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꿈 (14)
(58/81)
58. 꿈 (14)
(58/81)
58. 꿈 (14)
2023.02.0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프린태니어 시 외곽,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오래된 3층 건물에서 나던 끔찍한 소음과 번쩍거리는 불빛들은 이제 서서히 잦아들었다. 부딪치던 두 세력 중 어느 한쪽이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는 뜻이었다.
이곳으로 몰려들던 흉흉한 뱀파이어 무리들이 그 진압 대상이었다. 곳곳에 처참하게 쥐어뜯긴 시신들이 널브러졌다.
시신 모습이 험악한 만큼 소년들도 목숨을 내걸고 처절하게 싸웠다는 뜻이었다.
건물 바깥으로 그림자가 사납게 너울거렸고,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심했다.
엔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앞에는 마지막으로 급소를 물어 뜯어버린 뱀파이어 시신이 함께 쓰러졌다.
“괜찮냐?”
솔론이 그를 힐끗 보며 물었다.
“……죽을 거 같아…….”
으어어어, 엔지가 내뱉는 말에 픽 웃은 솔론은 부상을 입었던 마한과 루슬란을 챙겼다. 카밀도 슬슬 뒤로 빠지는 게 보였다. 남은 놈들을 정리하는 건 훨씬 영역을 넓게 부릴 수 있는 노아가 맡았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솔론의 만류에 자카와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잡을 수 있는 데까지 잡아야지. 저것들이 도망쳐서 더 큰 지원군을 끌고 오면 어떡해?”
분명히 더 큰 지원군이 있을 거다. 노아는 특히 쌍둥이 자매 중 하나만 왔고, 그들이 섬기는 재상은 없다는 게 너무 신경 쓰였다. 그러니 도망치는 놈이 하나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쩌긴, 어차피 우리는 여길 뜰 거고…….”
솔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카와 노아가 휙 사라졌다.
“……갔는데.”
엔지가 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뒤늦게 솔론도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너무 멀리 갔다간 되려 위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솔론도 자리를 툭툭 털고 나섰다.
“따라가게?”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않게 하려고. 이 뒤를 좀 부탁할게.”
“걱정 말고 다녀와.”
엔지가 손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 중에 전세가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구나. 불과 30분 전까지는 어쩌면 여기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각오를 다졌는데, 지금은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뒤로 후퇴하는 뱀파이어들을 칸이 가만 놔두지 않는 게 보였다. 그럼 저쪽에 합류해볼까. 엔지가 날렵하게 휙 날아서 묵직하게 뱀파이어들을 쳐냈다.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이 비겁한 놈들아!”
지금도 힘이 넘쳐나는 이안이 1층에서 물러나는 뱀파이어의 뒷덜미를 붙잡아 던졌다. 후퇴한다면, 결국 저들은 트레나를 구출하는 것을 포기한 셈이다.
그사이 타헬에게 의지한 시온과 으르렁대는 마한, 그리고 지노가 비틀거리면서도 헬리에게 가까이 왔다. 정확하게는 헬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트레나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언제나 의기양양하다 못해 사납고 잔인하던 트레나의 눈은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자크, 뒤쫓아!”
“어, 지금 가.”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칸이 나자크의 뒤통수에 대고 외친 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걸음이 묵직하게 들렸다.
“다들 괜찮아?”
물어보던 칸의 시선이 지노에게 닿았다.
“다쳤구나.”
“별 거 아니야. 회복 중이고.”
지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당장 솔론을 비롯한 추적대에 합류해서 후퇴하는 놈들을 쓸어버렸을 텐데. 불이나 그림자 같은 광역능력은 추적할 때도 상당히 쏠쏠했다.
“좀 앉아.”
당장 타헬이 지노에게 한마디 했다. 앉긴 뭘 앉아. 그는 정말 괜찮았다.
“그래, 좀 앉아라. 어딜 다쳤어?”
괜찮은데, 늑대인간 소년들이 오히려 지노를 걱정하며 물었다. 지금은 레일건 마스터를 심문하는 아주 중요한 때인데 말이다.
“엄청 세게 날아갔잖아.”
치료하다가 기겁하는 줄 알았다며, 타헬이 지노를 살폈다.
어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노는 황당해 하면서도 셔츠를 걷었다.
“지노는 좀 쉬는 게 좋겠어. 그리고 시온이 날 좀 도와줄래?”
트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헬리가 중얼거리자 시온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어느새 슬쩍 혈액팩 하나를 따서 마시고 있었다. 수하와 늑대인간 소년들이 다 보고 있는 데서 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 집중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늑대인간 소년들이 슬쩍 모른 척해주고 있다는 것도 훤히 보였다.
“나 붙잡아.”
얼른 수하가 다가와서 그를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살짝 웃은 시온은 곧장 고개를 돌리고 트레나를 바라보았다.
“시, 싫어, 안 돼!”
여태까지 무력감이 주는 공포에 휩싸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던 트레나가 고개를 뒤채기 시작했다. 시온이 뭘 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기에서 죽는 게 낫겠다고 그녀가 마침내 죽을 생각을 하는 순간, 끝내 그녀의 시야를 노랗게 빛나는 눈이 가득 채웠다.
그리고 수많은 늑대인간을 도륙하다 못해 종족 전체를 말살하던 레일건 마스터는 움직임을 멈췄다.
*
“아씨, 아무래도 빠져나간 것 같지?”
노아는 신경질을 내며 자카에게 물었다. 적당히 쫓으라는 나자크의 말에 일단 멈췄지만, 아무래도 찝찝했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죽였는데도 말이다.
“느낌이 그래.”
“다 잡을 수는 없지.”
자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면 우리가 크게 이긴 거야. 그리고 결국엔 저쪽도 알게 될 일이니까, 시간문제에 불과해.”
“그러니까 난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고 싶다는 거지.”
도망치는 놈이 곧장 재상에게 가서 날름 일러바칠 테니, 소년들도 움직여야 했다.
노아는 단단한 흉통을 한 번 크게 부풀렸다가 다시 꺼트렸다. 끝을 볼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자카는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노아의 어깨를 감쌌다. 얼굴이 부루퉁해진 노아는 살살 끌고 가는 자카에게 못 이기는 척 그냥 털레털레 끌려 돌아갔다.
어쨌든 돌아가서도 할 일이 꽤 많았다. 여기로 몰려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빨리 짐을 챙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고, 동시에 다친 소년들도 돌봐야 하며, 앞으로 어디로 갈지도 정해야 했다.
자카가 짧게 웃는 소리를 내자 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웃어?”
“아니…….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일단 싸운 게 어이가 없어서.”
“아. 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계속 나오는 단서들을 따라가면서 목적지가 정해지는 식인 데다, 여기에서 살아남지 않는다면 사실 미래도 기약할 수 없었다.
“보육원에서 나올 때도 생각나고. 그런데 그때와는 또 다르고.”
노아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 보이는 자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가야 한다는 건 아는데, 뭐든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으면 좋겠어.”
드러난 과거든, 진실이든, 전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으면 좋겠다.
“내 생각엔 이미 충분히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
노아는 공주를 제단 위로 올려보내고 재상과 그의 부하들을 경계하던 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전부 납득이 가능한 일이야.”
아, 우리가 이래서 이렇게 모인 거구나. 우리는 계속 함께였구나. 그래서 수하를 만난 거구나. 하나하나 납득하고 이해하면 할수록 더더욱 유대감은 강해졌다.
“그래. 저 선샤인시티 주전들 빼고.”
자카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노아는 이 와중에도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걔들이랑 엮인 건 좀 특이하지?”
“좀 특이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이상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합이 꽤 잘 맞던데?”
“나만 그러냐, 다들 그렇지. 몇 번 맞추다 보면 누구든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
말은 그렇지만, 자카도 늑대인간 소년들이라서 합이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뱀파이어 소년들을 대적할 만한 실력을 갖췄고, 전투 센스도 그만큼 뛰어나다.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이나 효율도 비슷해서 몇 번 더 함께 싸웠다간 헤어지는 게 아쉬울 지경이겠다.
나이트볼 리그에서 만났을 때는 그냥 귀찮고 짜증 나고 재수 없는 라이벌이었는데, 이젠 같이 싸우고 살아남은 전우였다.
“다 잡았냐?”
터덜터덜 저쪽에서 걸어오는 나자크가 물었다. 노아와 자카는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렇지? 이쪽으로도 도망간 놈이 최소한 한 놈은 있는 것 같아.”
나자크는 아쉬워 죽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상을 입었을 거야. 멀리 가진 못했을걸.”
자카는 노아를 위로했듯 나자크도 위로하며 다시 반쯤 부서진 건물로 돌아갔다. 새삼스럽게 바깥에서 보니 아주 가관이다.
“……저 안에 다시 들어가도 되는 걸까?”
폭탄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터져서 건물 꼴이 말이 아니었다. 3층이 그나마 외관상 깨끗하게 보였고, 1층은 여기저기 그을리고 금이 쩍쩍 가서 솔직히 다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노아는 정말 진지하게 헬리를 찾았다.
형,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한데, 바깥으로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건물이 꼭 무너질 것처럼 보여.
아.
역시나 레일건 마스터의 생각을 다 읽고 있던 건지, 헬리는 짧게 대답한 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뭐래?”
“듣기는 했는데, 생각을 읽느라 바쁜가 봐.”
“하긴 제일 중요하니까.”
나자크와 자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건물 입구에서 뜻밖에도 수하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나가는 것 좀 도와줘!”
아직 별이 지지 않고 반짝이는 밤, 소년들은 아슬아슬한 건물 안에 시신들을 몰아넣고 필요한 것만 챙겨 나왔다.
지노가 불을 만들어 3층부터 꼼꼼히 태우기 시작하는 사이, 바깥으로 나온 헬리는 여전히 시온의 도움을 받아 트레나를 심문했다.
“누가 지혈 좀 해줘. 직접 자백하게 해봤자 힘만 뺄 뿐이니까 내가 계속 읽어낼게. 나머지는 시온, 부탁해.”
적어도 모든 정보를 다 알아낼 때까지는 트레나가 살아 있어야 했다.
냉철한 헬리의 판단에 타헬이 곧장 가방을 다시 열었다. 매캐한 연기가 뱀파이어 시신이 타는 역겨운 냄새를 실어 날랐지만 소년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꼼짝도 못 하는 트레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녀는 시온의 명령에 의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늑대인간들의 피로 잔치를 벌이던 레일건 마스터의 몰락이었다.
“좀 쉬었다가 하는 게 어때?”
칸이 헬리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헬리는 대답하는 대신 잠시 미간을 문질렀다.
“아니, 곧 끝날 것 같아. 중요한 거 몇 개만 물어보면 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일건 마스터의 책상에 가져온 재상의 사진을 꺼냈다. 뱀파이어 소년들에겐 재상이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살고, 여왕이 다스리며, 공주가 살던 왕국의 재상.
“누구지?”
다르단 님, 최초의 뱀파이어이신 분. 위대한 우리들의 태조.
태조라. 최초의 왕이라고 자칭하는 건가. 한낱 재상이었으면서 건방지게. 헬리는 미간을 다시 찌푸리며 한참을 더 읽었다.
“이 자가 늑대인간들을 납치해 오라고 명령했군.”
역시나. 칸을 비롯한 늑대인간 소년들이 표정을 굳혔다.
“이 ‘다르단’이라는 자가 우두머리야. 아주 오래 산 뱀파이어지.”
“다르단.”
칸은 그 이름을 외워두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다르단이란 놈만 잡으면 되는 거야?”
열심히 트레나의 다리 상처를 묶던 타헬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니. 머리를 먼저 치기엔 우리가 너무 숫자상으로 열세야.”
오늘 밤만 해도 그랬기 때문에 헬리의 씁쓸한 말에 타헬은 고개를 도로 푹 숙였다.
헬리는 머릿속으로 급하게 흡수한 정보를 헤아리며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네 쌍둥이 자매는 어디에 있지?”
뭐? 쌍둥이였어? 경악한 루슬란이 입을 딱 벌렸다. 트레나만 봐도 뭐 저런 괴물 같은 뱀파이어가 다 있나 했는데 하나가 더 있다고?
“와, 얘기만 들어도 끔찍하다. 그 쌍둥이는 어떻게 잡지?”
“아니, 가만히 있어 봐. 그냥 쌍둥이인지 세쌍둥이인지 네 쌍둥이인지 어떻게 알아?”
섬뜩한 말을 하는 카밀 때문에 루슬란은 진심으로 소름이 끼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쌍둥이야. 오토널이라는 도시에 있다는데.”
다행히 헬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루슬란은 멈칫거렸다. 아니, 지금 이게 안도할 일이야? 오토널? 오토널은 또 어딘데? 당장 엔지와 자카가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휴대폰은 참 잘 챙긴 두 사람은 오토널의 위치를 바로 소년들에게 보여주었다.
“납치한 늑대인간들을 궁극적으로 어디로 보낸 거지?”
헬리는 늑대인간 소년들이 알고 싶었던 질문도 전부 챙겼다.
오토널을 거쳐 성으로. 태조께서 계시는 곳으로.
도대체 늑대인간들의 피로 뭘 한 건가. 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르그의 피에 비견할 피! 더 큰 힘! 완전한 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 흘러넘쳤다. 헬리는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억지로 삼켰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