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꿈 (5)
(49/81)
49. 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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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꿈 (5)
2022.12.1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솔론의 눈에 지금 걸어가는 수하의 뒷모습이나 꿈에서 본 공주의 뒷모습이나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공주와 달리 수하는 건강하고 힘도 센 씩씩한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이 드는 건 아마 꿈에서의 기억 때문일 거다.
공주는 몹시 약하다. 그걸 꿈으로 자주 본 건 아니었지만 그냥 알았다.
솔론은 수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건강해져서 다행이지.’
건강해졌으니까, 꿈에 늑대가 되었던 그를 겁도 없이 따라 나와서 함께 놀기도 했던 거였다.
그 꿈을 미리 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녀가 과연 건강해졌을지, 아닐지 꽤나 신경 쓰일 뻔했다. 그는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향했다.
“왜?”
아까부터 복도에 서서 그가 반응할 때까지 빤히 보고 있던 노아가 물었다.
“형. 형도 꿈꿨어?”
얜 일어나자마자 하나씩 돌아가며 제 형제들에게 꿈꿨냐고 확인 중이다.
“잤으면 꿈을 꾸지. 왜?”
“나 심각해. 꿨어? 그 꿈, 꿨어?”
눈을 번뜩거리면서 묻는 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할 게 뻔하다. 솔론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다 꾼 거네. 무슨 꿈이었어? 헬리 형은 나랑 똑같은 꿈을 꿨대. 아주 똑같은 꿈.”
“피 마시는 거?”
그쯤만 이야기해둬도 노아는 바로 알아듣는다.
“형까지 꿨으면 그냥 다 꿨다고 봐도 되겠네.”
“나한테 마지막으로 물어본 거냐?”
“아니. 지노 형이랑 시온한테는 안 물어봤는데 그 둘은 대답 안 했어도 한 걸로 퉁 칠 거야.”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냐.”
둘이 들으면 그런 게 어디 있겠냐고 어이없어할 텐데. 하지만 노아는 산뜻하게 돌아섰다.
“대답 듣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형이잖아. 형이 꿨다면 다 꾼 거야.”
“어디 가?”
“헬리 형한테! 어디 있지?”
헬리야 보나 마나 수하가 끼니를 제대로 챙기나 안 챙기나 보고 있을 게 뻔한데.
하지만 솔론이 말해주기도 전에 노아는 쌩하니 사라졌다. 뭐, 알아서 찾아오겠지. 솔론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프린태니어 시 외곽에 위치한 이곳은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집이었다. 스무 명은 족히 머물 수 있는 이곳은 불편한 점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솔론은 어쩐지 리버필드 시의 따뜻한 바다가 그리웠다.
‘빨리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의 경험에 의하면, 보통 그런 소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
트레나는 말끔해진 얼굴로 돌계단을 내려왔다.
이곳의 차가운 공기는 뱀파이어들의 뼛속까지 얼려버린다. 엄격한 규율과 절도가 있었지만, 그 모든 기준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엉망이 된 뱀파이어라도 이곳에 오면 다시 멀쩡해지지만, 가슴 속에 깊은 공포를 가득 안게 된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태조 다르단이 내어준 뱀파이어들은 그녀가 직접 키운 정예만큼이나 쓸 만할 거다. 애초에 그녀가 키웠던 정예도 이곳에서 나온 뱀파이어들이니 근본은 같았다.
단지 흥겹고 즐거운 레일건 분위기에 물들어 호탕하고 쾌활했던 부하들과는 달리, 이곳에 줄지어 서 있는 뱀파이어들은 단단하게 각이 잡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부하가 아닌 태조 님의 부하들이기 때문이지.’
이유를 잘 알았던 트레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같은 뱀파이어고, 적을 소탕하는 일에 뱀파이어들은 그저 잔혹하기만 하면 그만일 뿐이다.
“어려운 임무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르단의 부하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동시에 신성한 임무이기도 하다.”
트레나는 스스로 말하면서 그 말로 위로받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 이 일은 아주 신성했다. 태조께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태조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을 가져다드리는 거다.
“먼저 프린태니어로 가서 감히 태조 님의 위대한 사업을 방해하는 것들부터 색출해야 한다.”
목표는 늑대인간 소년들과 뱀파이어 소년들. 그중 뱀파이어 소년들은 흔히 발에 채이는 드리프터가 아닌 뱀파이어들의 가장 원천적인 힘, 다르단마저도 도달하지 못했던 근원에서 나온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죽이지 않는 게 목표다.”
실수는 더 큰 공으로 만회해야만 했다. 트레나는 특히 그녀의 실수가 아직까지는 쌍둥이 언니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랐다.
들어간다 해도 모든 일이 해결된 후에 들어가야 했다. 트리샤가 실수한 걸 안다면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비웃어줄 용의가 있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살해해도 좋다.”
결국 유일한 목적인 공주를 찾는다면 늑대인간이고 예전의 그 ‘어린 것들’이고 다 죽여도 상관없었다.
“움직이지.”
모든 상처를 회복한 트레나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만회하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빛냈다.
*
“그래서.”
칸은 동생들이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며 아주 흐뭇하게 웃었다. 한참 성장기니 잘 먹고 푹 쉬기만 해도 쑥쑥 자라고, 또 다친 곳도 금방 아물 거다.
“레일건 마스터는 어떻게 잡을지, 작전을 생각해둔 사람?”
칸의 질문에 수하를 비롯한 늑대인간 소년들이 음식을 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 인간은 왜 먹을 때 저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이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댔다고!
“미안. 다시 먹어.”
볼이 터질 지경인데 눈빛은 살벌한 걸 보고 칸은 얼른 사과했다. 다시 일곱 개의 머리가 숙여졌다.
고민이 많아 보이던 수하의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나 보다. 헬리는 수하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대충 알아차렸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깨작거렸을 텐데, 씩씩하게 잘 먹는다. 그럼 됐다. 됐으니, 그는 그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노아야?”
누가 다가오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리는 형에게 막내가 머뭇거렸다.
따로 말하자는 건가. 수하가 접시를 싹싹 비우는 걸 한 번 더 본 헬리는 노아를 따라 나갔다.
“다 꿨어.”
“주어와 목적어를 좀 제대로 말해줘…….”
“아, 왜 이래. 벌써 다 알아들었잖아. 우리는 그 꿈 똑같이 다 꿨다니까. 내가 방금 솔론 형까지 싹 확인했어.”
“지노와 시온은 빼먹었겠지.”
어, 그건 어떻게 안 거지? 노아는 눈을 둥그렇게 뜨다 말았다. 헬리는 늘 감이 좋으니 눈치챘겠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솔론 형도 꿨대. 피 마시는 꿈이랬어.”
“누가 마시는 건지 물어봤어?”
“아, 형, 진짜.”
이쯤이면 너무 뻔한 거 아냐? 노아는 허리에 손을 짚었다.
“내가 형한테 무슨 꿈을 꿨는지 보여줬잖아, 아까.”
“그랬지. 갑자기 밀려들어서 내가 깨어났는데 꿈을 또 꾸나, 했다.”
“거봐. 그럼 그걸로 형이랑 내가 똑같은 꿈을 꿨다는 거 아냐.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피 마시는 꿈을 꿨다고 하면 얘기 끝난 거지.”
헬리는 동생을 약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래서?”
“응?”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자고?”
노아는 아주 비장하게 말했다.
“……형이 총대를 메자.”
“총대를 메서 뭘 하는데?”
“수하한테 딱 한 번만 물어봐 줘. 나 이젠 진짜 궁금해 미치겠단 말이야.”
“아, 그 꿈에 레일건 마스터랑, 그 여자의 쌍둥이랑, 사진에서 본 남자가 등장하는 건 신경도 안 쓰이고?”
사실 중요한 건 지금 맞서고 있는 적인 그쪽인데 말이다. 하지만 노아는 뻔뻔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나쁜 놈들이잖아.”
“그게 끝이야?”
“나쁜 놈들은 그냥 싸워서 이기면 그만인 거야. 의심할 필요도 없던데, 뭐. 딱 봐도 ‘내가 나쁜 놈이다, 뒤통수 칠 각 재고 있다’라고 온몸으로 표시하고 있잖아? 특히 그 남자.”
“재상 다르단.”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난 그놈이 뭘 노리는지 알아. 솔직히 형도 알잖아.”
“뭘 노리는데?”
후드를 쓰고 나오던 지노가 툭 끼어들었다. 아마 그들이 이야기하던 내용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나라. 좁게는 공주.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그 피지. 우리랑 다른 뱀파이어잖아.”
노아의 확신에 찬 말에 지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땐 뱀파이어가 아닌 거 같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는 헬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이건 ‘거봐, 내가 지노 형도 똑같은 꿈 꿨을 거라고 했잖아’라는 뜻이다.
“너도 꿨냐?”
헬리는 허탈하다는 듯 물었고 지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좀 머릿속이 복잡해. 이게 다 뭔지, 이걸 저 선샤인 애들한테는 어떻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수하 쟤는 어떻게 할지. 게다가 레일건 마스터를 찾아서 일단 제거는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바로 헬리가 고민하는 거였다.
칸은 지금 레일건 마스터를 잡을 생각만 하고 있겠지만, 뱀파이어 소년들의 머릿속은 훨씬 복잡했다. 꿈을 꾸면 꿀수록 고민거리가 너무 많이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뭔데?
꿈은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고민할 시간이 있어? 당장 레일건 마스터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몰라.
다르단인가 하는 그 남자는 우리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적이면 어쩌지?
보육원 선생님들은 어디까지 알고 계셨던 걸까? 뭔가를 알고 계시긴 했던 걸까?
어지럽다. 복잡한 생각은 자꾸만 빙글빙글 돌았다. 답은 없고, 명확한 건 지극히 적었다.
“……만약에 레일건 마스터가 돌아온다면 레일건 꼴을 보고 상당히 화를 내겠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속이 복잡해도 지노의 경쾌한 목소리는 풀 죽지 않았다.
*
지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엉망이 되어 뒤엎어지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부하들이 레일건으로 돌아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트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서류들이 쓰레기가 된 채 나뒹굴었다. 그녀가 수십 년간 애지중지하며 꾸미고 돌봤던 사무실은 책상이 반파되고, 책장 뒤에 숨겨놨던 금고까지 털린 채 제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이것들이…….”
책상 위에 있던 소중한 사진들도 쓸려나갔다. 금고가 털린 걸 보니 너무나 중요한 서류도 다 잃어버린 게 뻔했다.
이로써 그녀가 다르단의 명을 받아 언니 트리샤와 함께 키워왔던 점조직의 위치와 조직원이 전부 노출되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잘 지켰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나마 살아 있었던 그녀의 수하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마스터, 이미 폭발로 인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트레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다르단의 너무나 귀한 사진이 사라졌다는 게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지만, 벌어진 일이다. 다른 사진 한 장은 언제나 그녀가 목걸이에 품고 다니니 이 뼈아픈 손해는 그놈들을 싸그리 다 잡아내는 걸로 만회하자.
“그놈들, 어디에 있는지 찾았어?”
“추적할 만한 인원도 없었습니다. 내내 시체만 치우느라…….”
그리고 이 무능한 수하들도 싹 바꿔치워야겠다. 트레나는 데리고 왔던 다르단의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수색부터 시작해.”
다시 한번 프린태니어 시의 밤에 뱀파이어들이 날뛸 때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