위계승이지…….

예, 압니다. 재상은 저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헬리는 그쯤에서 마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이미 스승의 손을 떠나 장성한 기사였다. 다 알고 있다. 공주가 아직 어리고, 여왕은 재상을 신뢰하고 있고, 재상은 꿍꿍이가 있다는 걸 다 안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수도에서 계속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네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니?

그 말에 대답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에 얼른 지시만 해놓고 빠르게 돌아왔던 공주는 모퉁이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수호신의 피를 마시고서 더 발달한 청력은 들어선 안 될 대화를 다 들어버렸고, 그 후에는 그녀마저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지극히 사적이고, 또 묵직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마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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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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