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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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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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꿈 (10)
2023.01.1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무시무시하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시온은 노란 눈을 마치 불처럼 빛내며 트레나를 말로만 움직였다.
“한 걸음 물러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마저 강하게 들었다. 트레나는 저항하기가 힘들었다.
어째서? 여태까지 아무런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완전히 당했던 소년들이다. 그래, ‘소년’이었다. 다 자라지도 않았고, 경험도 없고, 미숙하기만 한 얼치기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저런 앳된 얼굴이 왜 이렇게 강력한 존재로 보이는 건가. 트레나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런데 이미 그녀는 시온의 명령에 착실하게 복종하고 있었다.
“이, 이……!”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네 부하들 물려. 물러나서 자살하라고 해.”
시온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붙잡고 한마디, 한마디,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명령했다. 트레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반항하는 것이다. 시온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말했다.
“당장.”
“무, 물러나라.”
어떻게든 그녀의 의식이 반항하려 했으나 결국 시온의 의지에 함락되어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인 뱀파이어가 얼마 없었다.
“형.”
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저 바깥에서 이상하게 야생동물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리고 환한 곳이라면 도망치는 게 맞는데, 우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밤을 지배하는 누군가가 불러들이는 것처럼.
“형, 괜찮, 괜찮아? 아니, 안 괜찮지, 그렇지. 미안해. 내가 너무 뻔한 걸 물었어.”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진 노아가 그림자로 시온을 감싸며 손으로 그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1층 전체를 장악해 밝게 빛나던 조명마저 집어삼킨 막내는 형의 상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야.”
“헬리 형, 헬리 형은 어디 있지? 다들 다쳤으면 어쩌지? 일단 내가 막고 있는데, 의사…….”
“야, 노아야.”
노아는 평소보다 훨씬 분명하게 들리고, 힘이 가득 실린 시온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나 괜찮으니까 정신 차려.”
순식간에 창백해져서 진땀까지 흘리면서도 시온의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났다.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능력으로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보며 달랬다.
“지금 싸우는 중이야. 다칠 수도 있어.”
언제나 가볍게 웃으며 골치 아픈 건 피해가고, 제멋대로 굴던 시온이 노아의 팔을 꽉 잡았다.
“충분히 나을 수 있는 상처니까 당황하지 마. 늑대인간 애들은 다닐 수 있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아차. 노아는 폭주하는 것처럼 멋대로 일렁이던 그림자를 조금 추렸다. 그제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칸이 그림자에 끌려가는 뱀파이어들을 따라 뛰어 내려왔다.
“다쳤냐?”
퍼뜩 놀란 칸이 이쪽으로 다가오려고 했지만, 물러난 그림자 때문에 좀 더 자유로워진 뱀파이어들이 또다시 그를 막았다. 계단에서 사투를 벌이다 겨우 내려왔는데 또 적이 들러붙다니. 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울지 말고.”
시온은 낮은 목소리로 노아에게 속삭이며 동생을 툭툭 쳤다.
“여기서 너 우는 거 들켰다간 죽을 때까지 놀림당하는 거 알지?”
“아, 안 울었어.”
“일단 난 봤다.”
“안 울었다고!”
혹시 누가 들을까 봐 그 와중에도 시온에게만 낮게 성질낸 노아가 아차, 하며 트레나를 살피고, 그림자로 계속 시온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버틸 수 있겠어?”
“나는 버티겠는데, 저쪽은 유지가 힘드네.”
다치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트레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을 텐데, 몸이 약간 쑤셨다. 많이는 아니고 약간 쑤신다고 주장하고 싶은 시온은 노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부축을 받았다.
“밖에 지금 곰이냐?”
“어, 근처에 있길래 좀 불러봤어. 우리가 워낙 숫자에서 열세잖아.”
정예 뱀파이어를 상대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시간을 끌고 혼선은 줄 수 있었다. 트레나와 거리를 벌린 노아는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형은 이제 말 그만해. 출혈이 심하다고.”
“어이구, 장하다.”
“하지 말라니까.”
질색하는 노아에게 기댄 시온이 하하 웃었다.
사람의 정신을 한순간에 장악하던 그 느낌이 아주 생생했다. 트레나 정도로 강한 뱀파이어를 잠식하다니, 몸만 괜찮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하필 당해서 몹시 아까웠다.
하지만 이젠 알겠다. 어떻게 하는지, 그 벽을 뛰어넘은 시온은 간신히 비틀거리고 있는 트레나와 마주했다.
“이, 이것들이 감히…….”
그녀의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오래 살아온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넘치고 자존심도 강한 그녀가 시온에게 완전히 의식을 넘겨줬다는 게 어마어마한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용서할 수도 없었거니와,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시온 같은 위험한 종자는 살려둬선 안 됐다.
‘실컷 가지고 놀려고 했더니, 그사이에 감히!’
다르단에게 바치려면 생포해야겠지만, 뱀파이어 소년은 일곱씩이나 된다. 그중에 하나쯤 죽어도 그리 크게 아쉽지는 않을 거다. 나머지 여섯에게서 최대한 피를 쥐어짜야겠지만, 그건 다르단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트레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 흔든 뒤 당장 시온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대한 늑대 하나가 달려들던 뱀파이어들을 떨쳐낸 뒤 그 앞을 막아섰다.
“부상자는 위층으로 올라가. 노아, 헬리에게 말했어?”
쾅, 하고 부딪치는 소음에 노아는 형을 더 단단히 잘 챙기고 계단으로 물러났다. 물론 그것도 쉬운 게 아니다. 어느새 또 총을 들고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쳐내야 했다.
“말하는 중이야.”
“네가 부상자를 잘 담당할 수 있겠지?”
칸은 그 와중에도 그를 도우려 따라붙는 그림자들을 보며 노아에게 물었다. 트레나가 달려들어 칸을 물어뜯으려 했다.
“어딜!”
하지만 칸은 급히 트레나를 쳐냈다. 쾅, 하고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나고 뼈가 찌르르 울린다. 정예 뱀파이어들도 힘들지만, 트레나는 그들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부상자는 지켜야 했다. 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올라가!”
“자카가 내려올 거야! 조금만 버텨!”
결국 노아가 소리를 지르며 중상을 입은 시온을 부축하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칸은 씩 웃었다. 자카가 내려왔으면 벌써 내려왔지.
솔직히 위층이라고 해서 상황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다. 특수부대 수준으로 무기를 챙겨온 이 미친놈들은 오늘 여기에서 완전히 끝을 보려 작정했다. 2층도 3층도 1층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결코 더 낫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자카든 누구든 도와주러 오지 못할 것이다. 칸이 이곳에 온 것도 예상보다 훨씬 격한 공격을 간신히 뚫고 온 거니까.
칸은 아예 계단을 등지고 섰다.
“짐승 새끼가 사람이 가는 걸 막아?”
하는 말마다 경멸이 뚝뚝 흐른다. 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들이 늑대인간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래 겪어본 일이었다.
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덤덤히 공격과 방어에만 집중했다. 말을 섞어봤자 체력낭비고 시간낭비라는 걸 이미 일찍이 터득했다.
“이놈들은 전부 죽여!”
“예!”
막는다면야 방법은 있다. 트레나는 다시 안개로 변해 칸을 통과해 위층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뱀파이어들이 그녀의 명령에 대답하며 깨진 조명을 밟고 밀려들었다.
결국 1층에 있던 늑대인간 소년들은 전부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거였다.
트레나는 그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훑어본 뒤 다시 안개화에 돌입했다. 공주를 흉내 낸 이능력에 불과해 긴 시간 동안 안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잠시 피하거나 장애물을 통과할 수는 있었다.
트레나는 그 잠시뿐인 이능력을 가지고도 충분히 잘 활용했다. 그 덕에 다르단에게도 공주를 닮은 이능력을 가졌다고 예쁨을 받았으니 이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부 죽이고 위층으로 올라와라.”
“예!”
말을 끝내자마자 안개로 변한 트레나는 칸을 스치고 지나가 계단으로 달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
분명히 안개로 변한 그녀에게 칸의 강력한 공격이 날아왔다. 통하지 않는다, 하고 픽 웃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레나는 뒤로 날아갔다. 그녀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간신히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균형을 찾으려 했지만, 칸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트레나는 다 돌기도 전에 천장에 한 번 부딪치고, 바닥에 간신히 착지해 비틀거렸다.
“어떻게!”
트레나는 경악하며 칸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어떻게 날 붙잡은 거냐!”
칸은 한숨을 쉬며 그를 공격하는 뱀파이어 하나를 트레나에게 집어던졌다. 으악, 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온 뱀파이어를 냉정히 쳐낸 트레나가 씩씩거렸다.
“애들 말이 맞네.”
칸은 정말 성가시다는 듯 트레나를 쳐다보았다.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는 그런 뒤 입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아래층에서 쾅, 쾅, 하고 묵직한 힘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간신히 계단을 그림자로 쓸어내리다시피 하며 위로 올라온 노아는 신음을 삼켰다.
‘여기도 개판이네, 진짜…….’
하하하, 이걸 웃어야 하나. 올라오면 형들이 손이라도 내밀어줄 줄 알았는데, 이안과 카밀은 뱀파이어들과 엉켜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2층으로도 창문을 통해 뱀파이어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망가진 총들과 은침이 경로를 사소하게 방해했다.
헬리 형, 어디 있어?
2층 동쪽. 무슨 일이야?
시온 형이 크게 다쳤어. 그리고 형.
뭐? 얼마나?
당장 되묻는 헬리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 동생들이 ‘크게’ 다치다니.
“뭐야, 시온?”
화르륵, 머리카락이 타겠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불이 근처를 지나가길래 얼른 피하면서 날아드는 공격자를 불 쪽으로 같이 던져준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지노가 희게 질린 얼굴로 시온에게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얘, 얘 왜 이렇게 피를 흘려? 시온! 정신 차려!”
지노의 목소리에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뱀파이어 소년들의 눈이 이쪽으로 휙 돌았다. 그리고 한 바퀴 더 휙 돌았다.
쾅, 쾅, 쾅!
1층보다 더 요란한 소리가 폭발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헬리에게 할 말도 다 못한 노아는 일단 그림자를, 아니, 어둠을 크게 일으켜 화가 난 형들의 공격을 피한 뱀파이어들을 묶었다.
“얘한테 누가 이랬어!”
이안이 격렬하게 화를 내며 물었다.
“레일건 마스터가.”
“너는!”
“난 괜찮아. 내가 시온 형을 챙길 수 있어. 형도 조심해.”
“출혈은?”
“대충 잡고는 있어.”
하지만 당장 치료를 하지 않으면 시온이 몹시 힘들어할 거다.
“그리고 형.”
이안은 이쪽으로 향하는 총구를 향해 달려들어 총을 부러트리고, 개머리판으로 뱀파이어의 머리를 날렸다.
“왜!”
“레일건 마스터가 원장선생님을 죽였어!”
싸울 때는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럴 틈이 없었다.
칸이 하는 그대로 따라 배웠던 카밀은 정신없는 난전 사이에서 시온을 꼭 껴안은 노아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관심을 둘 생각도 없었다. 뱀파이어 소년들은 뱀파이어 소년들만의 사연이 있을 테고, 거기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뚜둑, 하고 후려쳤던 뱀파이어의 목을 그대로 부러뜨린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호박색 눈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직접 말했어.”
“와,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말도 해주고.”
지노가 하하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따라 불이 무섭게 일어나 뱀파이어들에게 옮겨붙었다.
“고맙네. 죽여버려야지.”
노아의 어깨를 툭 친 지노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숨을 몰아쉰 카밀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뱀파이어 소년들의 기세가 더욱더 흉흉해진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불길이 더 거세지고 그림자는 그림자가 아니라 어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노아는 시온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축 늘어져 있던 시온이 그를 불렀다.
“노아.”
“말하지 말라니까.”
“나 기억났어. 우리 원장선생님. ‘공주’랑 친해.”
중얼거리는 말에 노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하얗게 질린 시온을 쳐다보았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